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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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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민낯

등록 2013-07-09 14:16 수정 2020-05-03 04:27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과 민주주의 파괴를 규탄하는 내용의 각계 시국선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정원이 2007년 남북 정 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한 뒤 오히려 더욱 탄력을 받는 분위기다. 시국선언 대열엔 시민단체와 교수, 대학생 등 대학 사회 는 물론 대안학교 학생들마저 동참하고 나섰다. 시국선언이란 현재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불만을 집단적으로 드러내는 적 극적 의사표현 행위다. 지난날 한국 사회의 주요 격변기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토해내는 ‘말’들이 모여 꽉 막힌 세상을 뚫고 나갈 길을 내왔음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한때 우리 사회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암흑의 세월을 오래 겪기도 했다. 고작 정권의 비위 에 거슬리는 농담 한마디 했다는 죄목으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는, ‘촌스러운’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 것도, 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 시절 말이란 곧 가려진 진실이고 억눌린 욕구였으며, 물리적 억압에 맞서는 최후의 무기였던 셈이다.
우리 사회가 한층 복잡하고 다층적 구조로 변하면서, 과거와 같은 물리적 억압의 흔적은 어느덧 사라졌으되, 과거와 달리 더 정교하고 은밀한 억압과 배제, 차별의 시스템이 그 자리를 차츰 꿰차고 있다. 너무도 명확한 사실을 억지로 가리거나 입을 강제로 틀어막는 대신, 쉽사리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요술이 횡행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여기는 세상’에선 ‘문제’란 ‘해결’되기보다는, 슬그머니 ‘해소’돼버리기 십상이다.
언젠가부터 ‘프레임’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어떤 문제를 특정한 성격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 드는 사고체계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사회과학 분야에선 ‘인식틀’이란 주제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머릿속에 정돈시키는 그 틀은, 곧 사물의 질서를 규정하는 거대한 힘이고, 그 힘의 원 천은 바로 말에 있다. 예컨대 겉으로는 군사문화의 잔재를 거부한다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산업‘역군’이니 태극‘전사’니 ‘용병’ 선수니 따위의 단어를 무심코 뱉어내는 현실은, 우리의 일상이 사물의 질서를 강제하는 말 의 힘에 얼마만큼 포섭돼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게 아닐까.
어쩌다보니, 이번주에 내놓는 969호는 유독 말과 관련된 꼭지들로 가득하다.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국가’ 를 흔들어버린 국가기관의 전횡을 고발하는 시민고발장, 시국선언에 참여한 대안학교 학생들이 털어놓는 생생한 수다,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여기는 세상에 맞서 20년을 싸워온 노들야학의 굳건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빼앗긴 말의 활로를 찾으려는 배 제당한 자들의 저항인 ‘가장자리’의 실험 등… 창조경제와 새마을운동이 공존하는, 원칙과 꼼수가 어깨를 맞댄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말의 민낯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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