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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호남의 ‘무조건 제1야당 지지’에 균열이 생긴 것은 이미 오래전, 천정배·이정현의 당선은 예고된 일… 선택에 목마른 호남 시민의 선택지는 정상적인 정당들 간의 경쟁
등록 2015-05-14 15:40 수정 2020-05-03 04:28
5·18 민주화운동이 곧 35주년을 맞는다. 1980년 5월18일부터 열흘 동안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 금남로에서 민주화 투쟁을 벌이다 1천 명이 넘는 이들이 죽거나 다치는 희생을 치렀다. 이는 광주 시민들에게 뼈아픈 역사지만 동시에 자랑스러운 역사다. 이날을 역사적 발판으로 삼아 1987년 오랜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기념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광주 시민들은 또 한 번의 반란을 일으켰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공유해온 새정치민주연합의 후보를 지난 4·29 재보선에서 외면한 것이다. 이들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은 광주를 포함한 호남 지역 민심의 흐름과 방향을 분석해봤다. _편집자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곡성 지역에 당선된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당선 다음날 순천시 역전시장을 자전거로 돌며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곡성 지역에 당선된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당선 다음날 순천시 역전시장을 자전거로 돌며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그동안 호남은 야당의 텃밭으로 불렸다. 민주당,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연합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제1야당이 공천을 하면 호남 시민들은 주저 없이 이들을 뽑아줬다.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군부독재에 뿌리를 둔 세력을 찍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존재를 배반한 의식’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흐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지난해 치른 7·30 재보선에서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전남 순천시·곡성군에서 큰 표 차이로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이 의원은 서갑원 새정치연합 후보의 득표율(40.3%)보다 약 9%포인트 앞서는 49.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올해 치른 4·29 재보선에서도 천정배 무소속 의원(52.4%)이 조영택 새정치연합 후보(29.8%)를 무려 22.6%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이후 새정치연합 안에서는 ‘호남 민심의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해보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득표율 18대 67.5% → 19대 57.8%
지난 4·29 재보선이 열린 광주 서구을 거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천정배 의원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천 의원은 이 선거에서 22%포인트 차이로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이겼다. 한겨레 이정용 선임기자

지난 4·29 재보선이 열린 광주 서구을 거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천정배 의원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천 의원은 이 선거에서 22%포인트 차이로 새정치민주연합 조영택 후보를 이겼다. 한겨레 이정용 선임기자

그러나 호남의 제1야당 지지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2006년 지방선거부터 2014년 지방선거까지 호남 지역 기초의원 무소속 당선자 수를 비교해본 결과, 무소속 당선자 수가 2010년 지방선거부터 점진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무소속 당선자 수가 늘고 있다는 것은 제1야당을 지지하지 않는 경향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남 가운데서도 광주를 제외하고 전북과 전남 지역에서 무소속 기초의원 숫자가 늘어났다. 전북의 경우 2006년 선거에서 30명(17.3%)이던 무소속 당선자가 2010년 46명(26.6%)으로, 2014년 52명(30%)으로 늘었고, 전남 지역도 무소속 기초의원이 2006년 39명(18.5%)에서 2010년 49명(23.2%), 2014년 51명(24.2%)으로 늘었다. 호남 지역 전체로 보면, 같은 시기 무소속 기초의원은 70명(16%)에서 98명(22.1%)으로, 다시 105명(23.7%)으로 점차 늘어났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제4~6회 지방선거 호남 지역 기초의원 무소속 당선자 수 비교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제4~6회 지방선거 호남 지역 기초의원 무소속 당선자 수 비교

국회의원 선거를 비교해보면, 호남 지역의 제1야당 지지 균열 현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18대(2008년)와 19대(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호남 지역 제1야당(통합민주당·민주통합당) 당선자들의 평균 득표율 비교해본 결과, 18대 선거에 비해 19대 선거에서 호남 모든 지역의 득표율이 떨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18대 총선에서 광주·전북·전남 지역에서 당선된 통합민주당(현 새정치연합) 소속 의원들의 평균 득표율은 67.5%였으나, 4년 뒤인 2012년 총선에서 당선된 민주통합당(현 새정치연합) 의원들의 평균 득표율은 57.8%였다. 4년 사이에 약 10%포인트가 떨어진 것이다. 지역별로 보면 광주는 72.3%에서 61.9%로, 전북은 59.7%에서 53.6%로, 전남은 71.6%에서 59.2%로 평균 득표율이 줄어들었다. 이는 제1야당에 대한 호남 시민들의 충성도가 그만큼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제18~19대 국회의원 선거 호남 지역 제1야당(통합민주당·민주통합당) 당선자 평균 득표율 비교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제18~19대 국회의원 선거 호남 지역 제1야당(통합민주당·민주통합당) 당선자 평균 득표율 비교

이런 흐름으로 봤을 때 이번 4·29 재보선에서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당선된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호남 시민들의 선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다. 천 의원 쪽은 당선을 계기로 그동안 선거 과정에서 끊임없이 외쳐온 ‘호남 정치의 부활’을 실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광주의 나머지 지역구 7곳뿐 아니라 전북·전남 지역구 22곳을 합쳐 호남 30개 지역구 모두를 겨냥한 정치세력화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천 의원이 주장하는 ‘호남 정치의 부활’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호남 시민들은 실제로 천 의원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원해서 그를 선택한 것일까.

