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앞다퉈 ‘혁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새누리당은 차기 대선주자급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보수혁신특별위원회’를 9월29일 출범했다. 새정치연합도 원혜영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치혁신실천위원회’를 만들어 9월30일 첫 회의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혁신’에 쏠리는 국민적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혁신이라는 것은 기득권을 내려놓자는 것인데 지금 대한민국 정치의 가장 큰 기득권은 새정치연합과 새누리당 그 자체다. 새정치연합은 지지율이 계속 내려가는데도 선거 때만 되면 ‘결국 새누리당을 싫어하는 사람은 우리를 찍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선거구제로 인한 양당의 기득권이 정치 불신을 더욱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불신이 가중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대안 세력에 대한 열망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 이제 양당제를 넘어설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
혁신 ‘쇼’ 아닌, 실질적 개혁 필요한 때여야의 혁신 움직임에 대한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의 지적이다. 국회에 입성은 했지만 의석수가 적어 발언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정의당은 그동안 끊임없이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소선거구제로 인한 대립적 양당 체제의 폐해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당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제도 개혁은 어렵다. 제도 개혁 자체가 원래 어려운 일이라고는 하지만 선거제도만큼 개혁하기 힘든 대상도 없다. 개혁의 당사자가 바로 개혁의 대상자이기 때문이다. 개혁을 주도해야 하는 당사자인 거대 양당 의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 그래서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은 자칫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달리해보자. 이들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고선 더 이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어떨까. 아직 40%의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새누리당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새정치연합은 최근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지는 등 위기에 몰려 있다. 그동안 반새누리 성향의 유권자들은 새정치연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선거 때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찍어왔다. 선거 전에는 바닥이던 당 지지율이 선거 때가 되면 일시적으로 오르는 현상이 이를 대변해준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울며 겨자 먹기’로 새정치연합을 찍어줄까. 지난 7·30 재·보궐 선거에서 박근혜 정부의 탄생 주역인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새정치연합의 텃밭인 전남 순천·곡성에서 당선된 것은 이런 규칙이 깨지고 있다는 상징적인 조짐이다. 이제는 호남 유권자들마저 새정치연합의 기득권을 유지해줄 마음이 없는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에 앞서 당 개혁이 먼저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당 혁신위도 출범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 개혁 논의가 수없이 이뤄졌지만 변한 건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거의 모든 선거에서 패배를 면치 못한 야당은 그때마다 두꺼운 혁신 자료를 내놨지만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다. ‘빅텐트론’과 ‘개방형 연합정당론’ 등 선거를 위한 야권 결집에 대한 논의도 할 만큼 했다. 때만 되면 나오는 빈 껍질뿐인 ‘국회의원 기득권 내려놓기’로 감동받을 국민도 더는 없어 보인다. 이제 야권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물론 선거제도 개혁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됐다는 공감대가 정치권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 최근 새누리당 혁신위 자문위원장으로 임명된 원희룡 제주지사는 9월2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치 개혁, 정치 쇄신, 정치 혁신. 정치가 비판받는 만큼 이를 극복하려는 정치권의 구호도 다양하다. 정치를 개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이다. 그 고민의 끝은 결국 제도 개혁이었다. 매번 새롭고 참신한 인물들이 정치권에 들어와도 돌이켜보면 한국 정치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정치제도 자체가 개혁적인 정치인들의 비전과 열정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심에도 둔감하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정치제도가 바뀌어야 그 속에 있는 정치인들도 비로소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보다 많은 기득권을 가진 여당에서조차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대안 많아도 한국 실정과 동떨어져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를 하려면 먼저 우리나라에 도입될 수 있는 새로운 선거제도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해온 이들이 한목소리로 주장하는 건 ‘비례성이 더 많이 보장되는 선거제도 도입’이다. 