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국에서 확인되듯 이념 논쟁은 국내 정치에서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그간 이념 논쟁엔 북한 변수가 언제나 똬리를 틀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북한의 국지적 도발로 만들어진 차가운 북서풍과 대북 인도적 지원으로 만들어진 따뜻한 남동풍은 이념적 접점 지역에 강한 비를 뿌렸다. 지금은 어떨까. 예전과 같은 단일한 이념 전선으로 설명하기엔 지금의 이념 지형은 좀더 복잡해졌다. 이념 지형은 자유화, 세계화, 지식정보화 시대를 맞으며 탈이념으로 분화되고 진화했다.
분화하는 ‘중도’ 지대어떻게 분화하고 진화했을까. 눈에 띄는 현상은 기존 진보와 보수의 강점은 취하고 약점은 버린 ‘소극 진보’와 ‘소극 보수’가 분화돼 나타났다는 점이다. ‘중도’는 현대화된 소극 진보와 소극 보수의 장점을 취하며 전혀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 더 이상 중도는 모호한 입장과 태도를 보이는 이념적 중간 지대가 아니다. 내년 20대 총선을 앞둔 정당들은 저마다 ‘중도화 전략’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기존 잣대를 갖고 중도로 달려가면 그곳엔 아무도 없을 공산이 크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는 두 번에 걸쳐 ‘이념 지형’에 관한 흥미로운 여론조사(각각 전국 성인남녀 1천 명 유·무선 전화조사)를 실시했다. 먼저 올해 6월 조사에선 이념 지형을 ‘적극 진보·소극 진보·소극 보수·적극 보수’로 나눠 물었고, 11월 조사에선 진보·중도·보수로 나눠 물었다.(그림1 참조)
첫 번째 조사에선 적극 진보 15%, 소극 진보 41%, 소극 보수 31%, 적극 보수 13%의 비율로 나타났다. 소극 진보가 가장 많았고 적극 보수가 가장 적었다. 두 번째 조사에선 진보 25%, 중도 44%, 보수 31%의 비율로 나타났다. 중도가 가장 많았고 진보가 가장 적었다.
이념 지형의 분화를 알아보기 위해 두 조사를 종합해 분석했다. 진보와 보수 두 갈래로만 보면, 진보가 56%, 보수가 44%(6월 조사)였다. 이와는 별도로 ‘중도’(44%)는 중도 진보 32%, 중도 보수 12%(11월 조사)로 나뉘었다.
이 결과가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당들이 각자 유리한 고지에 오르기 위해 이념을 동원하는 전략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개별 유권자들이 가진 고유한 ‘성향’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 정치적 의사 결정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사회적 상황이 개별 유권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진보이고, 중도이며, 보수일까?
‘소극 진보’는 ‘소극 보수’와 더 가까워두 조사를 종합해보면, 진보에선 여성(55%)이, 보수에선 남성(54%)의 비율이 높았다. 중도에선 남녀 각각 50%로 비율이 비슷했다. 20대에선 진보, 30~50대에선 중도, 60살 이상에선 보수 성향이 각각 높게 나타났다.
‘월평균 가구소득’의 규모가 이념 지형에 미치는 영향도 살펴보았다. 150만원 미만에서 보수(37%)가 중도(34%)나 진보(29%)보다 조금 높았을 뿐, 그 이상의 소득 규모에선 모두 중도가 가장 높았다. 이념과 계층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통념인데, 이번 조사에선 사회경제적 계층을 나눌 수 있는 소득 규모와 이념 성향 사이의 상관관계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직업군에선 어떨까. 전문직(29%)과 화이트칼라(27%)는 진보가, 자영업(34%)과 전업주부(39%) 및 블루칼라(33%)는 보수가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모든 층에서 중도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럼 중도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언제 진보적인 색채로, 또 어떤 경우에 보수적 색채로 변신할까. 중도는 ‘중도 진보’(소극 진보)와 ‘중도 보수’(소극 보수)의 상당 부분을 포괄하는데, 이들의 성향을 파악하다보면 중도의 실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는 ‘복지와 경제 중 무엇을 더 중시하며, 공공과 개인 중 무엇을 더 중시하는지’에 대한 적극 진보, 소극 진보, 소극 보수, 적극 보수층의 응답(6월 조사)을 4개의 면(4분면 분석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극 진보와 소극 보수는 기존의 적극 보수와 적극 진보보다 공공의식이 높았다. 또 적극 보수보다 소극 보수가 경제를 더 중시했고, 적극 진보보다 소극 진보가 복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공공 영역에서 ‘V자형’으로 대형을 맞추듯 나타났다.
