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청객이 법정에서 대부분 빠져나가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비로소 피고인석에서 일어섰다. 1심 선고에 대한 당사자의 비교적 솔직한 표정을 엿볼 수 있는 찰나의 순간. 변호인과 손을 잡은 의뢰인(원세훈)의 얼굴에 미소가 잠시 피어올랐다. 그는 건장한 사내들의 호위를 받으며 법원 건물 밖으로 나와 언론 카메라 앞에 선 뒤 에쿠스 승용차에 몸을 싣고 떠났다. 몸으로 막아 그를 서둘러 차에 넣은 덩치 큰 사내들이 그늘 밑에서 자기들끼리 들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병신들(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주장한 사람들), 이게 원래 선거법 위반이 되지 않는 거잖아. 자, 수고들 했어.”
“병신들, 이게 선거법 위반이 되지 않는 거잖아”그들의 대화엔 원 전 원장이 개인 비리로 14개월간 구속됐다 풀려난 지 이틀 만에 재수감될 사태를 피했다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9월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가 국정원의 2012년 대통령 선거 개입 사건에 내린 1심 선고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이 정부와 여당 정치인을 찬양하고, 야당 정치인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며 정치에 불법적으로 관여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죄가 무겁다.(정치 개입을 금지한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
② 하지만 이런 정치 개입이 2012년 대선 기간에 여당 후보에 유리하도록 영향을 미쳤더라도, 원 전 원장이 해당 후보의 당선을 목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직선거법 위반은 아니다.(공무원의 신분을 이용한 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위반은 무죄)
정치 개입은 맞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라는 말이다. 원 전 원장(징역 2년6개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과 같은 혐의를 받던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각각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 모두 구속을 피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두고 야당과 법조계 등에선 모순 판결, 정치 판결, 대통령의 심기를 살핀 법치주의 파괴 판결이란 반응이 나온다. 국정원이 대선 직전까지 선거에 나온 여당 후보를 찬양하고, 야당 후보를 비방한 글을 정치 개입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선거에 개입할 목적은 없었다는 판결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냐는 물음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결과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한 재판부가 정권을 살핀 ‘정치 판결’을 내린 것 아니냐는 의심을 부르고 있다.
우선 국정원의 정치 개입 혐의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부터 살펴보자. 정치 개입 혐의를 유죄로 본 재판부의 판결은 국정원의 초법적 행위를 비판해온 시민사회단체의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다. 국정원 직원들이 인터넷이나 트위터에 남긴 증거가 정치적으로 워낙 편향된 내용이어서, 어떤 판사라도 국정원이 정치 개입을 하지 않았다고 옹호해주지 못할 것이란 전망과 일치한다.
재판부는 “직원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일반인으로 가장해 인터넷 공간에서 국책사업 지지를 올리고, 특정 정치인과 야당을 비방한 것은 국가기관의 정당한 직무행위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국정원 직원들이 작성한 글이 어떤 왜곡된 사실을 반박하는 정도를 넘어, “정부에 비판적인 정당과 정치인을 원색적인 용어로 비방”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인터넷, 트위터에 글을 남긴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의 행위는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검찰의 주장을 전부 받아들였다.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면 강에 처넣어야”한다거나, “인터넷을 종북좌파 세력이 점령하고 있는데, 인터넷을 청소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라”는 이른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따라 심리전단 직원들이 활동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매달 부서장 회의와 매일 아침 브리핑 회의에서 원 전 원장이 말한 ‘지시·강조 말씀’이 “그대로 (심리전단의) 업무상 지시가 되었고, 심리전단의 게시글을 보면 원 전 원장이 지목한 정치적 쟁점이 빠짐없이 게재됐으며, 국정원은 원장님의 지시·강조 말씀을 위반한 이유로 직원을 징계하기도 했다”며 원 전 원장의 책임을 무겁게 판단했다.
대선에 임박할수록 글 수가 줄어든다?재판부는 국정원의 수장이 정치에 개입한 위험성을 판결문에 남기기까지 했다. “국정원이 특정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죄책이 무겁다.”
