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가족대책위 임원(오른쪽)들과 박영선 원내대표 등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9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만나 세월호 특별법 해법과 관련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국회는 9월 말까지 특별법 협상과 국회 정상화 문제를 놓고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꼼짝 않던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다시 움직일 기미를 보인 건, 9월25일이었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만난 뒤 야당이 협상에 나설 여지를 열어주는 발언을 내놓았다.
“수사권·기소권이 보장된 진상조사위원회가 최선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게 안 된다면 그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보여달라고 (새정치연합에) 다시 요청했다.”(유경근 가족대책위 대변인)
박범계 새정치연합 원내대변인도 당시 만남에서 “유족과 국민들이 양해해줄 수 있는 (다른) 방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면서, ‘유족들이 수사권·기소권을 반드시 관철해달라는 건 아니죠?’란 기자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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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으로 구성되는 진상조사위 대신 별도의 특별검사가 수사·기소권을 갖되, 2명의 특검 후보 추천(이 중 대통령이 1명 선택) 과정에서 유족의 뜻을 적극 반영하는 안들이 논의됐다는 뜻이다. 여권에 편향된 인사가 특검 후보로 추천되지 않는 장치를 마련하고, 진상조사위의 활동과 특검의 수사·기소가 최대한 연계될 수 있는 안들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이 ‘진상조사위가 수사권·기소권을 갖고 성역 없는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는 최선의 방안에서 조금 후퇴한 기류를 보인 현실적인 이유는 “그게 안 된다면”이란 유경근 대변인의 말 속에 함축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16일 국무회의에서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은 대통령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던 대통령이 유족의 요구를 차단하는 ‘거대한 장벽’으로 직접 나선 이상, 새누리당도 그런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는 선에서 움직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 앞에서 유족과 야당의 선택지로, 우선 진상조사위에 수사·기소권 부여를 관철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는 대응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특별법을 둘러싼 정치권 협상이 길어지면서 사태가 정부 지지층과 야권 지지세력 사이의 진영 갈등으로 변질된 터라, 유족들도 특별법 문제를 장기적으로 끌고 갔을 때의 부담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세월호 가족대책위 집행부들이 대리운전 기사를 때렸다는 사건이 불거지면서 가뜩이나 ‘세월호 피로감’을 부추기던 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단단히 결집하는 것도 돌발 악재였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유족들도 여당이 알레르기적 거부감을 보이는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기소권 부여’ 대신 이런 취지를 살릴 다른 방안의 논의 가능성을 밝히며 야당에 협상력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족대책위는 수사권·기소권을 맥없이 포기한 것처럼 보는 일부 언론의 시각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유경근 대변인은 “우리 가족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진상조사위가 최선의 진상 규명 방안이라고 확신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우리의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3가지 원칙(진상규명기구의 독립성, 충분한 조사·수사 기간 보장, 조사·수사·기소 사이의 유기적 연계성)을 충족하는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이고, 그 안에 대해선 검토·논의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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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유족들이 진상 규명에 접근할 다른 보완적 대안까지 검토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히며 특별법 논의에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새정치연합이 처한 상황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특별법 1차(8월7일)·2차(8월19일) 합의 과정에서 독단적 결정을 했다는 비판을 받던 박영선 원내대표가 탈당 시사 발언을 하며 혼란을 겪은 새정치연합은 유족들이 기대하는 특별법을 관철할 근력을 상당 부분 잃은 상태다. 여기에다 정기국회 의사 일정에 참여해 국회 계류 법안들을 처리하라는 여당과 언론의 압박까지 받고 있었다. 새정치연합 내부에서도 국회 일정을 정상화하고 정기국회에서 야당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국정감사에 전력을 쏟아 정부의 실정, 서민 증세 논란 등 여러 문제를 집중 제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또 ‘국회 선진화법’ 때문에 야당이 정부의 예산안 내용에 반대해도 올해부터 예산안이 12월1일 본회의에 자동 상정되는 것을 고려해, 예산안 심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도 ‘국회는 정상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세월호 특별법 해결을 전제로 국회를 장기간 헛바퀴 돌게 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이런 당내 사정이 맞물려 새정치연합도 유족이 원하는 최상의 안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여당과의 특별법 2차 합의안보다 다소 진전된 안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유족들에게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박영선 원내대표는 여당과의 1·2차 합의 발표 과정에서 유족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감안해, “이제 (최종 합의하기 전에) 유족과 충분히 공유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여야의 특별법 2차 합의 이후 멈춘 특별법 논의가 다시 가동되는 분위기가 조성된 데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결단이 한몫했다는 평가도 있다. 정 의장은 여야 원내교섭단체(새누리당·새정치연합)가 정기국회 의사 일정을 합의하지 못하자, 국회의장 직권으로 9월26일 본회의 개최 등 정기국회 일정을 결정하며 야당을 압박했다. 하지만 26일 본회의가 여당만 참석해 열리자 새누리당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30일로 본회의를 연기했다. 그러면서 정 의장은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해 유족의 의견이 진전을 보인 만큼, 여야가 최종 합의에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점점 희석돼간 질문 ‘국가란…’협상의 물꼬가 뒤늦게 다시 트이긴 했지만, 특별법 합의 수준을 낮추려는 여권과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야권의 무능 때문에 특별법 논의는 결국 참사 5개월을 넘길 때까지 이어졌다. 정치권의 특별법 논의 과정은 304명의 희생자를 낸 참사마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비정하게 대하는지를 드러낸 과정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가 보수·진보의 진영 대결 문제로 변질됐고, 정치권은 유족들을 사회의 진전을 막는 세력으로 고립화하는 공범이 됐다는 평가도 많다. 진상 규명과 안전사회 대책을 만드는 게 핵심인 특별법의 본질이 옅어지고, 특검 후보 추천을 누가 하느냐의 협소한 문제로 흘러가기도 했다. 특별법의 합의 내용 못지않게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의 행태를 성찰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9월25일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관련 심포지엄에서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정권과 정부는 진영 대립의 뒤로 숨었고, 야당은 그것을 견제하거나 제어할 동력을 상실했으며, (정치가 현안을 풀지 못하는) 정치적 진공 상태가 벌어졌고, 가족들은 점점 고립됐다. 그리고 ‘국가는 나를 최소한으로나마 보호해줄 수 있는가’란 질문은 점차 희석됐다”고 참사 이후의 우리 사회를 되짚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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