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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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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잃어버린 건 구럼비 바위만이 아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자연과 공동체 파괴된 강정마을, 이젠 ‘생명평화문화마을’로
등록 2016-08-03 18:57 수정 2020-05-03 04:28
제주로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없던 문제가 생겨났고, 있던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갈등을 풀어야 하는 정치도 바빠졌다.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제2공항’ 건설 예정지의 성산 주민들, 해군기지 건설로 10년째 고통받는 강정 주민들, ‘제주 4·3사건’으로 68년간 고된 삶을 사는 희생자 등은 여전히 ‘정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제주에서 가장 바쁜 원희룡 제주도지사를 이 만났다. 그에게 난개발, 주택·토지 가격 폭등, 교통량 폭증, 취업난 등 현안을 묻고 대책을 들었다. 뒤이은 기사에선 ‘낯선 아름다움’의 제주어와 제주의 아픈 역사, 독특한 문화를 다룬 책들을 소개한다.
7월27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강정 해군기지 정문에서 평화단체 활동가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7월27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강정 해군기지 정문에서 평화단체 활동가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1. 아름다운 나날들

‘중덕’이라고 불리는 바닷가가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포구로 이어지는 ‘몰질’에서 동쪽으로 좁다란 농로를 따라 구불구불 내려가다 보면 내리막길 왼편으로 ‘구답’이라고 불리는 논들이 있고 그사이로 ‘구답물’이라는 작은 용천수 하천이 흐릅니다. 과거 이지역이 모두 논이었던 시절, 구답물을 따라 산딸기가 지천에 널려있었지요. 이제 시절이 변하여 주 작물이 밀감으로 바뀌어도 예전처럼 개구리 미꾸라지 땅강아지가 흔하진 않지만 개울 주변의 풍경은 그다지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로 끝에 다다르면 갑작스레 풍경이 확 넓어지며 드넓은 바다와 그 바다 가장자리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구럼비’ 바위가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바로 중덕 바닷가입니다. 제줏말로 ‘덕’은 물속으로 뻗은 수직절벽을 이르는 말입니다. 중덕이란 구럼비 바위의 가운데쯤 위치한 수중절벽과 그 일대를 일컫는 말이 되겠네요. 

구럼비 바위는 길이가 1.2km에 이르고 폭은 200~300m가량 되는 너럭바위입니다. 거북이 등처럼 깊게 패인 무늬가 가득 덮고 있지만 한 덩어리 바위입니다. 할망물과 물터진개 등 십 여 개의 용천수가 이곳저곳에서 솟아나오고 바위의 틈을 따라 흐르기도 하고 고여서 연못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 물을 따라 지하수에서만 산다는 제주새뱅이(민물새우)부터 맹꽁이, 각종 다슬기, 덤불지, 송사리, 장어, 붉은발 말똥게, 기수갈고둥, 따개비, 거북손, 홍합, 삿갓조개, 참소라, 팥게와 동남참게, 각종 바닷물고기까지 민물에서 바닷물에 사는 온갖 생물들이 층층이 구역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그 앞바다는 연산호 군락으로 전체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이었고요, 남방 큰 돌고래가 뛰어 놀기도 하고 머물다 가는 장소이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쉬는 날(농촌에서 쉬는 날은 휴일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해야 할 일이 없는 날을 뜻합니다.)이면 중덕바닷가로 나들이를 옵니다. 낚시를 하기도하고, 반찬거리를 위해 홍합이나 따개비. 거북손, 참소라를 따거나 팥게와 문어를 잡기도 하며, 미역을 캐거나 돌김을 긁기도 합니다. 그냥 멍하니 바위의 온기를 느끼며 바다를 바라보며 쉬기도 하지요. 벗들이 잡아온 각종 해산물에 소주나 막걸리를 기울이던 추억은 무엇보다 빛나는 별이 되어 남습니다. 뿐만 인가요. 어머니가 바위에 붙어사는 말미잘이나 삿갓조개를 떼어내어 끓여 주시던 죽 맛은 잊을 수가 없네요. 아버지에게 낚시를 배우고 어머니에게 먹을 것과 못 먹는 것을 구분하고 장만하는 법을 배웠으며 친우들과 수많은 추억을 쌓았던 곳이 구럼비 바위 중덕 바닷가였습니다.