이는 유권자의 뜻이 선거에 더 많이 반영돼야 한다는 의미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정치적으로 유권자의 뜻이 제대로 대표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역주의에 기반한 양당제가 깨지고 다당적인 형태,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가 도입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의 소선거구제는 한 지역구에서 1등 한 명만 당선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에 1등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2등의 득표율은 그냥 버려진다. 또 정당 득표율과 실제 의석수 간에 큰 차이가 나는 등 ‘불비례성’이 강하다. 자신이 선택한 표가 버려지지 않도록 유권자는 큰 정당을 선택하게 되고 이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강력한 원인이 된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선거제도로는 중대선거구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혼합형 비례대표제 등이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지역구의 크기를 넓힌 뒤 한 지역구에서 여러 명을 뽑는 방식이다. 그러면 1등뿐만 아니라 2~3등, 지역구에 따라서는 4~5등까지도 당선될 수 있다. 이 방식은 소선거구제보다 비례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박성민 민정치컨설팅 대표는 책 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제안하며 “경기도 고양시 지역구를 하나로 합쳐 세 사람의 의원을 뽑는다고 생각해보라. 물론 거대 정당이 복수 공천을 할 수도 있지만 한나라당(새누리당), 민주당(새정치연합)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이든 녹색당이든 소수 정당의 후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는가. 최소한 고양시에 사는 시민의 75% 정도는 자신이 찍은 사람이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선 정의화 국회의장도 중대선거구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한때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혁 얘기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중대선거구제는 치명적 단점을 갖고 있다. 상황에 따라 ‘불비례성’이 소선거구제에서보다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 지역구에 5명의 국회의원이 뽑힌다고 했을 때 5등을 한 의원의 지지율이 5% 미만일 경우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해당 의원은 지역구에서 5%도 안 되는 지지를 받고 당선되는 셈이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글 ‘복지국가 건설과 포괄 정치의 작동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에서 이런 점을 지적한 뒤 “이 정도라면 국회의원의 대표 자격을 의심해야 한다. 이런 문제가 여러 선거구에서 발생한다면 국회 자체의 대표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이 제도를 도입한 민주주의 국가는 일본과 대만 등 극소수인 실정이다.
두 번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선거구별로 국회의원을 뽑지 않고 정당만 선택한 뒤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 방식이다. 네덜란드를 포함해 대부분의 북유럽 복지국가가 운영하는 제도다. 우리나라에서는 녹색당이 정강정책을 통해 이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비례성이 가장 완벽하게 보장되는 제도로 인물이 아닌 정당에 투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특정 지역이나 인물에 좌우되지 않고 각 정당의 이념이나 정책이 강화된다는 장점이 있다. 신생 정당이 들어오기도 쉽다. 그러나 이 제도는 지역 대표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권자가 지역구에서 직접 국회의원을 뽑는 것에 익숙하다는 점에 비춰보면 당장 도입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또 권력과 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된 한국 현실에서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외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현재 246명인 지역구 의원들이 지역구 기득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전문가들도 쉽게 도입을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적 동의 필요한 독일식 제도세 번째, 혼합형 비례대표제는 흔히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불린다. 이 제도는 지역구 선거와 비례대표 선거를 혼합한 방식으로 유권자는 1인2표를 행사해 지역구 의원 1명과 지지하는 정당에 1표씩을 준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정수가 100명이라고 했을 때 한 정당이 지역구에서 20명을 당선시키고 정당 득표율은 30%를 얻었다면, 지역구 20석에 비례대표 10석을 더해 30석의 의석수를 차지하는 것이다(제1030호 기획 연재 참조). 비례성을 완벽하게 보장하면서 지역 대표성도 살리는 절충안이다. 이 때문에 이 제도는 정치권과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한국 실정에 가장 적합한 제도로 꼽힌다.
