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의원은 지난 6월1일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한 손님이 식당에 갔다. 주인에게 뭐가 맛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옆집은 맛이 없다고 한다. 다시 여기는 뭘 잘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옆집은 재료가 나쁘니까 절대 가지 말라고 한다. 손님은 나가버렸다.” 안 의원은 6월3~4일 잇따라 연 기자간담회에서 “(식당 이야기는) 기성 정치에 대한 것이다. 민주당과 싸우려고 정치를 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디까지나 ‘남의 식당’ 얘기다. ‘안철수 식당’은 개업 전이다. 메뉴(노선과 정책)나 경영체계(조직) 등 ‘정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새 식당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신당에 대한 지지율은 26% 안팎을 나타냈다(도표 참조). 새누리당에 약간 뒤지지만 민주당의 ‘더블스코어’다.
안 의원은 신당의 성격이 ‘제3정당’임을 분명히 했다. “양쪽(새누리당과 민주당)이 다양한 국민 의견을 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작지만 제3섹터가 존재하는 것이 결국 대세의 흐름이다”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보수-진보라는 기존 이념 구도를 거부하면서, 그가 “적대적 공존 관계”라고 비판해온 양당 구도를 뛰어넘는 독자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정책연구소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으로 영입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노동 중심 진보정당’을 둘러싼 논란은 안 의원의 이런 발언으로 한풀 꺾였다. 최 이사장은 지난 5월25일 수습 노무사를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안 의원의 정치 조직화든 활동이든 노동문제가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며 ‘노동 중심 진보정당’이라는 지론을 폈다. 그러나 6월3일 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이 연 ‘안철수 현상과 민주당의 미래’ 학술세미나에서는 ‘노동 의제에 집중하자는 것이지 노동세력이 주도하는 노동자 중심 정당은 아니라는 뜻이냐’는 질의에 “네”라고 답하기도 했다. 안 의원 쪽은 오히려 ‘국민 정당’이라고 말한다. 안 의원 쪽의 한 관계자는 “노동 의제를 중시하고 민주당보다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노동 중심진보정당은 전혀 다른 얘기다. 이념 정당을 표방하지 않는 한 국민 정당이라는 콘셉트로 가는 거다. 어떤 계급·계층을 대변하느냐고 할 때 DJ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을 표방하고, 새누리당이 강자를 위한 정당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차피 추상의 개념”이라고 말했다.
안 의원이 최 이사장의 영입으로 ‘상징 효과’를 거뒀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반(反)정당주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노동 의제와 정당정치를 중시하겠다는 의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난 대선때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인 김종인 박사를 중용한 박근혜 후보의 사례를 언급한다. 안 의원은 대선 과정에서 의원 정수 축소 등 정치 혁신안에 대해 반정당주의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자 최 이사장에게 대선 캠프 국정자문단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등 꾸준히 설득해왔다고 한다.
최 이사장의 한 제자는 “진보와 보수가 극단적으로 갈등하고 정당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안 의원이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들어 노동과 청년 실업 문제를 대변할 수 있으면 좋은데, 최 교수는 그 과정에서 안 의원이 길을 잃지 않도록 정치적 조언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 의원이 ‘현실정치인’이 된 상황인 만큼 기존 양당 체제에 ‘외부적 쇼크’를 줄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최 이사장이 ‘조언자’로 역할을 한정한다면 어떤 인물과 어떤 조직 형태로 정당을 만들지는 안 의원의 능력에 달렸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이 시너지를 내기보다는 안 의원의 지지 세력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 이사장의 ‘노동 중심 진보정당’이 안 의원의 중도·탈이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정당 모델 측면에서도 최 교수는 정당의 정체성을 느슨하게 만드는 국민 참여에 부정적인 반면, 안 의원은 개방형 정치 구조를 강조한다.
