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주화 뒤) 올해 6번째 대선이다. 처음으로 노동자 후보가 없는 꼴을 볼 것 같다. 노동정치의 자멸이다.”
소주를 털어넣는 ㄱ씨의 시선이 건너편 테이블로 향한다. 현대중공업 작업복을 입은 중년 사내 4명이 돼지갈비를 굽고 있다. 6월6일의 울산 밤바람은 아직 서늘하다. 백화점과 술집이 몰려 있는 남구 삼산동도 다르지 않다. ㄱ씨는 1996년에 대학생이 됐다. 학생운동의 휘발성이 다 사라진 시대였다. 낮은 온도에서 추출되는 휘발유는 쉽게 탄다. 경유는 오래 탄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지켜봤다. ‘일하는 보통 사람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경유처럼 서서히 타기 시작했다. 노동이 화두가 됐다. 먼저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80년대 학생운동의 선배들 대부분이 울산을 떠난 2007년 5월, 그는 울산에 내려왔다. 조용히 공장에 취직했고 묵묵히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울산 북구는 될 줄 알았는데.” 그는 통합진보당 당원이 아니지만 울산 동구에 출마했던 통합진보당 이은주 후보를 찍었다.
김창현·이은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져
이튿날 서울 국회에서는 통합진보당 새로나기특별위원회의 3차 토론회가 열렸다. ‘통합진보당과 노동정치’가 주제였다. 김호규 전 금속노조 부위원장, 양성윤 민주노총 부위원장, 조성주 전 청년유니온 팀장 등 6명이 발제자로 토론에 참여했다. 진단은 익숙했고 언어는 낯익었다. ‘노동의 분열’ ‘노동중심성의 강화’ 등이 거론됐다. 울산 현장의 분위기는 회색 활자로 인쇄된 개념어와 추상어로 잘 전달되지 않는다. ㄱ씨는 토론회가 열리는 줄 몰랐다. 시큰둥했다.
울산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의 성지로 여겨진다. 옛 민주노동당도 아직 존재하지 않던 1998년 김창현 전 통합진보당 울산시당 위원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동구청장에 당선됐다. 울산 노동자들이 토대였다. 영국 노동당은 1906년 의회에 진출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890년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세계사의 시계에 비춰 한없이 늦은 한국의 노동정치는 울산에서 뒤늦게 걸음마를 뗐다. 울산 바깥의 진보적 유권자들도 울산 선거 결과에 함께 울고 웃었다. 그랬던 울산에서 4·11 총선 때 진보정당이 망했다. 울산 북구의 김창현 통합진보당 후보, 동구의 이은주 후보가 졌다. 노동자 밀집 지역인 경남 창원의 손석형 통합진보당 후보와 거제의 김한주 진보신당 후보도 패배했다.
통합진보당 토론회를 하루 앞두고 <한겨레21>은 여의도를 벗어나 울산으로 향했다. 주제가 노동정치라면, 그곳에 가야 했다. 6월6~7일 울산 현지에서 통합진보당·진보신당 당직자와 노동운동 활동가 등을 두루 만났다. 패배는 똑같이 쓰라렸지만, 진단은 제각각이었다. 한 가지 분석에는 모두 동의했다. 질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진,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는 사실.
울산 북구와 동구의 패배가 상징적이다. 김창현(50) 전 통합진보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울산 진보정당 운동의 얼굴 가운데 한 명이다. 한편에 통합진보당 조승수(49) 전 의원이 있다면 다른 편에 김창현 전 위원장이 있었다. 김 전 위원장은 지난 4·11 총선 때 3만6482표(득표율 47.62%)를 얻어 4만116표(52.37%)를 얻은 새누리당 박대동 의원에게 패배했다. 선거인 13만2715명 가운데 7만7313명(58%)이 투표했다.
방석수 통합진보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단순한 반MB 연대에 과도하게 기댔다”는 말로 원인 분석을 시작했다. 방 위원장은 그 밖에도 △진보정당으로서 정책 차별화 실패 △대세론에 안주 △통합진보당에 노동자 참여 배제 △후보 선출 과정의 갈등 등을 꼽았다. 방 위원장은 “민노당은 어느 정도 노동중심성이 인정됐는데 통합진보당 통합 과정에서 노동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해 ‘진보정당 맞냐’는 의문이 (울산에서) 제기됐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했다는 반성에 무게가 쏠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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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뭉치고 진보는 지지부진
울산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을 한 이영도(51) 노동인권센터 ‘더불어 숲’ 대표는 통합진보당 울산시당의 패권주의를 먼저 꼽았다. 그는 최근까지 민주노총 울산본부 수석부본부장으로 활동했다. 진보신당 당원이지만 울산 동구에서 통합진보당 후보 선거운동도 했다. 이 대표는 “울산 여론에 영향력이 큰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의 패권주의로 진보신당과의 후보 선출 과정에서 논란이 벌어졌고, 이것이 진보적 유권자들의 실망을 불렀다는 것이다.