한국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보수와 진보는 각각 세 갈래로 나뉘는 특성을 보인다. 보수는 이념 보수(적극 보수)·도덕 보수·경제 보수로 나뉘고, 진보는 이념 진보(적극 진보)·자유 진보·복지 진보로 나뉜다. 적극 진보와 적극 보수는 이념 성향이 강해 상호 대립 관계에 놓이지만, 소극 보수와 소극 진보는 특정 사안에 따라 유사 관계를 보인다.
‘소극 보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동의 못할 것예를 들어 소극 보수 가운데 가족과 공동체, 전통과 법을 중시하는 ‘도덕 보수’층은 소극 진보 중 ‘복지를 지향하는 층’과 ‘공평과 공동체’라는 이슈에서 통합적 관계를 맺는 성향을 나타낸다. 또 소극 보수 중 ‘경제 보수’는 소극 진보 중 개인과 자유, 창의와 개성을 중시하는 ‘자유 진보’층과 ‘공정과 자율경쟁’이라는 이슈로 통합적 관계를 맺기도 한다.
특정 현안에 대해 소극 진보와 소극 보수가 나타내는 의견(그림3 참조)을 보면 이들의 특징을 좀더 이해할 수 있다. 지난 6월 조사에서 각 이슈에 대한 진보·보수층의 입장을 물은 결과를 보면, ‘친일-종북 논쟁을 그만해야 한다’는 문항에 대해 소극 진보(43%)와 소극 보수(32%)가 적극 진보(15%)와 적극 보수(10%)보다 더 높게 동의했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의 역할이 긍정적’이라는 부분에서도 소극 진보(40%)와 소극 보수(36%)가 적극 진보(9%)와 적극 보수(15%)보다 더 높은 비율로 동의했다. ‘사형제도 폐지 반대’에 대한 응답에서도 소극 진보(39%)와 소극 보수(32%)가 적극 진보(14%)와 적극 보수(15%)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기회 평등’의 중요성을 물은 항목에서도 소극 진보(39%)와 소극 보수(33%)가 적극 진보(14%)와 적극 보수(14%)보다 더 높게 응답했다. 진보층에서 더 많이 응답할 것으로 보았던 가치(기회 평등)에 대해서도 적극 진보층보다 소극 보수층이 더 많이 동의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북 지원에 다소 부정적이다’라는 항목에선 소극 진보(19%)와 소극 보수(20%)가 적극 진보(7%)와 적극 보수(8%)보다 높은 응답을 보였다.
흥미로운 조사 결과도 있었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호오도(절대평가)로 ‘박정희 전 대통령 호감도’를 묻는 질문에 적극 보수(10%)나 소극 보수(29%)보다 소극 진보의 평가(51%)가 더 긍정적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호감도’에서는 이와 반대로 적극 진보(8%)보다 소극 보수(33%)의 평가가 더 높았다. 또 ‘기업의 경쟁력보다 환경보호가 더 중요하다’는 문항에서 적극 진보(9%)보다 소극 보수(15%)가 더 많이 동의했다. 기존 관념을 벗어나는 결과들이었다.
최근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보수는 이 문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보수적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념 지형이 다분화하는 상황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보수가 결집할 것이라는 판단은 오판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에 대한 반대를 통해 진보층이 노동으로 결집할 것이란 판단도 오판일 수 있다.
좋은 정치란 과학에 기초한 예술진보와 보수는 다원화됐다. 단순히 이념 전선 하나로 세상을 가를 수 있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그럼에도 정치권이 과거에 이미 묻힌 이념 지형을 끄집어내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보다는 당리당략적 접근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소극 보수층에 있는 ‘경제 보수’는 새누리당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소극 진보층에 있는 ‘자유 진보’는 노동개혁 반대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좋은 정치란 무엇일까. 갈등 구조를 만들기보다 사회 통합으로 이끄는 정치일 것이다. 사회 통합은 과학적 기초, 즉 과거와 현재 데이터가 진단한 현실에서 시작되지만 결국엔 예술적 판단, 즉 인간의 창조적 입장과 태도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은 세밀하고 정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마치 작곡가가 한 음도 버리지 않으려는 노력, 한 음도 허투로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처럼. 건축사가 1mm 폭 안에 10개의 선을 그리는 정교함처럼. 천체 물리학자가 관측 가능한 우주에서 상상할 수 없이 넓은 공간을 보며, 작디작은 인간의 존재를 통해 신을 만나듯. 정치도 다분화된 이념 지형을 정확히 이해하고 각종 사안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국민을 위해 필요한 정책을 이전보다 더 잘 추진하는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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