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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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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당법을 폐기하라

아직도 살아 있는 독재체제의 유산 ‘정당 만들 자유 막는 정당법’…
자유롭게 정당 결성·경쟁해야 국민에 가까운 정치 가능
등록 2014-05-15 13:58 수정 2020-05-03 04:27

결사의 자유가 보장됐더라면…
2014년 5월8일 어버이날 늦은 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은 KBS 앞에서 항의하다 청와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온밤을 지새웠다. 부모·자식 간에 감사의 마음을 나누며 행복했어야 할 그날,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은 여의도에서, 청와대에서 울분을 쏟아내며 묻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이 사태는 기업과 관료, 선출된 대통령과 공직자, 언론 등 대한민국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붕괴돼 나타난 참담한 결과다.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조직돼 시장과 정치를 견제하지 못한 것이 이 모든 시스템의 붕괴에 이르게 한 중요한 원인이다.

결사의 자유 그리고 세월호

세월호 승무원들이 안정된 고용 상태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되고 기업주와 대등하게 협상력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사고가 나기 전 단체교섭을 통해 업주에게 선박 안전의 보장을 벌써 요구했을 것이다. 해양경찰,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이 해고나 징계의 두려움 없이 노조활동을 하고 관료사회 내부의 비리를 고발할 수 있었더라면, 규제 담당 고위직의 비리는 사고 이전에 벌써 공개됐을지 모른다. 언론인들의 노조가 해고의 두려움 없이 활동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왜곡 보도로 피해자 가족들에게 2차 가해가 이뤄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시민들의 건강한 정치에너지가 자유롭게 정당으로 조직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좀더 국민의 목소리에 가까운 정부와 국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사회의 정치결사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는 사회 전체 결사의 자유에 대한 바로미터다. 정치결사가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노동조합과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조직을 만들고 이익과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기업과 권력은 견제되지 않는다. 기업과 권력이 견제되지 않은 사회는 언제든 세월호에 버금하는 사고에 직면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는 건강한 많은 정치에너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아주 일부만 정당으로 조직됐을 뿐 나머지 많은 시도들은 기존 정당들에 ‘이렇게 바꿔라, 저렇게 바꿔라’는 요구로 표출됐다. 후보 단일화를 하라, 결격 사유가 있는 인물을 공천하지 말라, 더 좋은 정치제도를 만들기 위해 합의해라, 정치의 기득권을 내려놓아라…. 그러나 정치는 유권자들의 성숙도를 따라오지 못했고, 정당은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반복했으며, 정치는 더 나빠졌다. 시민의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진 정치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의 위협으로, 고용 불안과 저임금 노동자들의 양산으로, 법 위에 군림하는 기업과 권력의 카르텔로 귀결됐다. 이제는 더 이상 기존 정당에 요구만 하지 말고 시민들 스스로 ‘자유롭게’ 정당을 만들 때가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결사의 자유는 ‘당신들의 정당’에 이런저런 요구를 할 자유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정치를 위해 나와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과 함께 자유롭게 정당을 만들 자유’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는 ‘박정희 정당법’이 있는 한 보장되지 못한다. 좋은 정치를 바라는 시민들은 ‘정당을 만들려면 선관위 등록증을 교부받아야 하고, 선관위 등록증을 받으려면 수도에 중앙당이 있어야 하며, 5개 시도에 1천 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하고, 선거에서 일정 수준의 득표를 하지 못하면 해산해야’ 하는 정당법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정당 결성 자체를 규제하는 민주주의 국가 없어

현행 정당법이 ‘박정희 정당법’인 이유는,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세력이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에 앞서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정당법 골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정치를 바라는 많은 시민들이 정치결사를 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제약하는 이 체제의 기원은, 쿠데타 세력 집권 계획의 일부로 만들어진 정당법이었다. 그들의 집권 계획은, 정치활동정화법으로 모든 정치인의 정당 활동을 금지한 상태에서 한편으로 공화당을 급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을 제외한 정당 결성을 법으로 제약하는 체제를 만듦으로써 완성됐다.
‘박정희 정당법’은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졌고 이후에도 전무후무한 독재체제의 산물이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정당법’이란 이름의 법을 가진 나라는 독일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정당법은 정당 결성을 제약하는 법이 아니라 결성된 정당의 활동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박정희 정당법’과는 성격이 다르다. 미국이나 일본, 프랑스 등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정당 결성 자체를 법으로 규제하는 나라는 없다. 왜? 노동조합이나 이익단체, 동호회 등을 결성하는데 지부 수와 회원 수, 중앙회의 소재지 등을 법으로 규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성 자체는 자유여야 하기 때문이다. 결성된 정당이 정치활동을 하거나 정치자금을 모금하고 지출하는 활동에 대한 규제는 다른 나라에도 있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정당을 만들고 표방하는 것 자체를 법으로 규제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역대 독재정권뿐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박정희 정당법’을 존속시킨 강력한 근거가 군소정당 난립 방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아무리 많은 정당이 만들어지더라도 의회에 의석을 얻고 대통령·단체장을 배출할 수 있도록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정당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공직을 맡길 정당의 수를 결정하는 건 법이 아니라 유권자의 선택이어야 한다. 시장에서 다양한 기업들이 경쟁해야 소비자가 이득을 보듯이,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몇몇 기업이 가격과 품질 담합을 하는 독과점 시장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소비자이듯이, 몇몇 정당이 담합하는 정치체제에서 그 피해는 유권자에게 돌아간다. 누구나 자유롭게 정당을 결성하도록 하고 그들이 유권자의 표를 위해 경쟁하도록 해야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군소정당 난립이 뭐가 무섭나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정치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정당들의 독과점 체제를 법으로 강제하는 ‘박정희 정당법’ 체제의 포기다. 더 이상 독재체제의 유산에 기대어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결사를 제약하지 말라.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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