울산 북구가 노동정치의 풍향계라면, 북구 안에서는 양정동이 풍향계다. 현대자동차 공장이 거기 있다. 2010년과 2012년 양정동의 투표 추이는 이 대표의 분석과 들어맞는다. 2010년 지방선거 울산 북구청장 선거에서 양정동 유권자 3419명이 민주노동당 윤종오 구청장을 찍었고 1815명이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다. 투표율은 56.6%였다. 울산선거관리위원회의 설명을 종합하면, 지난 4·11 총선 때 김창현 전 위원장은 3421표를 얻었고 새누리당 박대동 의원은 2226표를 얻었다. 2008년엔 양정동에서 한나라당 윤두환 의원이 1487표를 얻었고 민노당 이영희 후보는 2183표를 얻었다. 친박연대 후보는 692표를 얻었다. 2008년 한나라당 득표와 친박연대 득표를 합치면 올해 총선의 새누리당 득표에 육박한다. 진보는 지지부진했고 보수는 뭉쳤다. 이런 ‘양정동 현상’이 울산 전역에서 반복됐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올해 같은 선거에서 북구에서 진 것은 (표 차이에 상관없이) 대패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분열도 패인으로 꼽힌다.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 깊었다. 권진회 진보신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통합진보당은 함께할 수 없는 정당”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의 정서를 무시한 채 노무현 정부 집권세력인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사실을 지적했다. 창원 성산구의 통합진보당 손석형 후보 득표와 진보신당 김창근 후보의 득표를 합치면, 손 후보가 당선됐을 것이다. 새누리당 강기윤 후보가 49.4%를 얻었고 손석형 후보가 43.8%를 얻었다. 김창근 후보는 투표수의 7.1%를 가져갔다.
[%%IMAGE3%%]부·울·경 통진당, ‘통합의 리더십’ 대표 출마?
이영도 대표는 통합진보당이 분열의 책임을 좀더 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울산 북구에서 김창현 전 위원장이 나온다면 동구는 노옥희 전 새진보통합연대 울산대표가 돼야 한다는 게 활동가들의 정서였다. 그런데도 통합진보당이 방석수 위원장 처인 이은주 전 시의원을 임기 도중 사퇴시키면서까지 경선을 추진했고, 결국 노옥희 전 대표가 경선에서 졌다.” 통합진보당 울산시당이 민주통합당 울산시당과 후보 문제를 협상을 통해 풀었듯, 진보신당과 경선이 아닌 협상을 통해 울산 동구 후보를 정해야 했고, 인지도와 헌신성, 능력 등 모든 점에서 노옥희 전 대표가 출마하는 게 옳았다는 취지다. 통합진보당 울산시당이 이런 ‘순리’를 저버리고 당세만 믿고 패권으로 경선을 밀어붙여 활동가들의 실망을 샀다는 이야기다. 이영도 대표는 통합진보당이 이경훈 전 현대차 정규직 노조 지부장을 예비후보로 선택하는 등 ‘운동의 대의’를 저버린 점도 거론했다. 이경훈 전 지부장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비정규직 강연을 가로막은 일화로 유명하다. 이상호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토론회 발제문을 통해 “울산연합의 오만함이 (선거) 패배를 불렀다”며 “창원은 민주노조운동 내 평등파와 자주파 싸움으로 말아먹었다”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 중심의 조직 노동운동이 조직 노동자도 대표하지 못하고 미조직 노동자도 대표하지 못한 죄. 이영도 대표의 선거 평가다. 국회 토론회에서도 거듭 혁신이 언급됐다. 진보적 학자와 운동가들은, 기왕의 지지 기반(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을 다시 굳건히 하되, 새로운 지지 기반(비정규직 노동자)을 확보하라고 주문했다. 학자들의 주장이 대부분 그렇듯, 답은 명쾌한데 해법은 불투명하다.
통합진보당을 둘러싼 이런 논쟁 때문에 더더욱 6월 말 당 대표 선거에 눈길이 쏠린다. 후보등록일이 6월17일이다. 아직 아무것도 명쾌하지 않다.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2006년 이후 민노당의 돈과 자리를 장악해온 광주·전남의 통합진보당 세력이 손잡고 당권파 후보로 오병윤 의원을 밀 것이라는 전망만 유력하다. 비당권파의 여러 세력들은 아직 누구를 내세울지 내부 논의를 하는 수준이다. 이념 지향은 민족해방(NL) 계열이지만 2006년 이후 경기동부연합의 패권주의와 경쟁해온 울산·경남의 통합진보당 세력의 선택이 그래서 주목된다. 울산연합은 이석기 의원 사퇴를 공공연히 주장해왔다. 방 위원장은 “지나친 대립적 국면을 해소할 방안을 고민중”이라고만 말했다. 부산·울산·경남의 통합진보당 세력들이 ‘통합의 리더십’을 슬로건으로 당 대표 후보를 출마시키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김창현 전 위원장은 당 대표 출마를 극구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동부연합이 이석기 의원 제명 안건과 당 대표 선거의 승리를 위해 울산연합과 접촉하고 있다는 추측은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울산시당은 5월 중순 이후 이석기 의원이나 이정희 전 대표와 접촉한 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2012년 노동자 후보 없는 대선되나
진보정당 운동 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역사는 비판적 지지와의 싸움의 역사였다. 최악은 막아야 한다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중 후보나 노동자 후보를 내세운 민노당 지지자들을 역사의 배신자라고 욕했다. 민노당의 역사는 그 비난과의 투쟁의 역사다. 1987년 백기완(중간 사퇴), 1992년 백기완, 1997년 권영길, 2002년 권영길, 2007년 권영길. 울산의 ㄱ씨는 올해 대선의 노동자후보를 아직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IMAGE4%%]울산=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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