재판부의 판결처럼, 민주주의 토대를 위협했다는 국정원의 트위터 글이 무엇이었는지 몇 개를 잠시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국정원은 대선 두 달을 앞둔 2012년 10월에,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후원 계좌와 후원 전화번호를 트위터로 안내하며 ‘대선 승리로 가는 큰 힘이 됩니다’라는 글을 남겼고, 또 다른 트위터에선 ‘오로지 국민과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모든 걸 버리고 희생하는 박근혜 후보를 밀어주셔야 합니다’라는 글을 적기도 했다. 반면 2012년 12월엔 ‘(야당의 대선 후보인) 문재인의 대북관은 종북을 넘어서 간첩 수준이었다’거나, ‘주적의 대남 적화 강령에 동조하고 이를 공약으로 내건 사람(문재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란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이런 트위터 글을 근거로 검찰은 정치 개입을 넘어 대선에서 특정 후보의 당선을 목적으로 글을 작성한 선거 개입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은 특정 후보를 당선 또는 낙선시키려는 목적성·계획성·능동성이 인정돼야 하는데 원 전 원장한테서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가 선거법 위반을 무죄로 본 취지다. 재판부의 무죄 판단 이유를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 전 원장이 부서장 회의 등에서 ‘박근혜 후보를 도와라’ 따위의 지시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선 정국에서 원(국정원)이 휩쓸리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라’고 지시한 것을 볼 때 박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
둘째, 심리전단의 트위터 글의 개수가 대선에 임박할수록 줄어드는 것을 볼 때 박 후보를 당선시키려는 적극적인 계획성과 능동성도 보이지 않는다.
셋째, 국정원이 특정 정당·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비방해 선거에 영향을 줬더라도,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은 대선 기간 훨씬 이전부터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선거 시기에 이를 반복한다고 해서 선거운동으로 전환했다고 볼 수 없다.
재판부는 특히 원 전 원장이 심리전단의 잘못된 업무 관행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며, 이를 집행유예를 선고한 이유로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잘못된 관행을 따랐을 뿐이니, 형량 일부를 봐주겠다는 취지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일반인은 3~4번 올려도 목적성 인정”하지만 재판부의 이런 판단은 선거법 위반 여부를 관대하게 해석해준 것이란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국정원 직원들의 글은 대선 직전까지 ‘박근혜 지지, 야당 후보 비방’의 목적성이 일관됐으며, 엄중 중립을 지켜야 할 국정원이 선거 기간에 정치 개입을 했다는 자체가 선거 중립을 훼손한 선거 개입이란 것이다. 대선에 가까울수록 트위터 개수가 줄어든 것은 국정원이 민감한 시기에 적었던 글(증거)들을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하기 이전에 없앤 결과일 뿐이며, 대선 직전까지 야당 후보를 깎아내리는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는 게 선거법 유죄를 주장하는 쪽의 반론이다. 특히 재판부의 세 번째 판단은, “공식적인 선거 기간 이전부터 해왔던 불법행위가 선거 기간에 계속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대중에게 줄 수 있는 위험한 판단이란 지적도 많다.
박주민 변호사는 “일반인이 선거법 위반 적용 대상이 될 때를 보면, 인터넷에 3~4번 (반복적으로) 의견을 올려도 (불법적인 선거운동의) 목적성을 법원이 인정했다. 그런데 (수십만 트위터 글을 남긴) 국정원에 대해선 (선거운동의) 목적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영중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도 “댓글(트위터)을 통해 (정치) 개입을 했고, 그 댓글이 선거에 관련한 내용인데 선거법 위반 혐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박상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선 결과의 공정성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을 피하려고 선거법 무죄를 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야당 간사를 맡았던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대선 기간에 정치 개입을 했는데 선거 개입은 아니라는 판결은, 손등은 내 것인데 손바닥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빗댔다.
정치권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새누리당은 선거법 위반 무죄가 나온 데 집중하며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며 대통령을 흔든 정치 공세에 대해 야당은 사과하라”고 압박했다. 어쨌든 1심에서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위반 혐의에 무죄가 나온 만큼, 박근혜 대통령이 더 강하게 정국 주도권을 틀어쥘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당 내부 정비를 두고 혼란에 빠진 새정치연합은 “앞뒤가 맞지 않는 정치적 판결”이라고 판결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야권 내부에선 여권과 국정원이 ‘선거법 위반 무죄판결’만 내세워 마치 국정원이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구도에 휘말려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적어도 국정원이 원장의 지시로 대선 기간에도 정치에 개입한 사실이 1심 법원에서 입증됐다는 이유에서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진선미 새정치연합 의원은 “국정원이라는 거대 조직의 수사 비협조가 있었음에도, 국정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국민의) 문제제기가 (1심 법원에서)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했다. 선거법 위반 여부는 다시 상급심에서 철저히 다투더라도,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법원에서도 입증된 만큼 우리 사회가 국정원의 위법적 탈선을 다시 심각히 바라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그 자리에원 전 원장이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라는 1심 선고에 대해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혀, 이번 사건은 상급심에서 다시 치열한 논쟁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에선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을 적극적으로 수사한 ‘윤석열 수사팀’이 해체돼 뿔뿔이 흩어졌고, 원 전 원장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려던 수사팀의 결정을 꺾으려 했던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버티고 있는 등의 환경을 고려할 때 검찰이 2심에서 능동적 의지를 보일지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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