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이 ‘진짜 박근혜’의 얼굴일까.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전면적 쇄신을 이끌었던 4·11 총선 이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곧바로 화장기를 지우고 과거로 회귀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부산 지역의 총선을 좌지우지했던 최측근 현기환 의원의 돈 공천 파문이 정국을 뒤흔들었다. 측근 그룹을 중심으로 ‘보수 대연합’ 추진이 거론됐다. 야권의 의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점유했다는 평가를 받은 ‘경제민주화 논란’에 대해서도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왔다. 그렇게 박 후보는 결과가 뻔한 ‘재미없는 경선’을 통해 지난 8월20일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중도 지향, 보수와는 스킨십 확대
그리고 또다시 ‘쇄신’이다. 최측근인 최경환 의원은 “이번 경선의 캐치프레이즈가 ‘박근혜가 바꾸네’였지만 이제 ‘박근혜가 바뀌네’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박 후보는 “주위에서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온 것 같다”며 “사람은 미래지향적으로 변해야 한다. 국민의 삶을 안정되고 좋게 하기 위해 (제가) 바뀔 필요가 있다면 더 바뀌겠다고 생각한다”고 호응했다.
최근까지 내홍을 이어갔던 ‘보수 대연합’과 ‘중도 강화론’의 문제의식도 어느 한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끌어안는 쪽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경선 캠프의 홍사덕 공동선대위원장은 “간도를 수복하자는 마당에 한반도 통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외연 확대와 당내 화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혜훈 최고위원도 “보수와 중도를 선택하는 쪽으로 생각하면 대선에서 승리하기 힘들 것”이라며 “정책은 주로 중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맞고 보수층에는 스킨십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가 공략해야 할 지점은 명확하다. 전략이 바뀐 이유다. 사회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서치앤리서치가 40대 스마트폰 사용자 700명을 대상으로 8월21일 실시한 양자구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박근혜 후보 지지율은 41%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53.1%에 비해 무려 12.1%포인트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후보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47.0%)와의 양자 구도에서도 46%의 지지율에 그쳐 오차범위(95% 신뢰수준에 ±3.7%포인트) 안에서 밀렸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20∼30대 유권자 사이에서 박근혜 후보는 20%대의 지지율에 머물고 있는 반면 안 원장은 60%대 지지율인 것으로 나타나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 결국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도권과 젊은 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되돌리지 못하면 연말 대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 측근은 “이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본선에선 필패일 수밖에 없다”며 “그동안 몇 가지 잡음이 있었지만 박근혜 후보의 전략은 명확하다. 보수층을 기반으로 중도층과 진보층 유권자들에게까지 나아가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박 후보는 당내 비박 및 반박 세력을 끌어안는 동시에 4·11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좌클릭·쇄신 행보’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경선 다음날인 8월21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았다. 아들 현철씨가 공천을 받지 못해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예방했다. 최경환 의원은 “진보와 보수의 벽을 허물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를 하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경선 후보와 이산가족 재회처럼 화기애애
박 후보를 돕고 있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일부에서는 정치적 쇼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지만 이건 저질 쇼가 아니라 100만불짜리 쇼”라며 “통합과 화해의 정신에 맞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전직 대통령들과 유족을 두루 예방했지만 신군부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배제하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은 “역풍을 우려해 누구는 찾아뵙지 못하는 작은 정치를 할 때가 아니다”라며 ”박근혜 후보는 대한민국 모두를 보듬어 안고 가겠다는 의지와 마음을 키우고 대선에 임하고 있다”고 말해 조만간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예방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건강 악화로 만남 자체가 성사되기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8월24일에는 김문수 경기지사, 김태호 의원, 안상수 전 인천시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등 당내 경선에서 경쟁했던 후보자들과 오찬 회동을 하는 등 화합의 모양새를 취했다. 이 자리에서 박 후보는 “경선도 끝났으므로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도록 네 분이 힘이 돼주시고 많이 도와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경선 기간 내내 날선 비난을 퍼부었던 김문수 지사는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화답했다. 김태호 의원도 “경선 때 박근혜 후보가 미워서가 아니라 실제 국민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달한 것“이라며 “오늘 자리도 경선 때 쏟아진 얘기를 박 후보가 다 끌어안고 가겠다는 표시가 아니냐”고 했다. 이에 박 후보는 “이산가족이 재회한 것 같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 밖에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쪽 인사로 분류돼온 이들을 영입하려는 물밑 움직임도 분주하다. 이정현 최고위원은 “비박계는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인사들 중에서도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다 끌어안을 것”이라고 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영작 전 한양대 석좌교수의 영입설도 나왔다.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윤병세 서강대 교수는 일찌감치 캠프에 합류한 상태다.