‘호남 정치’ 단어가 ‘지역주의’ 몰아갈 수도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2014년 7·30 재·보궐 선거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2014년 7·30 재·보궐 선거

먼저 천 의원이 주장하는 ‘호남 정치의 부활’에 대해서는 기대보다는 우려의 시각이 더 많다. 천 의원은 당선 다음날인 4월30일 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호남의 야당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기득권에 취해 있고 무기력하다. 그리고 호남의 낙후와 소외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심각하다”며 이를 개선하는 것이 호남 정치의 부활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했다. 다만 그가 주장하는 것은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통해 새정치연합에 충격을 주는 방법’인데, 이는 새정치연합의 쇄신을 의미하는 것이지 천 의원이 앞으로 독자적으로 일궈나갈 정치세력의 비전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모순을 안고 있다. 또한 ‘호남 정치’라는 단어가 가진 폐쇄성으로 인해 천 의원의 주장이 오히려 호남 시민들을 고립시키고, 시민들의 민주정치에 대한 열망을 단순한 ‘지역주의’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2015년 4·29 재·보궐 선거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호남 민심의 균열 현상. 2015년 4·29 재·보궐 선거

오승용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호남 내부에서 벌어지는 정치 행태들을 개혁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호남 주도권의 문제, 호남 출신 당권의 문제, 호남 출신 대권 주자의 문제가 되는 순간 분열적이 되고 또 한 번 고립을 자초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외부에서 볼 때 왜 호남만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논의는 실제 호남 정치의 개혁을 빠트린 채 분열적인 접근 방식으로 가고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광주 시민들이 천 의원을 선택한 이유도 그의 독자적인 호남 정치세력화를 기대해서라기보다는 새정치연합이 그동안 수권 정당으로서 능력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한 채찍질 차원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천 의원에 대한 선택이 새정치연합에 대한 ‘대체재’ 차원인지 ‘보완재’로서의 경고 차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보완적 의미로의 투표 행위가 더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도 “광주 시민들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권력 교체다. 지금 천 의원을 찍어서 새정치연합에 쇼크를 줘야 이들이 각성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에게는 그런 감각이 있다. 이러한 투표 결과를 천 의원이 주장하는 ‘호남 정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가적인 정체성 갖게 된 역사
1980년 5월21일부터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을 몰아내고 ‘해방 공동체’를 이뤘다. 시민군 지휘본부가 있던 전남도청 앞에서는 날마다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누구나 자유롭게 분수대 단상에 올라 ‘자유와 민주’를 노래했다.

1980년 5월21일부터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을 몰아내고 ‘해방 공동체’를 이뤘다. 시민군 지휘본부가 있던 전남도청 앞에서는 날마다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누구나 자유롭게 분수대 단상에 올라 ‘자유와 민주’를 노래했다.

그렇다면 제1야당에 채찍질을 가하기 위해 무소속 후보를 선택하고, 한편으로는 ‘예산 폭탄’을 약속한 새누리당 후보를 찍어주는 호남 민심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호남의 정치적 정체성을 알려면 그 역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기원은 1972년 유신체제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유신체제에서 반대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호남에 대한 편견을 동원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졌다. 그 결과 정부의 고위직, 재벌 기업의 상층 관리직 등에서 호남 출신의 비율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호남 출신에 대한 편견과 허위의식은 의식적으로 조장되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1980년에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은 호남 시민들로 하여금 독재와 국가폭력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함께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호남의 이런 경험은 반독재 투쟁을 이끌던 ‘김대중’이라는 인물과 결합하면서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정권 교체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렇듯 차별의 역사와 승리의 역사를 모두 공유한 호남은 그런 이유로 다분히 양가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갖게 됐다. 호남 시민들은 5·18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남 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을 투표 행위에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정치연합은 호남 지역에서 이 두 가지 욕망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다. 수권 정당으로서 정권 교체를 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호남 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을 이용만 해왔을 뿐 실제로 이런 정서를 보듬는 정치력을 발휘하지도 못한 것이다. 호남 시민들이 새정치연합에 대한 불신을 점차 키워나가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호남 시민들은 지금 ‘선택’에 목말라 있다. 무능한 새정치연합에 대한 누적된 피로감과 함께 그동안 지속적으로 박탈당해온 선택권에 대한 열망이 조금씩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서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해온 정영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은 “호남의 민심은 이미 변했다. 그동안 호남은 새정치연합의 독점 부대였다. 새정치연합이 후보를 내세우는 순간 싫어도 선택의 여지 없이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하게 선택하고 싶다는 욕망이 극에 달했다”고 말했다.

호남 시민들이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효과이기도 하다는 분석도 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한 지역에서의 일당 지배 체제는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호남 유권자들도 내 지역 의원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을 찍을 수 있는 선택지가 있어야 책임정치를 할 수 있는데, 일당 독점 체제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는 민주정치 아래의 유권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제3정당 존재해야”

호남 시민들은 더 이상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주어야 할 ‘선택지’는 과연 무엇일까.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지역 대표성을 내세워 일당 독점 체제를 유지하려는 정당이 아니라, 특정 계층을 대변하고 그에 걸맞은 정책을 내놓는 정상적인 정당들 간의 경쟁이다. 지병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호남에서 제3정당을 얘기하면 야권 분열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3정당이 존재해야 지역의 경쟁적인 정당체제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책 연합 등 제대로 된 선거 연합을 이루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권 교체에도 더 유리하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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