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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핵 수첩’에는 무엇이?

4월 출범할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위원회’ 추진계획 입수… 독립성과 실효성 논란, 박근혜 정부 원전 정책 수면 위로
등록 2013-04-07 21:54 수정 2020-05-03 04:27

2011년 4월28일 오전. 독일 공영방송 채널 (Phoenix)의 방송 카메라는 베를린 시내의 한 회의장을 비추고 있었다. 11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회 생중계의 시작이었다.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 위원들은 28명의 전문가와 함께 이날 하루 종일 핵발전소 운영 등을 포함한 독일 에너지 정책 방향에 대한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른바 ‘17인 윤리위원회’라고 불린 이들은 다양했다. 클라우스 퇴퍼 전 환경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를 쓴 사회학자 울리히 벡 뮌헨대 교수, 독일 화학기업 바스프(BASF)의 위르겐 함브레히트 회장, 울리히 피셔 가톨릭 주교, 유럽연합(EU) 환경자문회의 의장인 미란다 슈로이어 베를린 자유대 환경정책연구소장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뒤 에너지 정책을 정하기 위해 초빙한 전문가였다.

2010년 12월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월성원자력환경관리센터 직원들이 인수저장시설에 들어온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옮기고 있다. 울진핵발전소에서 해상으로 옮겨진 폐기물은 경주 핵처분장이 완공되면 이곳에서 최종 처리된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10년 12월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월성원자력환경관리센터 직원들이 인수저장시설에 들어온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옮기고 있다. 울진핵발전소에서 해상으로 옮겨진 폐기물은 경주 핵처분장이 완공되면 이곳에서 최종 처리된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MB 정부 때 공론위 출범하려다 취소돼

위원회는 8주 동안 전 국민에게 공개된 100차례가 넘는 토론·공청회를 열었다. “정부의 들러리가 될 것”이라며 위원회 참여를 거부한 녹색당과 독일 환경단체 분트(BUND), 그린피스의 예상과 달리 위원회는 전향적인 결론을 내렸다. “2022년까지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해야 한다.” 위원회의 설득력은 컸다. 메르켈 총리는 핵발전소 수명연장 정책을 폐기했다.

4월 중 국내에서도 독일의 ‘17인 윤리위원회’를 닮은 시험을 시작한다. 이른바 ‘15인 공론화위원회’가 출범하는 것이다. 정식 명칭은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위원회’(이하 공론위)로, 그동안 결정하지 못했던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 핵연료)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는 정부의 자문기구다. 그동안 국내에는 23기의 핵발전소가 들어섰지만, 한 번도 사용후 핵연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다. 그런 탓에 현재 핵발전소 수조에 임시로 담아둔 사용후 핵연료는 이미 저장량의 71%까지 차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화장실 없는 아파트’에 빗대곤 한다. 공론위를 통해 사용후 핵연료의 관리 방식(중간저장 또는 직접처분)과 부지 선정 방식, 유치 지역 지원 방안 등을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공론위는 이른바 ‘부안 사태’의 결과물이다. 핵처분장 후보지 선정 과정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으로 나타난 갈등을 해결하자는 취지다. 극단적인 지역 반발을 겪은 참여정부는 2007년 국가에너지위원회 산하에 각계 인사로 구성한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 TF팀’을 만들었다. 그 뒤 방사성폐기물 관리법에 “사용후 핵연료 관리 등 사회적 갈등이 예상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공론화를 추진토록 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공론위는 토론회·설명회·공청회 등을 거쳐 정부에 권고 보고서를 제출한다. 정부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사용후 핵연료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실 공론위 출범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2009년 7월 이명박 정부는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을 공론위원장으로 임명한 바 있다. 그러나 14명의 위원 위촉식과 서울 양재동 사무실 현판식을 앞두고 돌연 출범이 취소됐다. 당시 지식경제부는 “공론화의 법적인 토대를 마련하고 우선 전문가 그룹(사용후 핵연료 정책포럼)의 연구용역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공론위 백지화의 이유로 “정부가 촛불집회 뒤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이 불거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와 “지식경제부와 교육과학기술부 사이의 원자력 정책 주도권 싸움 탓”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처럼 표류를 거듭하던 공론위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 건, 이명박 정부 말기인 지난해 11월20일이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연 ‘제2차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사용후 핵연료 관리대책 추진계획안’을 의결하면서 오롯이 차기 정부로 과제를 떠넘긴 셈이 됐다.