강정마을의 바닷가가 이 중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강정마을 사람들에게 휴식과 함께 추억을 제공하는 바닷가는 이곳 중덕바닷가 구럼비 바위가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위 틈틈이 자라는 야생초와 야생화는 일 년 내내 종류를 바꾸어가며 꽃을 피웠습니다. 그 속에 어우러져 멀리 서쪽으로 마라도와 가파도, 가까이 동쪽으로 범섬과 썩은섬(서건도), 그리고 문섬과 섭섬(숲섬)이, 날이 아주 좋을 때면 아주 멀리 찌꾸섬(지귀도)도 보이구요, 뒤를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한라산이 묵직하게 올려다 보이는 장소입니다.

누워도 좋고 앉아도 좋으며, 맨발로 돌아다녀도 발이 아프지 않은 너럭바위 구럼비는 한여름에는 구석구석 그늘을 제공해주었고 한 겨울에도 칼바람을 막아주는 담벼락을 주었습니다. 사시사철 언제든 벗처럼 반겨주고 언제가든 풍성한 먹을거리를 주시는 어머니 같은 바위였답니다. 그리고 4·3때는 유격대와 토벌대를 피해 피난 온 주민들에게 숨을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지요. 그렇게 우리는 구럼비 바위 품에서 새삼스럽게 떠올리거나 고민해보지 않았던 단어 ‘평화’를 누려왔습니다. 구럼비 바위는 그런 점에서 명상의 장소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바위위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지요. 아주 옛날에는 구럼비 바위 전체가 제사를 올리는 제단의 역할을 했다고도 합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구럼비 바위였기에 올레 7코스를 따라 놀러왔던 사람들 중에 구럼비 바위에 앉아서 밥을 한 번 같이 먹거나 함께 놀았던 많은 사람들이 아예 강정마을에 눌러앉아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에 동참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2. 잃어버린 것들  

해군기지가 건설된 지금 강정마을 사람들은 생업을 위해 바다에 가는 사람들 말고는 휴식을 위해 바닷가를 찾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구럼비 바위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닷가 마을이지만 바닷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애써 고민하고 지키려는 노력 없이 구럼비 바위가 주는 은혜로움을 받아만 먹었기에 이렇게 아프게 잃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구럼비 바위만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부터인지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아주 오래전(문서상 최고(崔古)의 기록에 따르면 450년) 마을이 생겨난 후로 끈끈하게 이어져 왔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인해 완전히 적대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져 다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죠. 부모와 자식, 삼촌과 조카, 일가친척 간에 불화로 인해 집안 대소사는 물론, 제사와 벌초까지도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웃과의 관계나 친구관계들은 말을 하나마지요. 200여개에 이르는 친목계와 동호회, 동창회들이 모두 쪼개지거나 파산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마주치게 되면 인사는커녕 고개를 돌리거나 멀리서부터 발길을 돌리거나 피해가는 일상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 설명회나 공청회를 개최하고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사업이라면 그 결과에 승복하여 큰 앙금 없이 진행될 수 있었지만, 제주도정과 사전에 모의한 일부 주민들이 주도하여 마을총회를 향약을 위반해가며 대다수의 마을주민들이 알지 못하게 진행하고, 그 총회에서조차 반발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동조자들에게 박수를 치게 하여 만장일치라며 해군기지유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제주도정은 설문문항이나 결과에 대해 일체 공개하지도 못하는 여론조사결과를 근거로 강정마을를 해군기지 예정지로 결정할 것을 중앙정부에게 건의하였고, 중앙정부는 그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을총회로부터 단 15일만에 강정마을을 제주해군기지 대상지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후로 대다수의 마을주민들이 주민투표를 요구하자, 해군과 행정은 주민투표를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습니다. 집집마다 공무원들이 방문하여 국가가 직접시행하는 사업에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는 법률상 위반이며, 강행할 경우 마을의 숙원사업에 지원이 끊기는 것은 물론 개별농가의 영농자금 지원도 어려워진다는 협박을 하였고, 해군은 투표를 방해 할 목적으로 투표기일에 맞추어 효도관광을 진행했습니다. 그래도 주민투표를 강행하자 이번에는 찬성 측 해녀들이 조직적으로 투표를 방해하고 투표함을 탈취해 갔습니다. 투표함을 탈취한 해녀들이 탑승한 오토바이는 경찰들이 순순히 비켜주더니 투표함을 되찾기 위해 쫓는 마을주민들은 경찰들이 제지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주민투표를 성사시키기는 하였지만, 이 투표함 탈취 사건은 마을주민들간의 찬반갈등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KBS제주 방송국 기자가 우연히 해군차량 옆에 떨어져 있는 수첩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유관기관 회의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방송된 내용에 따르면, 제주도와 해군, 국정원과 검·경찰이 함께 모여 진행한 회의로써, 갈등을 증폭시켜야 사업추진이 용이하다는데 다 같이 동의하고, 걸림돌은 치우고 가야 한다며 찬성 측 주민이 반대 측 주민을 사소한 일이라도 고소·고발을 해오면 검·경찰이 적극적으로 기소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회의 내용대로 찬성 측 주민들은 반대 측 주민들을 별다른 증거도 없이 고소·고발해도 기소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습니다.