정치권에서는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이 이 제도의 도입을 정강정책에 명시하고 있다. 새정치연합에서는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과 정동영 상임고문, 김부겸 전 의원이 제도 도입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원희룡 지사도 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표의 등가성과 정책의 전문성, 그리고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를 완화하기 위해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선호한다. 정당 득표율 의석배분제인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도입되면 국민의 표심이 의석수에 더 정확히 반영되므로 소수의 대표성을 가진 소수당의 출현을 보장해 실질적인 다당제의 효과가 나타난다. 다당제가 형식이 아닌 하나의 정치문화로 자리잡으면 우리 정치는 혁신적인 변화를 이룩할 것이다. 대립과 반목, 대결의 정치를 넘어 소통, 화합 그리고 연대의 정치가 이를 통해 구현될 것이라 믿는다”는 의견을 냈다. 학계에서는 최태욱 교수와 선학태 전남대 교수, 박동천 전북대 교수, 김영태 목포대 교수 등이 이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식 제도 도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치권의 동의’에 앞서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독일식으로 가려면 지역구 의석수와 비례대표 의석수가 같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지역구 246석에 비례 의석수 246석으로 국회의원 정수가 492석으로 크게 늘어난다. 여기에 지역구 당선자 수에 따라 초과의석도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치 불신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과연 의석수 확대를 전제로 한 독일식 제도 도입이 가능하겠느냐는 회의론도 나온다. 이 제도가 한국 상황에 비춰 가장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현 가능한’ 한국식 선거제도를 선택하기 위한 논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까닭에 선거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는 일단 ‘비례대표제 확대’에 큰 공감대를 두고 실현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 과정에서 현행 국회의원 정수를 적절하게 늘리는 방안을 포함해 의원 정수는 그대로 두되 지역구 수를 조금 줄이고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방안 등 다양한 현실적 대안도 나오고 있다.
시민의회 꾸려 직접 개혁안 만들자선거제도 개혁이 현실화되려면 선거방식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시킬 동력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대선 후보가 선거제도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우도록 하는 방안이 있다. 실제로 문재인 새정치연합 의원은 대선 후보 시절 비례대표를 100명으로 확대하는 절충안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후보자가 제도 개혁에 조금 더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문 후보처럼 제도의 단계적 도입이 아닌 ‘독일식 제도의 전면적 도입’ 등도 제안할 수 있다.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는 “대통령 후보가 ‘당선 1년 이내에 선거제도 개혁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공약을 하면 된다. 당선된 뒤 국민투표를 해서 국민의 대다수가 개혁에 동의한다는 게 확인되면 국회에 상당한 압박이 가해질 것이다. 실제로 최근 선거제도 개혁을 시행한 나라는 거의 국민투표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해당 후보가 당선됐다고 하더라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정치권의 압박으로 인해 후퇴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도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했으나 정치권의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선거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권과 학계·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제는 아래로부터의 선거제도 개혁 운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결국 선거제도 개혁은 ‘국민적 열망’ 없이 기득권을 가진 정치권에만 기대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민의회 구성’이다. 최태욱 교수는 “어떤 제도를 도입할지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민의회’가 이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 직속 기구로 300명의 시민을 무작위로 뽑아 시민의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시민의원이 돼 처음 4개월은 선거제도를 학습하고 다음 4개월은 노동자 단체나 기업가 단체 등 여러 이익단체들과 소통한다. 나머지 4개월은 집중토론을 통해 새롭게 도입할 선거제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방식은 이미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가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선택한 방안이다. 최 교수는 “캐나다의 경우 시민의회가 활동하는 1년 동안 정치권과 온갖 이익집단이 방해공작을 펼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을 쏟았다.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굉장히 중요한 효과를 낳았다. 시민의회가 가장 중요한 정치 이슈로 떠올랐고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선거제도에 대해 학습하며 여론을 형성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도 “선거제도 개혁은 캐나다식 무작위 시민의회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시민 가운데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 개혁안을 만드는 방법이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대안을 제시해 국회가 외면하기 힘들도록 하는 일종의 ‘국민적 압박’ 방식인 셈이다.
대안 정치 찾는 시민 움직임 시작돼이런 방식과는 별도로 최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2011년부터 정치권과 학계를 중심으로 학술운동을 펼쳐온 ‘비례대표제포럼’은 오는 11월부터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사회운동체’로 성격을 전환할 계획이다. 노동당과 녹색당,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가칭) 비례대표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대안 정치를 찾기 위한 시민 스스로의 움직임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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