경선이 끝나자마자 ‘반값 등록금’ 실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 후보는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과 지난 8월23일 가진 토론회에서 “이것(반값 등록금)은 우리 당의 당론이라고 할 수 있다”며 “꼭 실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당은 “공약 우려내기 이벤트를 중단하라”고 혹평했다. 반값 등록금은 20대 대학생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핵심 공약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때 공약으로 내걸었다 식언한 바 있다.
‘인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을 것인가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은 공약으로 반값 등록금을 제기했지만 이 대통령은 집권 이후 “그건 당의 공약이었을 뿐 나의 공약은 아니었다”며 말을 바꿔 빈축을 샀다. 박근혜 후보는 “나는 함부로 약속을 하지 않는다”며 “내 의지가 실리고 확신이 섰을 때만 약속을 하고 그것은 꼭 지킨다”고 강조했다. 축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박 후보를 두고 대학생들이 비판을 이어가자 즉석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기민함도 보였다. 경선 이후 박 후보가 연이은 오찬 간담회 등을 통해 언론과의 접촉 면을 넓히고 있는 것도 과거와는 달라진 점이다.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런 행보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당과 캠프 안팎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역시 관건은 보여주기식 이벤트가 아니라 쇄신과 변화의 진정성에 달렸다는 지적이 많다. 새누리당에서 ‘친박’이라는 용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당 밖에선 새누리당 전체를 ‘친박당’이라고 인식하지만 실제 ‘친박’은 2007년 경선 캠프에서 활동했던, 최측근 인사들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한 고위 당직자가 “나는 친박이 아니라서…”라며 현안이 있을 때마다 박 후보 본인이 아니라 측근과 먼저 상의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온다. 박 후보 주변을 둘러싼 ‘인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느냐가 대선 가도의 중요 변수가 되리라는 것이다.
대선 기획단의 면면이 그 리트머스시험지다. 대선 기획단은 9월 중순 이후 꾸려질 선거대책위원회의 구성부터 당 조직과의 연계까지 박근혜 후보의 대선 전략 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조직이다. 친박 내부에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유승민 의원이 기획단장을 맡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선 최측근인 최경환 의원이나 서병수 사무총장 중 한 사람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기획단 자체가 최경환-서병수 ‘투톱 체제’로 꾸려지는 방안도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과 쇄신의 정치적 효과를 노린 파격 행보를 박근혜 후보가 이어간다고 해도 그 방향타는 여전히 보수적 성향이 강한 소규모 측근 그룹이 쥐게 된다는 이야기다.
정책 분야의 핵심 의제인 경제민주화 논란이 아직까지 내부에서 표류하고 있는 건 그래서다. 최측근 그룹이 모두 경제민주화 문제에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다. 최경환 의원은 최근 “경제민주화로 대선까지 갈 수는 없다”고 말해 당내의 거센 논란을 부른 당사자다. 한 친박계 인사는 “현재 박근혜 후보의 손발을 장악한 일부 ‘재벌 장학생’들이 경제민주화에 대한 박 후보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다른 당직자도 “인적 개편 등으로 박근혜 후보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한 제대로 된 성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경제민주화 문제 나오자 애매모호
실제 박 후보 본인도 경제민주화 논란에 대해선 애매모호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이어가고 있다. 친박·비박·쇄신파 인사들이 폭넓게 참여하고 있는 새누리당 경제민주화 실천모임이 재벌의 지배구조 자체의 개혁을 거론하고 있는 반면 박근혜 후보는 부정적이다. 박 후보는 8월23일 기자 간담회에서도 “지배구조를 중심으로 나가다 보면 재벌 다 해체해야 한다. 그러면 대기업이 가진 장점을 다 놓친다”고 선을 그었다. “지금 야당이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론과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내용은 다른데 그걸 섞어서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본다”고까지 말했다. 쇄신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물론 사람과 정책이다. 박근혜 후보는 정말로 변할 생각이 있을까?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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