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 재·보궐 선거가 끝난 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정치발전소 사무실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6·4 지방선거 직후 논의됐던 ‘(가칭) 비례대표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비요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비요사는 정치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정당법·정치자금법·공직선거법 등 현행 제도를 개혁하자는 논의로부터 출발한 모임이다. 사실 정치제도 개혁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음에도,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등 거대 양당에 의해 외면당해왔다. 이 모임은 한국 정치 지형이 선거제도와 정치관계법 개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보수 양당 체제로 점점 더 고착되고 있는 점,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개혁 논의 자체가 사회 의제화되지 못하고 있는 점, 정치 개혁을 논하는 세력들의 방향성이 일관되지 못하고 저마다 흩어져 있는 점 등에 주목해 한국 정치를 건강한 토대 위에 세우려면 이런 문제들이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공통의 인식을 가진 이들로부터 시작됐다.
정치인이 자신 목에 방울 달 수 없다면이를 위해 비요사는 운동 방향을 기존 정치권을 압박할 수 있는 대중조직을 아래로부터 만드는 것에 두기로 했다. 지난 시간들이 입증하듯이, 국회의원들은 진보나 보수나 할 것 없이 현행 선거제도와 정치관계법의 수혜자로서 전방위적인 사회적 압박 없이는 정치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례대표제 확대에 동의하는 소수 정치인들과 정치 전문가들이 거의 출동했다고 할 수 있는 비례대표제포럼이 2011년부터 줄기차게 비례대표제 확대를 외쳤지만 선거제도 개혁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그동안의 활동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목에 방울을 매달도록 하기에는 그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했다.
비요사에서는 우선 정치관계법 개혁을 이루려는 단체들이 각자 방향이 달라 충분한 역량을 모아내지 못했던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개혁 사안의 최소 합의 지점을 찾아내는 일부터 추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비례대표제 확대, 투표지 번호순번제 폐지, 정당등록요건 완화 등 정치관계법 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점들 가운데 이른바 ‘Big 1+Small 2~3(중점과제 1과 사안별 대응할 과제)’을 이슈로 잡고 운동을 전개하자는 방식의 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몇 차례 회의를 한 결과 여러 가지 정치 개혁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비례대표제 확대’가 선택됐다. 고착화된 양당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요사의 첫 번째 실천 과제는 정치 개혁 운동을 함께 할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다. 그동안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적 열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1월까지 비요사에 참여하는 단체별로 아이디어 회의를 구성한 뒤 이를 모아 12월 첫쨋주에 마치 ‘정치 축제’처럼 다 함께 모여 각자의 구상을 발표하고 서로 최소한 합의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운동 전략을 짜기로 했다. 여기서 모인 사람들이 마중물이 되어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까지 비례대표제 확대와 정당의 책임정치를 강화하는 방안으로의 정치관계법 개정운동을 일으킬 대중조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비례대표제 확대가 공동 공약이 되도록현재까지 비요사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는 비례대표제 확대와 정치관계법 개정이 절실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원외 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 그리고 비례대표제청년포럼,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서울지역 대학교 연합동아리 ‘여정’ 등이다. 초동 논의를 같이 했던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사안별로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며 연대를 이어가기로 했고, 정치발전소는 비례대표제와 정치관계법에 대한 좀더 다층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이 한국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이와 관련된 강좌들을 개발해 인식의 기반을 넓히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선거제도 개혁과 정치관계법 개정운동은 현실적으로 주요 정치 일정과 맞물려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비요사는 비례대표제 확대가 2016년 4월 총선에서 각 정당과 후보자들의 공동 공약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1차적 활동 계획을 세웠다. 이후 2017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지역정당 허용, 기초의원 정치후원회 허용 등 각각의 국면에서 적실성 있는 사안과 중점 개혁안을 연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비요사를 기반으로 해서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대중운동이 조직될 수만 있다면, 그간 비례대표제포럼 등 여론 지도층을 중심으로 한 비례대표제 확대운동과 비요사 등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한 운동이 만나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전방위적인 사회적 압력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비례대표제 확대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유권자가 뽑고 싶은 대안적 정치세력인 강하고 좋은 정당을 만드는 것 또한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뉴질랜드에서는 선거제도 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원외 정당인 동맹당(18.2%)과 뉴질랜드제1당(8.4%)이 도합 26.6%에 달하는 지지율을 확보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시민들은 자기가 대안으로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들을 원내 진입하게 하는 데 용이한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적극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대안이 없다면 독일식 정당명부제 등 아무리 좋은 선거제도가 제시된다고 할지라도 이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대안 될 수 있는 강하고 좋은 정당 있어야게다가 비례대표제 확대가 행여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현재 2~5%의 정당 지지율을 보이는 정당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획기적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면 새누리당 같은 강한 조직 결사체를 가진 보수 정당이 오히려 늘어난 만큼의 비례 의석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선거제도만 개혁하면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원내 진출이 지금보다 용이할 것이라는 진보 진영의 기대와 어긋나는 결과임은 분명하다.
비례대표제포럼과 비요사가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가며 말 그대로 폭발력 있고 의미 있는 선거제도 개혁운동을 일으키길 기대해본다. 더불어 강하고 좋은 정당들이 있어 비례대표제가 확대됐을 때 의미 있는 정치 실험을 시도해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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