원전과 이해관계 얽힌 산자부가 운영

그러나 출범을 앞둔 공론위의 밑그림을 보면, 여전히 ‘갈등의 씨앗’이 자리잡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공론위 위원의 구성이 너무 폐쇄적이고, 공론위의 논의 주제를 제한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이 김제남 의원실(진보정의당)을 통해 입수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 추진계획(안)’ 보고서로 공론위 구성 방향을 짐작해볼 수 있다. 보고서에는 “인문사회 분야 5명(갈등관리, 사회과학, 언론, 법률), 시민환경단체 분야 4명(환경단체, 시민단체, 경제단체), 기술공학 분야 3명(원자력, 에너지, 방사선·환경), 원전지역 대표 2명 등 모두 14명의 공론위원을 임명해 운영하겠다”고 설명하고 있다. 산자부는 “시민환경단체 분야나 원전지역 대표 위원의 경우에는 해당 기관의 추천을 받고 그 외 나머지 위원(8명)은 산자부 장관이 선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산자부 추천 위원으로는 ‘사용후 핵연료 정책포럼’에서 위원장을 맡았던 목진휴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조성경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정주용 한국교통대 행정정보학과 교수 등이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

955호 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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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단체에서는 반수 이상을 정부가 임명하는 공론위가 제 역할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팀 처장은 “지난달에 산자부에서 여러 환경단체가 참여하는 ‘핵 없는 세상 공동행동’에 공론위원 참여를 제의했는데, 내부적으로 공론위 성격에 대한 이견이 많아 참여 여부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사용후 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은 핵발전소 부지에도 만들 수 있는데, 경북 울진군·경주시, 부산시 기장읍, 전남 영광군 등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 4곳 중 2곳의 지역 대표만 참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 조직 안에서 공론위의 지위도 문제가 되고 있다. 원자력 산업과 이해관계가 얽힌 산자부가 공론위의 운영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균형적인 운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제남 의원은 “핵발전소 유지 여부가 달린 사용후 핵연료 논의는 단순히 한 정부 부처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전 국가적 사안”이라며 “국무총리실 직속 위원회 수준의 범정부적인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해 ‘사용후 핵연료 정책포럼’도 보고서를 통해 김 의원과 같은 지적을 했지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탓에 공론위 운영은 산자부 산하기관이 떠맡고 있다. 지난 3월4일부터 서울 명동 포스트타워에 사무실을 연 공론화 준비지원단은 이용래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부이사장이 단장을 맡고, 약 30명의 직원 대부분이 방폐공단과 원자력 관련 기관에서 온 직원으로 짜였다.

“재처리 비용이 직접처분 2배 달해”

공론위가 얼마나 깊은 논의를 끌어안을 수 있는지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사용후 핵연료를 둘러싼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에는 사회적인 이견이 없지만, 그러자면 실타래처럼 얽힌 원자력 정책의 방향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후 핵연료의 중간처리 시설이나 직접처분장을 만들려면 그 규모를 정해야 하는데 핵발전소를 확대할지 축소할지에 대한 논의를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시설 부지 선정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으로 알려진 영국의 방폐물관리위원회(CoRWM)는 최근 신규 핵발전소의 사용후 핵연료 규모를 재처리 시설에 추가하면서 지역에서 큰 반발을 겪고 있다.

보고서는 “위원회의 독립성, 책임성 부여를 위해 논의 주제는 위원회에서 결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용후 핵연료 정책포럼’이 지난해 내놓은 용역 보고서에는 공론화의 범위를 중간저장 시설을 어디에 어떻게 지을지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임시저장, 중간저장, 영구처분 등의 문제를 모두 다루게 될 가능성이 있고, 원전 비중과 원전 계속 여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논의 주제를 제한하지 않을 경우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보고서에서는 “논의의 범위를 우리나라 원자력 정책이나 에너지 정책 등으로 무한정 확장시키는 것은 공론화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 취지를 벗어난다”라며 아예 불필요한 논의를 차단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던 지난 2월1일 서울 통의동 집무실에서 미 하원 의원단을 접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필요성을 언급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던 지난 2월1일 서울 통의동 집무실에서 미 하원 의원단을 접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필요성을 언급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그동안 박근혜 정부는 원자력 정책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다만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에 대한 입장은 여러 차례 내비쳤다. 지난 2월 당선인 시절 찾아온 미국 하원 의원단에 “사용후 핵연료의 기술적 재처리가 필요하다”며 2014년 3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에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허용하는 내용을 반영해줄 것을 강하게 주문했다. 재처리 시설을 갖추려면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미국의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는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승인 여부가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재처리 등으로 원자력 산업을 확대하려는 전문가·업계 입장에서는 사용후 핵연료를 꺼낼 수 없는 직접처분보다는 중간저장 시설을 세우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 원자력위원회의 2011년도 자료에서 롯카쇼무라 상업 재처리 공장의 사례를 보면 재처리 비용이 직접처분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온다”며 “안전성 등을 생각하면 직접처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올 하반기, 원전 정책 ‘커밍아웃’ 불가피

공론위 출범을 시작으로 박근혜 정부는 원자력 정책의 방향을 밝혀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오는 8월에는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핵발전소 전력 규모를 정해야 하기에 원자력 정책의 ‘커밍아웃’이 불가피하다. 그동안 메르켈 총리 따라잡기를 즐겼던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한국판 ‘17인 윤리위원회’를 이끌 용기가 있을까. 혹시 사용후 핵연료 논의의 답도 그의 수첩 속에서 찾고 있는 건 아닐까.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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