이렇듯 강정마을의 공동체 파괴는 제주도정과 해군, 국정원과 공권력의 합작품입니다. 얼마 전에는 국정원 소유 의혹이 있는 세월호가 제주해군기지 건설자재를 무리하여 과적 운행하다 참사를 일으켰다는 정황들이 밝혀지며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습니다. 국정원은 대체 어디까지 국민을 통제하고 유린하며 아프게 만들려 하는 집단일까요.

최근에는 전국적인 사안인 사드배치 문제가 성주지역으로 결정되며 대한민국이 격랑의 소용돌이에 놓여있습니다. 사업대상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단 한 차례도 지역주민에게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주군민들이 강정마을 보다는 훨씬 심한, 민주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폭력을 당했지만, 사전에 일부 주민들을 포섭하여 진행한 사업이 아니고, 재산권을 둘러싼 상대적 이익집단이 존재 할 수 없는 사업이기에 지역주민끼리의 대립이 없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사드 레이더 전자파로 인하여 성주군 전체의 지가하락 및 경제적 파탄 우려와 건강권 우려로 인해 성주군민 전체가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것을 보며 참으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물론 상대는 거대한 물리력을 가진 폭압적인 정부와 국방부입니다만, 내부대립으로 인한 공동체 분열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이렇듯 강정마을은 천혜의 자연자산만 잃은 것이 아닙니다.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넉넉한 인심’과 ‘따뜻한 정’을 잃은 것입니다.

3. 거짓말과 폭력들

서귀포시 강정 포구에서 바라본 해군기지 건설 현장 모습. 해군기지 건설 이후 강정마을에서는 구럼비 바위, 마을 공동체, 평화가 사라졌다.

서귀포시 강정 포구에서 바라본 해군기지 건설 현장 모습. 해군기지 건설 이후 강정마을에서는 구럼비 바위, 마을 공동체, 평화가 사라졌다.

국방부는 제주해군기지 사업을 하며 매번 거짓말로 일관했습니다. 병법에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라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문제는 국민들이나 주변국, 심지어는 적이라고 부르는 북한마저도 속이지 못하면서도 계속 거짓말을 한다는 겁니다.

해군기지 홈페이지를 가면 해군기지 건설 명분을 세 가지로 보여줍니다. 21세기 청해진이 제주해군기지가 될 것임을 선언하며 제주해군기지가 필요한 이유로 첫째 이어도 수호, 둘째 제주근해 해상수송로 보호, 셋째 북한의 동·서해상 해상도발 신속대응을 들고 있습니다. 다 그럴싸한 내용입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너무도 부족한 설명입니다.

