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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계삼

녹색당 비례대표 예비후보 출마한 이계삼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국장… ‘출마의 변’이 화제가 된 그가 시골교사, 사회활동가를 거쳐 정치를 시작한 이유
등록 2015-11-05 17:35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지금 여기에 있다보니까,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

그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들렸다. 불현듯 닥친 그와의 만남을 앞두고, 서랍을 뒤지니 오래된 편지가 나왔다. 충남 논산의 훈련병 이계삼이 보낸 편지였다. ‘94년 12월12일’ 소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스무 살에 우리는 친구였다.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던 날, 낯선 거리에 있었다. 아파트 매매가의 90%까지 턱없이 오른 전세가는 숫자만으로 사람을 지치게 했다. 그와 통화를 마치자 11년 전세 살던 동네에서 떠나야 하는(외국어로 ‘젠트리피케이션’) 서글픔이 내려 거리가 축축했다. 문득 10여 년 전 서울 신촌 뒷골목 주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도저히 여기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서른 무렵,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이 아니라 고향을 ‘지금 여기’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이계삼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 녹색당 비례대표 예비후보로 출마했다.

‘이치우 어르신’이 찾아왔다

그는 시골교사로 바쁜 가운데 등에 글을 쓰면서 세상을 만났다. 그리고 “정규직 교사로 살면서, 더구나 전교조 교사라는 화관까지 쓰고서, 비정규직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감내할 아이들을 도저히 더는 가르칠 자신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뒀다. 마흔이 되던 2012년의 일이었다.

사직을 하고 그는 “농업학교를 만들겠다”고 했다. 농사와 적정기술, 우정과 환대에 기반한 공동체를 꿈꿨고, 거기로 비정규직 노동으로 떠돌 아이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치우 어르신’이 그를 찾아왔다. 송전탑 인근 주민의 고통을 알리기 위해 몸을 불사른 그에게서 전태일을 보았고, 그 분신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이 됐다.

4년 동안 밀양 송전탑 현장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얻은 분노와 절박함으로 “선거에 출마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다는 마지노선”을 넘었다. 밀양 ‘할매·할배’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달리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그가 녹색당 게시판에 올린 비례대표 예비후보 ‘출마의 변’(http://kgreens.org/board/?uid=45&mod=document)을 보고 울었다는 이들이 적잖다. ‘출마의 변’에 각주를 달듯이 질문을 던졌다. 질문에 큰따옴표 친 말들은 ‘출마의 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계삼의 글을 읽어온 이들이 이계삼 ‘후보’를 낯설어할 수도 있겠다. “‘집 나온 노라’처럼 체제의 바깥으로 스스로 걸어나와 싸움의 자리로 들어온 사람”이지만 “선거에 출마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자신이 정한 “마지노선”을 넘은 이유는 뭔가.

문필가나 순수한 의미의 활동가는 나쁘지 않은 포지션 맞다. ‘출마의 변’에도 썼듯이, “반대위 사무국장 하는 이아무개, 그 아(애)는 (경과지) 주민도 아니면서 와 그렇게 설쳐쌓노. 글마도 나중에 정치할라고 그러겠제?”라고 하는 경찰관 같은 이들에게 존재증명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내면의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자’는 나의 원칙이 교만한 판단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현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새만금 간척지에서 철탑 반대운동을 하는 분이 음독자살을 시도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출마를 결심하고 오히려 몸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홀가분하다. 글로써 옳은 소리만 해왔지만, 사실 허점이 매우 많은 사람이다. 현실의 시험대에 오르니까 감춰둔 내가 발가벗겨질 것 같아서 많이 두렵다. (웃음)

“우리는 환대받지 못했습니다”
2013년 12월 송전탑에 반대해 음독한 유한숙 어르신 장례식장에 이계삼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 서 있다. 녹색당 비례대표 예비후보 ‘출마의 변’에서 그는 “이 모두는 국가와 자본이 그 원인을 제공하고 ‘정치의 부재’로써 완성된 고통의 파노
라마였습니다”라고 썼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13년 12월 송전탑에 반대해 음독한 유한숙 어르신 장례식장에 이계삼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 서 있다. 녹색당 비례대표 예비후보 ‘출마의 변’에서 그는 “이 모두는 국가와 자본이 그 원인을 제공하고 ‘정치의 부재’로써 완성된 고통의 파노 라마였습니다”라고 썼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출마 결심을 밝힌 저에게 밀양의 어르신들이 환하게 반색하며 반겨주셨습니다”라고 했지만, 지금은 비난을 넘어선 혐오가 일상이 된 시대다. 선거 때가 되면 더욱 독해질 말들이 두렵지 않나.

이미 송전탑 투쟁을 하면서 충분히 극우언론과 일부 지역사회의 비아냥을 경험해서 그건 두렵지 않다. 다만 나 자신만이 아니라 송전탑 반대투쟁에 함께한 어르신들이 심판대에 오르는 것이라 두렵다. 설령 당선이 못 돼도 선전을 해서 가능성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녹색당이 0.5% 비례득표에 그친 지난 총선 같은 결과가 나오면 주민들이 상심할까 걱정이다. 젖 먹던 힘까지 써보려 한다.

