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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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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왕조’, 유일한 ‘부마’의 퇴장

3대째 주요 인사로 자리매김된 인물의 역사적 퇴장
김설송과의 역학관계가 원인이라는 설이 유력
등록 2013-12-17 15:13 수정 2020-05-03 04:27

한때 권부 실세였다던 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난 12월13일 은 “장성택을… 사형에 처하기로 판결하였다. 판결은 즉시에 집행되었다”고 처형 사실을 전했다. 재판이 12일이었으니, 처형도 그날이었을 것이다.

‘김정은 체제’의 완성

역사적인 사건이다.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이하 직위 생략)은 대학 시절 김일성 주석의 딸 김경희와 사랑에 빠졌다. 김일성은 애초 반대했지만, 울며불며 헤어질 수 없다는 딸을 어쩌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둘은 함께 러시아 유학을 다녀와 1972년 결혼했다. 장성택은 권력 중심에 바짝 다가섰다. 1인 지배 체제의 북한을 ‘왕조’에 빗댄다면, 그는 유일한 부마였다. 이후 40여 년 동안 ‘왕조’는 3대째 내려왔고, 그는 (권력은 상하 파동을 그렸을지언정) 줄곧 주요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1946년생인 장성택이 칠순을 맞지 못하고 처형된 일은 분명 큰 사건이다. 역사적 퇴장이다.
큰 틀에서는 ‘김정은 체제’가 완성돼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오래 권력을 이어가려면 위협이 될 만한 인물과 세력은 제거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사에는 반역, 매국, 내각 무력화, 반당적 행위 등 무시무시한 공적 범죄와 더불어, 부정부패, 부화방탕(실속 없이 겉만 화려하고 행실이 좋지 못함), 외국 도박장 출입 등의 사적 범죄가 그의 혐의로 제시됐다. 앞서 12월9일 기사엔 자본주의 생활 양식, 여러 여성과 부당한 관계, 마약 등도 언급돼 있었다.
직접적 배경은 반역 혐의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 전하는 장성택의 발언 또한 반역 행위에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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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대와 인민이… 불만을 품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앞으로 인민들과 군인들의 생활이 더 악화되면 군대도 정변에 동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일정한 시기에 가서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 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하였다. …막대한 자금으로 일정하게 생활 문제를 풀어주면 인민들과 군대는 나의 만세를 부를 것이며 정변은 순조롭게 성사될 것으로 타산하였다.”

북한 경제의 앞날을 비관하며 불안 정서를 조장하고, 경제가 힘들어진 틈을 타서 반역을 도모했다는 장성택의 진술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 ‘유언’이었다.

역모는 본질적으로 권력싸움에서 패한 쪽이 뒤집어쓰는 혐의다. 장성택의 숙청에도 최고위층 권력 관계에 견제와 다툼이 있었을 거란 관측이 제기된다. 지금으로선 김설송과 조선노동당의 역학 관계가 원인이란 설이 유력하다.

“김설송, 당을 실질적으로 지배”

김설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맏딸이고, 현재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당 제1비서의 배다른 누나다(그림 참조).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는 김정일이 사망 두 달 전에 남긴 ‘유훈’에 “김설송은 정은의 방조자(협력자)로 준비시키고 밀어줄 것” “국내와 외국의 모든 자금 관리를 김경희가 할 것. 김경희가 다 할 수 없을 경우 김설송이 맡아서 할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고 말한다. 자녀들 가운데 ‘정은의 방조자’라고 콕 집어 말한 것은 김설송뿐이다. 유훈이 사실이라면 김설송이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셈이다. 김설송이 김정일이 가진 국외 비자금을 관리했다는 관측도 있다.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김설송은 현재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서 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직지도부는 선전선동부와 더불어 조선노동당의 양대 핵심 부서다. 김설송은 언론에 정식으로 공개된 적이 없어 공식 직함·직위가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조선노동당에서 조직지도부가 강화된다는 흐름, 또 그런 맥락에서 장성택의 처형이 이뤄졌다는 부분은 이 인사의 진술과 정확히 일치한다.

장성택의 당 직함은 행정부장이었다. 행정부는 검찰, 국가안전보위부(정보기관), 인민보안부(경찰) 등 공안기관을 관장한다. 행정부는 2007년 권력 집중을 막으려고 조직지도부에서 분리시킨 조직으로, 장성택이 부장을 맡으면서 비중이 커졌다. 장성택의 혐의를 보면 “사법검찰, 인민보안기관에 대한 당적 지도를 약화시킴으로써”라는 대목이 있다. 장성택의 행정부가 당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얘기다. 장성택이 제거되면서 행정부는 해체돼 조직지도부에 귀속될 가능성이 크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향후 조직지도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당과 국가기구, 군대 전반을 더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처형날 남북 공동위원회 개최 제의

고모부 장성택 전 부장이 끌려나가던 지난 12월8일 김정은 비서가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나왔다. 숙청, 처형 등 ‘공포정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지적인 이미지였다. 장성택을 처형했다던 12월12일 북한은 개성공단 남북 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의해왔다. 한국 정부가 제안한 ‘주요 20개국(G20)과 국제금융기구 대표단의 개성공단 방문’도 받아들였다. 장성택이 개혁·개방을 주도한다던 일각의 관측을 무색하게 만든다. 김정은 비서의 초청으로 올해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전직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데니스 로드먼은 12월19일 세 번째로 북한을 방문한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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