우선 이어도 수호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어도는 다들 알다시피 섬이 아닙니다. 수중암초에 불과하지요. 과학기지를 그 위에 세웠다지만 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영토로 주장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이 획정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과 중첩되어 외교적으로 풀어야 할 사안입니다. 만일 우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획정되어도 해군이 직접 관리하는 것보다는 해경 관할 하에 두는 것이 외교적으로 좋습니다.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이 획정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해군이 무력으로 지키려한다면 힘의 논리에 의해 군사력이 강한 중국이 유리하게 됩니다. 딱히 제주해군기지를 지어야 할 명분으로는 부족합니다.

둘째로 제주근해 해상수송로 보호의 문제입니다. 처음에 이 문제에 대한 해군의 입장은 말라카해협의 해적문제 해결을 주된 취지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말라카해협이나 아덴만의 해적문제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며, 말라카 해협까지 15일 이상 아덴만까지 25일 이상 출동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 보면 반드시 제주해군기지가 필요한 이유로는 부족하지요. 건설이 완료된 현재는 전시증원전력이나 물자 수송에 필요한 수송로 보호를 이유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주변국과의 분쟁으로 수송로가 봉쇄 될 경우 기지의 존재로 인해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닌 해상전력의 크기와 전략으로 해결하는 것이므로 현재 우리나라 해군력으로 주변국의 봉쇄를 스스로의 힘으로 풀거나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합니다.

셋째로 북한의 동·서 해상 도발 신속대응은 NLL에서 가장 멀리 있는 기지위치로 인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평도까지 15시간 이상, 속초까지 20시간 이상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주변국의 해상전력 증강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 도입을 주된 이유로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 전력에 대비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전력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해군기지 건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중국은 람사군도 분쟁에 대비하여 베트남 옆에 있는 하이난성에 해군기지를 마련하고 항공모함과 잠수함 주전력을 운용하고 있지 한반도에 대응하기위해 배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런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설명분 말고, 해군기지건설을 위해 강정마을 주민들을 탄압해 온 진짜 이유를 우리는 알고 싶습니다. 제주해군기지가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 말입니다.

그리고 강정주민들에게 직접 했던 거짓말들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가장 큰 거짓말이 절대로 강제수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협의매수를 통해 진행할 것이며 그 이외의 방법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땅을 확보할 수 없다면 바다를 매립해서 만들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이 동의 해주지 않는다면 공사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직접 한 김성찬 소장은 해군참모총장이 되자마자 토지를 강제수용하고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주민들이 항의해도 공권력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펼치듯 강정마을을 짓눌렀습니다. 환경영향평가 협의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제주도정으로부터 9차례의 공사 중단 조치를 받으면서도 국제환경총회(WCC)에서는 친환경공법으로 건설되는 친환경 재생에너지 첨단항만임을 자랑하기도 했지요. 해군장교 십 수 명씩 몰려다니며 힘없는 농민 개개인에게 강제수용 절차에 따른 사법적 협박과 종북몰이 폭언, 공갈에 가까운 거짓정보로 농사를 포기하게 만든 과정들은 그나마 다른 사안들에 비하면 애교에 가깝습니다.

700명에 이르는 연행자와 600건에 이르는 기소건수, 27명의 구속, 4억 원이 넘는 벌금, 30명에 이르는 자발적 노역들이 그 동안 공권력의 자심한 횡포의 정도를 말해줍니다.

그리고도 해군기지건설이 마무리된 지금, 해군은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34억 5천만 원에 이르는 1차 구상금을 청구해 왔습니다. 제주도 전체여론과 정치권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2차, 3차 구상금을 계속 청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또한,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운용하여 제주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선전하면서도 크루즈가 접안 할 남방파제와 서방파제까지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겠다고 합니다. 제주도와 여론이 강력히 반발하자 남방파제와 서방파제는 보호구역에서 슬쩍 제외시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가 날아다는 물체가 아닌 이상 크루즈 선박이 다니는 항로와 선회장 등의 무역항 수역시설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제외하여야 함에도 해군은 양보할 기색이 없어 보입니다.