“우리는 점마들 안 믿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는다!” 18대에 이어 19대 국회에서도 ‘밀양송전탑 국회 진상조사단’ 활동이 유명무실하게 된 뒤 “부북면의 ‘야전사령관’ 한옥순 할매”가 질렀다는 벼락같은 고함을 전하며 그는 희망을 말한다. 그러나 밀양송전탑 반대운동은 결국 송전탑이 들어서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여전한 “가난한 믿음”에 대한 신뢰와 연민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냉대의 기억도 있지만, 밀양 싸움을 이끌어온 어르신들을 통해 깊은 체험을 했다. 아주 훌륭한 정신을 가진 어르신들이 계시다. 밀양 할매들이 위기에 처하면 (여러 생각 않고) 다리가 먼저 달려오는 이들도 있다. 밀양 싸움은 눈물이 많은데, 몸으로 고난을 겪어온 이들과 연대해온 이들이 가진 좋은 정서라고 생각한다.

원래는 “다른 버전의 출마의 변이 있었다”고 했다. “건조하고 냉정하게” 썼는데, 조성주 정의당 대표 후보의 출마선언문을 뒤늦게 읽고 ‘출마의 변’을 다시 썼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신념과 체험 전부를 다 드러낸 글이 좋았다”고 말했다. 밀양 싸움을 하면서 국회에서 겪었던 고통은 너무나 커서 돌아보기 싫었다. 그래서 조금 건조하고 냉정하게 썼던 건데, 조성주씨 글을 읽고 반성이 됐다. 그래서 다 지우고 새로 썼다. “우리는 환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뼈아픈 기억은 ‘우리들의 정치’가 왜 필요한지로 이어진다.

환대받지 못한 자가 타인을 환대하기 위해 환대받지 못한 곳으로 가려고 한다. “국회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했고, 여당의 “반대”와 야당의 “방조” 속에서 “크게 낙심”했다고 돌이켰다. 그래서 ‘우리들의 정치’가 필요하단 생각은 알겠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은, 한두 명 의원이 된다고 바뀌냐는 거다.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는 가치를 희석해서 똑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녹색당은 이 갈 곳 없는 체제가 길을 찾는 데 좌표를 제공하는 정당이다. 대의원도 추첨제로 뽑고, 비례대표 국회의원도 2년씩 순환제로 한다. 이런 이념적 가치와 정치적 방법론을 유지하는 녹색당이 비례대표 득표율 5%를 넘기는 힘들다. 그러나 한두 명이라도 우리의 정치를 실물로써 보여주면 세상은 달라진다. 일본 사상가 후지타 쇼조는 “고래 뱃속의 이물질” 같은 존재를 예찬했다. 당장 고래 전체의 궤도를 좌우하지는 못해도 끝없는 저항으로써 고래를 괴롭히는 불량스러운 존재가 고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없으니 한국 정치가 바닥 없이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악이 얽히고설킨 전원개발촉진법민주노동당의 경험도 있고, 정의당이 원내에 있다. 녹색당이 기존 진보정당과 달리 할 일이 있나.

탈핵·탈송전탑, 성소수자 인권, 기본소득, 농업 부흥 같은 의제는 기성 정치 안에서 거의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시대에 만들어진 전원개발촉진법이 있다. 이 법에 따라 사업 허가를 받으면 19개 법이 정한 인허가 과정을 면제받는다. 재산권을 침해하는 강제수용 조항도 있다. 전국에 핵발전소, 송전소 문제가 생기는 근원이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이 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해도 각하된다”고 한다. 전원개발촉진법이 무너지면 핵산업이 쓰러지기 때문이다. 녹색당 의원은 임기 4년 내내 전원개발촉진법을 딱따구리처럼 쪼아댈 것이다. 지금의 시스템 안에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은 물론 진보정당도 집요하게 건드리지 못하는 문제다.

이계삼은 여전히 서성이고 망설인다. 농사학교라는 이상을 가꾸고 싶었지만, 송전탑 반대라는 현실에 뛰어들었다. 농사를 배우고 에너지를 자급하는 공동체를 꿈꾸지만, 해고에 맞서는 투쟁에 연대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녹색과 노동을 양손에 잡고, 공동체의 이상과 국가라는 현실을 두 눈으로 보면서 길을 만들고 싶어 한다.

자꾸만 타협을 하는 것 아닌가.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포기하지 못하는 욕심 아닌가.

최근에 교황 언급한 가톨릭 노동운동가 도러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20세기 디트로이트 포드 공장의 파업을 두고 당시 다른 견해를 보였다. 모린은 노동자에게 “포드의 공장으로 돌아갈 것을 구걸하지 말고 우리 농장으로 가서 농사를 짓자”고 했고, 데이는 “나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포드 공장의 문을 닫기 전까지 포드 노동자들이 회사가 고용한 깡패에게 맞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보고 싶다”고 주장했다. 나는 여전히 데이와 모린 사이를 오락가락하지만, 여전히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내가 소망하는 그림이 있어도 그것이 여기서 구현되는 것은 내 손을 떠난 문제다.

어떻게 떠난 서울(수도권)인데, 당선이 된다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생리에 맞지 않고 깜냥도 아니지만, 그 일을 하면서 심지어 기쁨을 느끼는 것이 가장 고급한 삶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고 싶다. 교사로 아이들을 만나고, 송전탑 반대운동에서 할매들을 만났듯, 지금도 좋을 일이 생길 거라고 믿는다.

길들여지지 않으면서 걸어가기

김완 기자는 그를 “믿음의 아이콘”이라고 말했다. 활동가의 현장성과 이론가의 논리를 겸했단 것이다. 이계삼씨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이 영화 과 에서 전한 “믿음을 갖고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새삼 떠올렸다. 농업학교, 탈핵운동, 녹색정치, 그가 “분명한 책임감”을 느끼는 일이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으면서 세상에 깊숙하게 들어가기, 쉽지 않은 길을 지금 그가 걷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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