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휘청거리고 있다. 핵심은 역시 인사다. 극우 성향인 윤창중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부터 신구 정권이 교감해 낙점했다는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등이 발목을 잡았다.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도 꼬리를 물고 터져나온 의혹 속에서 결국 자진 사퇴했다. 새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자가 정식 청문 절차를 밟기도 전에 낙마한 것은 헌정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참사다. 이동흡 파동에선 청와대와 인수위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꼴사나운 장면까지 연출했다. 박 당선인의 지지율은 50% 중반에서 저공 비행을 거듭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 지지율이 70% 중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엔 80% 중반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암담한 수준이다.
당선인 본인의 ‘감’과 소수 측근들에게만 의존하는 인사 스타일은 필연적으로 검증의 구멍을 낳는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의 인상과 느낌을 기록했다는 인사수첩을 활용 한다지만 그것으로 검증이 충분하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수첩에 깨알 같은 검증을 한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시스템보다는 수첩에 더 의존하는 게 아닌가 의문”이라며 “내가 만나봤더니 이 사람이 괜찮더라고 단정해버리면 결국 다른 기초적인 부분에 대한 검증이 부실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사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찾는다. 박 당선인은 1월31일 경남 지역 새누리당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공직 후보자의) 신상 문제는 비공개로, 제도적으로 시스템화해서 확인하고 통과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검증해 업무 능력이나 업적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 맞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복수의 참석자들이 전했다. 총리 후보자의 낙마 사태 등 인사 논란의 원인이 언론의 ‘검증 보도’에 있다는 인식에서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검증하면 능력은 다 들여다보기 힘들다. 현행 인사청문은 공직자로서 업무 수행에 필요한 것을 균형 있게 검증하기보다 개인의 사생활, 신상에 치중하는 면이 있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박 당선인 자신의 과거 발언과도 배치된다. 그는 2007년 6월 남북조찬기도회에서 “국민에게 후보들의 국가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고 판단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BBK 등 각종 검증 이슈가 정국을 뒤흔든 시점이었다. 같은 날 이명박 당시 후보는 “세상이 미쳐 날뛰고 있다. 총체적인 이명박 죽이기가 시작됐다”고 반발했다. 박 당선인은 2006년 12월 한 언론 인터뷰에선 “대통령이나 국가 지도자 자리가 얼마나 막중한가. 철저한 검증을 받는 건 당연하고 그래야 국민도 안심한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6월 이해찬 당시 총리 지명자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선 “나라의 큰일을 하는 자리인 만큼 철저하게 검증 과정을 거치겠다. 그게 야당의 임무가 아니냐”고 했다.
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2004~2006년에 이기준 당시 교육부총리, 이헌재 경제부총리,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 등 노무현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 줄줄이 물러났다. 모두 김용준 전 후보자의 경우처럼 부동산 투기 논란이나 자녀 문제 등 ‘개인의 신상’과 관련된 의혹이 원인이었다. 정치적 경쟁자나 상대 진영을 향해선 철저하던 검증의 칼날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시시콜콜한 꼬투리 잡기’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대선에서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을 지낸 조해진 의원조차 2월1일 “우리가 야당일 때는 더한 것도 했었다. 당선인이 우리 당에 있을 때 정부를 엄격하게 검증한 것처럼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 초심을 그대로 가져가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도 “박 당선인도 이명박 정부의 ‘고소영’ 내각과 ‘회전문’ 인사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느냐. 인사 추천이나 검증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누가 추천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인선하게 됐다는게 국민에게 보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상처는 입을 만큼 입었다. 하지만 당장 새총리 후보자 지명부터 조각, 청와대 참모진 인선까지 인사의 밑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동흡 후보자의 자진사퇴 거부로 꼬인 헌법재판소장 공석 사태도 박 당선인이 풀어야 하는 과제다. 검찰총장·경찰청장·국세청장·감사원장·국가정보원장 등 5대 권력기관장 인사도 남아 있다. 박 당선인의 밀봉·비선·불통·아날로그 인사가 변하지 않는 한 새 정부 출범 과정 전체가 어그러질 수 있다는 우려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박 vs 이|정면 충돌인가 의도된 연출인가반전의 계기는 뭘까. 