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호남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선언하면서 야권 지형이 복잡한 구도로 흐르게 됐다. 4월29일 광주 서을 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 압승한 천 의원은 “내년까지 광주에서 ‘뉴 DJ’(새로운 김대중)라고 할 수 있는 참신하고 실력 있는 인재들을 모아 새정치연합과 경쟁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선거 기간에 무력한 야권에 혁신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천정배 메기 효과’(메기 한 마리를 풀면 미꾸라지들이 먹히지 않으려고 활발해지는 효과)를 강조했고, 광주 민심은 이를 수용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내년 4월 총선 때 호남에서 ‘제2의 천정배 사례’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그가 세력화 구상을 내놓으면서 향후 야권은 새정치연합, 진보 결집 추진파(정의당·노동당·국민모임), 천정배 세력, 당 해산 이후 기성 정치권 바깥으로 밀린 옛 통합진보당 세력 등 4개의 정치세력(그림 참조)이 독자 세력화와 야권 연대 사이에서 탐색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천 의원이 신당 창당까지 치달을 가능성은 적다. 새정치연합에 화가 난 광주 민심이 천 의원의 득표에 적극적으로 반영됐지만, 그에게 ‘새정치연합을 대체할 정당을 만들라’는 임무까지 전폭적으로 부여했다고 해석하는 건 무리라는 평가도 있다. 천 의원 역시 “아직 신당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내년 총선까지 1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당의 꼴을 갖추기 위한 거액의 돈과 경쟁력 있는 인물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철수 신당 추진’에 참여한 광주 지역의 한 인사는 “(안철수 등장 이후) 기존 야당을 대신할 신당에 대한 여론이 강렬했지만 그 요구를 담아낼 정치적 자산(인물)이 부족했다. 천 의원도 그런 벽을 느낄 수밖에 없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국적 정당을 만드는 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천 의원의 1차적 목표는 내년 총선에서 최소한 광주에서라도 무소속 연대를 꾸려 새정치연합과 일전을 치른다는 지점에 닿아 있다. 광주의 국회의원 지역구는 8곳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할 만한 개혁 성향의 사람들을 ‘젊은 DJ들’이라고 표현했다. 내년 총선에서 이런 ‘DJ의 젊은 후예들’과 함께 ‘호남발 파란’을 일으켜, 새정치연합과 친노 정치인에 대한 반감이 흐르는 호남에서 야권 대표 정치인의 위치를 점하려는 구상으로 보인다.
호남에서 새정치연합의 기득권과 맞서겠다는 그의 생각은 이 지역 표심이 균열되고 있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010년 지방선거 기초의원 선거에서 전남 지역 당선자 211명 중 65명, 전북 지역 당선자 173명 중 54명이 진보정당과 무소속 후보들이었다. 2014년 지방선거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전남 지역 22곳 중 8곳, 전북 14곳 중 7곳에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됐다. 호남의 표심이 새정치연합에서 이탈하는 추세가 꺾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천 의원의 세력화는 새정치연합의 혁신 여부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새정치연합이 계파 갈등 요소를 줄여가고,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면 호남을 중심으로 한 천 의원의 세력화 시도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천 의원이 야권의 변화를 바라는 호남 민심을 설득할 ‘젊은 DJ들’을 얼마나 조직할지도 미지수다. 그럼에도 새정치연합이 ‘고인 물 속의 미꾸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호남의 평가가 내려지면, 천 의원의 공간이 호남에서 더 열릴 수도 있다. 천 의원의 측근은 “새정치연합이 쇄신을 잘해서 지지율이 올라가면 그쪽으로 사람(정치인)이 몰릴 것이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이 변화하지 못하면 호남의 민심이 천 의원에게 기대하는 요구가 지금보다 커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광주에서 압승한 천 의원이 호남에서 세력화 깃발을 들겠다고 나서면서, 새정치연합뿐 아니라 진보 결집을 시도하던 주체들의 생각도 복잡해지고 있다. 유일한 원내 정당인 정의당, 원외 정당인 노동당,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주도하는 국민모임 등은 진보세력이 결집한 정당을 만든다는 목표 아래, 이번 재보선 이후 구체적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었다. 이들은 내년 총선 이전에 진보정치가 결집하면, 단기적으론 진보정당 지지자와 새누리당에 비판적이면서 새정치연합에 실망한 유권자, 진보정치에 반감이 적은 호남 유권자, 수도권에 사는 출향 호남인 등의 지지를 얻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모임 소속의 정동영 전 장관이 이번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에서 ‘3등’으로 낙선하며 진보 결집 논의의 힘이 빠지게 됐고, 그사이 천 의원은 새정치연합에 등을 돌린 호남 유권자를 흡수하려는 세력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의당·노동당·국민모임이 진보 결집을 이뤄 내년 총선에 임하더라도 적어도 호남에서 새정치연합에 비판적인 유권자를 잡으려면 ‘천정배 세력’과 경쟁해야 하는 변수가 생겨난 것이다. 그간 천 의원은 진보 결집을 진행하던 국민모임 등과 함께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혀왔다.
진보 결집 논의 주체 가운데 한 핵심 인사는 “진보정치가 결집하자는 이유 중 하나는 새정치연합을 대체하는 세력이 되자는 것인데 그 자리의 일부를 천정배 의원이 차지하게 됐다. 적어도 호남에서 진보 결집 세력이 지지받고 싶어 했던 유권자를 (천정배 세력에게) 잃을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정동영 전 장관의 낙선으로 국민모임이 타격을 받으면서 진보 결집 논의 자체가 위기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물음도 고개를 든다. 야권에선 국민모임 내부에서 애초 계획대로 정의당·노동당과 진보 결집을 진행하자는 쪽과, 호남을 기반으로 야권을 쇄신하자고 주장하는 ‘천정배 세력화’의 흐름과 같이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정의당의 한 의원은 “지금으로선 국민모임이 지속 가능할지도 의문이 든다. 국민모임이 (진보 결집의) 추진 동력이 떨어진 상황이라 진보 재편 논의의 주체와 방향, 논의 속도를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왕에 어렵게 시작된 진보 결집 논의를 발빠르게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노동당의 한 인사는 “정의당·노동당은 자기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국민모임은 (재보선 여파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면 진보 결집 흐름이 굉장히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금은 노동당·정의당·국민모임을 주축으로 한 진보 결집의 흐름이 강화되느냐,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호남에서 새정치연합 대체를 자임하는 세력이 강화되느냐의 기로에 있다”고 말했다. 천 의원의 ‘당선 파장’이 야권 지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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