‘박근혜-김종인’ 조합처럼 효과 누릴 듯‘대중의 시각’에서는 이런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대중은 안 의원이 진용을 갖춰간다고 인식하지, 최 교수가 진보를 상징하는 학자이기 때문에 안 의원과 크게 충돌할 거라고 인식하진 않는다. 박근혜-김종인 조합도 서로 효과를 누린 측면이 크다. 안철수-최장집 조합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제1야당을 대체할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함께하고 있다는 면에서 서로에게 유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말로 자신의 노선을 설명한다. 이는 안 의원이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는 공간이 어디냐의 문제이자, 기존 정당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의 문제다. 안 의원 쪽은 대선 때처럼 ‘야권 범주’에서 세력화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안 의원 쪽의 다른 관계자는 “우리는 민주당을 경쟁 상대로 보지 않는다. 민주당 표를 갈라 먹으려고 나온 게 아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 양쪽표를 모두 끌어오려는 것이다. 안철수 지지층은 새누리당 성향, 민주당 성향, 무당파가 3분의 1씩이다. 안보는 중도보수, 경제는 진보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안철수를 불러냈고, 그들을 타깃으로 정치세력화를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 의원도 지난 4월24일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의 득표율을 들어 이렇게 말했다. “노원병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46%를 얻었는데, 보궐선거에서 이 가운데 30%가 나를 지지했다. 견고한 양당 체제나 진영 논리에 갇혀있지 않은 사람들의 힘이다.” 이런 발언에는 ‘새누리당 어부지리론’, 즉 야권을 분열시킨다는 비판에 대한 방어적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도야 어떻든 야권 분열 프레임이 형성될 여지도 적지 않다.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지지층을 정치세력화의 토대로 삼는 전략은 유효한 것일까? 안철수 지지층에 ‘반정치’와 ‘능동적 정치’라는 두 성향이 섞여 있다고 보면, 이들을 하나의 정당 지지층으로 묶어내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안철수 지지층이 ‘동질적 집단’이라는 한 연구 결과는 이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최종숙 충북대 교수는 지난 6월3일 중민 사회이론연구재단 학술세미나에서 ‘안철수 지지층은 이념적 스펙트럼으로는 이질적 집단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 지향을 따져보면 동일한 집단’이라는 요지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대북 정책, 복지, 경제민주화, 개인의 성공 조건, 물질적 성공 지향 등 5가지 쟁점 항목에 대한 안철수 지지층의 지향을 분석한 결과,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에서는 진보층에 가깝지만, 대북 정책에서는 중도, 물질적 성공 지향에서는 보수층에 가까우며, 성공의 조건으로 개인의 노력과 구조적 요인 둘 다 중시한다는 점에서 진보와 보수의 성향을 공유하는 동질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안철수 우파’(안철수를 지지했다가 박근혜에게 투표한 사람)와 ‘안철수 좌파’(안철수를 지지했다가 문재인에게 투표한 사람)를 비교했을 때도 이런 쟁점 항목에 대해 관점을 공유하는 동질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를 “보수-진보라는 기존 프레임으로 포착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복합적 유권자층의 등장”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이념적 진보와 보수가 혼재된 상태로 공존하고 있다면 손쉽게 갈라설 수 있는 집단으로 볼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정당 간의 역학 관계가 강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합리적 보수나 중도층을 포괄하는 행보를 강화하거나, 민주당이 혁신의 성과를 내놓는다면 안 의원의 입지가 줄어들 것이란 얘기다. 윤희웅 실장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심판·견제 정서가 형성될 경우 안 의원이 명확한 스탠스를 정립하지 않으면 진보 성향 지지층의 이탈 가능성이 크다. 현재는 박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국정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에게 안철수 신당의 이념 성향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대중의 관심사는 안철수 신당이 민주당과 경쟁하는 정당이 되느냐, 아니면 민주당을 대체하는 정당이 되느냐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복합적 유권자층’이 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현실정치에 실제로 구현해낼 수 있느냐다. 지지층의 넓은 스펙트럼은 안철수 세력 내부적으로 노선과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다양한 유권자의 요구를 정당 형태로 체계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안 의원은 자신의 정치 행보를 ‘스텝 바이 스텝’이라고 표현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꺼번에 집중 투입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단계마다 마일스톤(milestone·이정표)이 있다. 성과가 있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성과가 없으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업을 할 때부터의 ‘안철수 스타일’이라고 했다. 안 의원은 정치세력화 과정의 1차 과제인 10월 재·보궐 선거에 대해서도 “재보선은 하나의 과정일 뿐, 잘되면 크게 나가고 안 되면 주저앉는 게 아니다. (지역마다) 다 내보낼 수는 없고, 사람이 되는 대로 형편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6월19일 첫 세미나에서 본격화애초 10여 곳으로 예상된 재보선 규모가 7~8석 정도로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졌고, 맞춤한 후보를 구하기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안 의원은 전문가 영입에 공들이는 한편, 호남·수도권 지역의 민주당 전직 의원들에게 영입 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철수 세력의 노선·정체성 등을 둘러싼 토론은 6월19일 열리는 ‘정책 네트워크 내일’ 첫 세미나에서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최장집 이사장과 장하성 소장 등 4명이 정치·경제 분야의 ‘밑그림’을 내놓고 토론할 예정이다. 리더는 이미 존재하나, 정당의 노선과 정체성, 인물 등을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하는 처지, 그야말로 스텝 바이 스텝이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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