구상권을 연거푸 청구하고 군사시설 보호구역을 고집하는 해군을 보면서 강정주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건설초기부터 우려하던 해군기지의 확장 가능성 때문입니다. 레이다기지, 탄약고 건설, 헬기장 및 정비시설, 선박 수리용 도크, 추가적인 군관사 등 제주해군기지가 전략기지로서 그 기능을 다하려면 늘려나가야 할 시설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상권 청구로 이런 시설에 반대하려는 강정주민들을 사전에 제압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게 됩니다. 최근 불거진 사드 배치문제로 한-중간의 갈등이 높아지고, 북한과 대립이 더욱 높아진다면, 강정마을은 물론 제주도 전역이 오키나와처럼 군사기지로 뒤덮일 가능성도 커집니다. 공군기지도 들어서고 수비를 위해 육군도 들어오며 대공·대함 미사일 포병부대도 곳곳에 배치 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도는 군사요새로 바뀌어 전쟁의 섬이 되고 말 것입니다.

4. 되찾고 싶은 가치들  

제주해군기지가 잃게 만든 가치들은 강정마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선적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절차를 충실히 지키는 행정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막강한 행정력, 자금력, 공권력을 가진 국가는 그 강력한 추진수단으로 인해 민주주의 절차를 충실히 따르더라도 개개인은 크게 피해를 받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또한 국가가 결정한 순간, 그 결정에 해당하는 개개인의 인생은 방향이 크게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와 설득 과정이 절차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갈등은 사회적 분열을 낳아 국가의 성장이나 지속성에 큰 걸림돌이 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갈등을 예방하는 노력이 국가에게 의무가 되어야 합니다. 각종 평가결과에 의거해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하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가의 결정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평화를 위한 노력입니다. 평화는 군사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힘의 균형이란 한 번 맞춰놓으면 되는 평형저울이 아닌 시이소오 같은 게임의 특성이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의 군사력이 크게 늘어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상대도 그 군사력에 대응하는 다양한 무력수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강시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평화를 위한 다른 방향의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교류와 협력의 외교적 노력이 군사력 증강의 수단보다 때로는 수백 배의 효과가 있습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부터 첨단무기 도입, 사드 레이더와 미사일배치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계속 쏟아 부어도 안보가 튼튼해져서 국민들이 안심을 느끼기는커녕, 전쟁의 위기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중국은 사드 레이더에 대하여 경제적 보복조치까지 입에 올리고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군사력 증강의 길 이외의 평화의 노력을 크게 경주하지 않는다면 끝내 전쟁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저 혼자만일까요?

자연과의 공존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가치입니다. 대규모 개발행위는 반드시 자연의 커다란 훼손을 가져옵니다. 파괴된 후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보존을 위한 원칙을 정해야 합니다. 보존을 결정한 지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가치들을 인간사회가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첨언을 하나 더 하자면 사업자에게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현재의 환경영향평가 방식은 독립적인 분석결과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적, 중립적이지 못한 과학은 어떠한 독소보다도 나쁩니다. 따라서 학자들이 양심을 지키며 연구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는 국정운영 방침을 수립하였으면 합니다. 성장과 발전에 초점을 맞춘 현재의 국정운영방침에서 탈피했으면 합니다. 6.25 이후 우리나라는 폐허 속에서도 세계가 놀랄 만큼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행복지수는 OECD 꼴찌로 하락하고 자살률은 1위에 등극할 만큼 참담한 결과도 낳았습니다. 돌아보면 성장 지상주의로 인하여 수많은 미풍양속과 가치 있는 전통문화들이 너무도 많이 사라진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의 행복을 국정운영지침 1위에 놓는다고 갑자기 경제가 곤두박질쳐서 후진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강정마을은 이러한 소망들을 담아 마을공동체를 회복하고 생명평화문화마을로 나아가려합니다. 전쟁과 대립의 문화, 소비 지향적이고 효율성 위주의 문화에서 조금이라도 비껴서고 사람과 자연을 중심에 놓는 문화를 꽃피우는 마을로 가려합니다. 어렵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되는 일입니다. 또한 가보지 않은 길이다 보니 더듬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이루려 하지도 않겠습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모두의 한 걸음이 더 크고 값진 전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대책위원회’ 위원장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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