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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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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박리자베스, 나는 안스벨트

등록 2012-08-28 17:33 수정 2020-05-03 04:26
7월10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7월10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 사진 사진공동취재단

16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사진 한겨레 자료

16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사진 한겨레 자료

이런 사람을 존경한다(롤모델)는 말과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워너비)는 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롤모델을 살펴보면, 그가 지향하고 이루려는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성공’일 수도, ‘권력’일 수도, ‘명예’일 수도 있다. 대선주자들도 롤모델을 말한다. 자신이 만들고 싶어 하는 나라를 구체적 인물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그 인물이 가진 리더십을 자신도 갖고 있노라고 얘기한다. 또한 그들은 롤모델을 통해 권력의지를 내비친다. 올해 대선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롤모델이 16~17세기 여왕이라는 점, 그리고 야권의 유력 주자로 꼽히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롤모델이 같다는 점이다.

하필이면 그녀도 독신이네

박근혜 후보는 8월14일 MBC 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를 롤모델로 꼽았다. “영국을 파산 직전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어려서 고초를 겪었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다”고 이유를 밝혔다. 또 “자신이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합리적 국정을 이끌어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대영제국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초와 시련, 불행은 박 후보 자신의 과거이기도 하다. 배려와 합리적 국정, 그에 따른 국민의 사랑과 국가 발전은 박 후보가 꿈꾸는 미래로 읽힌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 25살에 즉위해 45년 동안 영국을 통치했다.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헨리 8세의 계비였던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 혐의로 참수된 뒤 왕위 계승에서 제외됐고, 이복 언니의 재위 시절 반란 혐의로 유폐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그는 중용 노선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극단적 대립을 해소하고, 빈민구제법 등 사회복지 정책을 펼쳤으며,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찔러 해상왕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훌륭한 여왕 베스’로 불리며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화가 마르쿠스 헤라르츠가 그린 초상화에는 ‘그녀는 주지만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보복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되갚아줄 경우에 그녀는 권력을 증강시킨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는 또한 동인도회사라는 식민지 수탈의 침략사를 연 절대군주였다.

박 후보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4년 6월 인터뷰에서도 ‘이상적 여성 리더’로 엘리자베스 1세를 꼽았다. 2011년 4월 인터뷰에서는 ‘나보다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있을지 몰라도, 나만큼 백성들을 사랑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라는 엘리자베스 1세의 연설을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는 말과 “저의 삶은 대한민국”(8월20일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이라는 말로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려는 모습에서 박 후보와 롤모델은 닮은꼴이다.

5년 전에는 롤모델이 달랐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나선 당시 박 후보의 롤모델은 영국의 첫 여성 총리,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1925~ )였다. 북한 핵실험 이후 안보 위기가 높아져 이명박 후보에게 전세를 역전당하자 박 후보는 대처를 앞세워 ‘여성 후보 시기상조론’을 희석시키려고 애썼다. 이혜훈 최고위원은 “2007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노동계의 과한 요구로 경제가 발목 잡혔던 대처 시절 상황과 비슷했다. 대처는 강성 노조를 잘 컨트롤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초석을 만들었다”며 “국가의 위기를 강력한 리더십으로 극복했던 여성 지도자라는 측면에서 당시 대처를 이야기했던 것과 지금 엘리자베스 1세를 이야기하는 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시대 상황 변화에 따라 롤모델이 달라졌을 뿐, 여성 후보로서 리더십을 강조하는 의미는 같다는 것이다.

어머나, 그분도 유복한 집안 출신

안철수 원장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을 롤모델로 꼽았는데, 그렇게 밝히게 된 과정이 눈길을 끈다. 그는 7월19일 출간된 대담집 에서 “국내외 정치인 중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 만일 정치를 한다면 누구를 롤모델로 삼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루스벨트라고 답했다. 사전 질문지를 주지 않은 채 진행된 대담이었다. ‘준비된 답변’인 셈이다.

안 원장은 지난해 정치 관련 전문가들과 ‘공부 모임’을 통해 루스벨트 연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책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시대적 과제를 생각할 때 미국 대공황기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네 번 대통령을 연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위기 상황 속에서 뉴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경제를 재건했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죠. 이후 미국이 세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토대를 닦은 대통령입니다”라고 말했다.