박 당선인에게는 어쨌든 가장 강력한 카드가 남아 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그는 이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해 비난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민생에는 실패했다”는 정도의 언급만 내놨을 뿐이다. 하지만 1월29일이 대통령이 측근 인사들을 포함한 특별사면을 끝내 단행하자 톤이 달라졌다. 조윤선 당선인 대변인은 “박근혜 당선인은 이번 특별사면에 부정부패자와 비리 사범이 포함된 것에 대해 큰 우려를 표시했다. 이번 특사 강행은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넘어선 것으로 국민적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내놨다.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도 “국민적 지탄을 받을 것”이라며 “이 모든 책임은 이명박 대통령이 져야 할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박 당선인도 “그동안 죄를 짓고도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또 돈이 많다는 이유로 법망을 피해가는 경우가 많았다”며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사회 지도층의 범죄에 대한 공정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직접 이 대통령이나 사면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특사 강행을 우회적으로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현재로선 정면 충돌 양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박 당선인은 무책임한 측근 사면에 반대했다는 명분을, 이 대통령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나 천신일 전 세중나모 회장 등 측근들과 사돈인 조현준 효성섬유 PG장(사장)의 사면 단행이라는 실리를 챙겼기 때문이다. 한때 ‘이명박 대통령의 입’으로 통했던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언론 인터뷰에서 “언론은 (상황을) 재미있게 하려고 정면 충돌하는 것처럼 관심을 끌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박 당선인과 이 대통령이) 서로 입장을 알고 하는 게임이라고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박 당선인도 여러 여론 흐름이 좋지 않으니 사면마저 묵인했다는 덤터기를 쓰는 것이 걱정됐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강력하게 입장을 표명하는 게 아닌가”라고도 했다. 특사 강행을 두고 박 당선인과 이 대통령이 충돌하는 모양새가 연출됐지만 결국은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민주통합당은 즉각 논평을 내고 “마치 양측이 심각한 충돌을 할 것처럼 으르렁거렸지만 내부를 잘 아는 이동관 전 수석의 발언은 이번 사면이 짜고 치는 밀당이었다는 국민적 의구심을 확인시켰다”고 비판했다. 야당은 이번 사면과 관련해 국정조사와 청문회까지 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히려 파국은 새 정부 출범 이후 전면화될 가능성이 높다. 퇴임하는 이 대통령은 이제 상수가 아니라 변수다. 상수는 물론 박 당선인이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국책사업인 4대강 사업을 필두로 휘발성이 높은 갈등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이 대통령은 퇴임을 한 달 앞둔 1월24일 “이제 소시민으로 돌아가 산다고 하는 데 굉장히 벅차 있다. 나는 이제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고 했다. 퇴임 뒤 “환경운동에 뛰어들겠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2011년 발간한 영문판 자서전에선 “지속 가능한 녹색 미래를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녹색성장과 환경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교육하는 일에도 참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보수언론 vs 박근혜|‘출구전략론’ 통할까1월17일 는 박 당선인이 공약한 4대 중증 질환(암·뇌혈관·심혈관·희귀질환) 치료비 전액 지원 사업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 박 당선인의 공약인 소득연계형 반값 등록금 지원, 가계부채 탕감, 채무불이행자 신용회복 등을 포기하거나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 대선이 끝나자 보수언론이 앞장서 각종 복지공약의 축소 및 속도 조절을 주문한다.
적어도 현재까지 박 당선인은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복지공약 출구전략론’에 선을 긋고 있다. 관건은 역시 각종 복지정책 실현을 위한 재원 마련 여부에 달렸다.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했던 박 당선인이다. 그는 1월28일 “새로운 세금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약속한 대로 정부의 불필요한 씀씀이를 줄이고 비과세 감면조정과 지하경제 양성화 등의 방법으로 재정을 확보해서 그 안에서 하겠다”고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내부의 흔들기도 만만치 않다. 심재철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예산이 없는데 공약이므로 그대로 하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정몽준 전 대표도 “인수위는 공약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우선순위를 정해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결국 보수 언론이 주장하는 ‘출구전략론’에 투항해 각종 복지 공약을 폐기 또는 수정하거나, 자신이 공약한 ‘증세 없는 복지’를 실현할 묘수를 찾아내거나, 아니면 증세의 필요성을 시인하고 사회적 합의와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박 당선인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그는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선택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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