공부 모임을 함께 했던 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뉴딜 개혁의 두 가지 핵심은 미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거대 독점체의 폐해를 타파하고, 노동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강화해 자본과 노동이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며 “재벌과 노동의 불균형이 너무나 크고, 그로 인해 거대 자본의 폐해가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 루스벨트 모델은 시대적 과제와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사회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의 기본 바탕을 보여줄 수 있는 롤모델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고 교수는 또 “루스벨트는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원래 래디컬한 성향이 아닌데, 미국이 처한 사회 현실과 대면해 상대를 설득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리더십을 갖췄다. 안 원장과 어울리는 측면이 있다”고 평했다. 안 원장에게 루스벨트라는 롤모델은 ‘시대정신’이자 ‘리더십’이라는 얘기다.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다. 대공황 시절인 1933년 처음 당선돼 세계대전 종전 직전 뇌출혈로 쓰러진 1945년 4월까지 재임했다. 뉴욕주 상원의원, 해군 차관, 민주당 부통령 후보, 뉴욕주지사 등을 거쳤다. 대공황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국민에게 뉴딜 정책을 선언해 대통령에 당선됐고, 단체교섭권 보장 등 노동자 권리 향상에 힘썼다. 1937년 두 번째 취임식에서 “우리가 표방하는 진보는 많이 가진 자들이 풍요를 더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게 가진 자들이 충분히 가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변정담’으로도 유명하다. 한편에선 뉴딜 정책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때문에 경기침체가 극복됐다는 평가도 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극복했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모두 루스벨트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한겨레 강창광, 박종식 사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극복했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모두 루스벨트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한겨레 강창광, 박종식 사진

벨벨트 중심으로 단일화?

문재인 후보가 루스벨트를 롤모델로 삼은 이유도 안 원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 후보는 6월15일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대공황 이후 미국의 진보적 개혁정책을 추진해 복지·공정거래 등 진보적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야당을 설득하는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노변정담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고 동행하는 정책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개혁을 추진했지만 보수 세력과 갈등으로 치달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극복하려는 의지로도 읽힌다. 김경수 공보특보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진보적 정책, 통합과 소통의 리더십이 현재 우리 시대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은 극단적 반목을 거듭하는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나 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통합하고 화합하는 정치문화를 만들라는 게 국민의 요구”라며 “시대적 가치와 요구에 대한 생각이 같다 보니 문 후보와 안 원장의 롤모델도 일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선주자들의 롤모델에 대한 비판과 공방도 뜨겁다. 박보균 대기자는 8월11일치 칼럼에서 “뉴딜은 대공황을 퇴치하지 못했다. 최종 해결사는 전쟁(2차 세계대전 참전)이었다. 안철수의 말은 틀린 것이다. 루스벨트에 대한 안철수의 피상적 이해 수준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뉴딜 정책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진보와 보수가 다르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루스벨트가 뉴딜 개혁으로 노동의 권한을 향상시킴으로써 사회적 역관계를 바꾸었고, 이를 통해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흑인과 이민족 등을 지지 기반으로 만들어 이후 30년 동안 민주당 전성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라며 “이는 상당한 정치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박 후보의 롤모델을 놓고는 여야 당 대표의 설전까지 벌어졌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8월21일 의원총회에서 “여성 대통령 후보를 이렇게 압도적으로, 과감하게 지명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새로운 일인가. 대영제국이 일어날 때, 자리를 잡게 될 때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라는 걸출한 여왕들의 시대가 있었다”고 박 후보를 추어올리자,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8월22일 최고위원회에서 “새누리당은 박근혜를 거의 여왕으로 만드는 대선 레이스에 들어간 것 같다. 이제 우리나라가 봉건왕조 시대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한다”고 퍼부었다.

이명박의 롤모델이 간디? 안창호?

자신의 롤모델로 삼는다고 해서 모든 걸 똑같이 따라하거나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행이론의 신봉자라 해도 그럴 순 없다. 롤모델이 가진 자질과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없다면, 단순히 이미지만 차용하려 했다는 게 들통 나게 마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후보 시절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밝히고 싶지는 않은데, 말하라면 인도의 간디, 국내에서는 안창호씨를 존경한다”고 말해 입길에 올랐다. 대통령이 된 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행’(참되고 성실하게 힘써 실천하자는 사상)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노력을 찾기도 어렵다. 4대강 토목공사를 벌이며 도산의 ‘강산개조론’을 낭독했을 뿐이다. 이런 롤모델 얘기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것만 못하지 않은가. 그게 영국의 절대군주든, 미국 대통령이든 그 누구든.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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