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다. 4·11 총선에서 예상을 깬 새누리당의 선전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대선주자로서의 굳건한 입지를 안팎에 각인시켰다.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야권의 지리멸렬이 작용했지만, 새누리당 내부로 보면 온전히 박근혜 위원장의 ‘개인기’가 이뤄낸 승리다.
총선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 위원장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경쟁자들과 격차를 벌리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여당은 이제 ‘친박당’으로 변모했고, 각종 추문 속에 ‘식물 정권’으로 전락한 청와대는 불편한 기색조차 내보이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역대 어떤 대선 후보에게서도 볼 수 없던 강력한 대세론이다. 그렇다면 대세론은 12월 대선까지 유지될까. 단정하기 어렵다. 한편에선 총선 뒤 2주 동안 벌어진 새누리당 내부의 자중지란은 ‘대선주자 박근혜’의 불안 요인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대세론이 잉태하고 있는 ‘박근혜의 리스크’다.
이회창 제왕’ 군림하던 10년 전 연상케 해
지난해 말 여권에서 제기된 박근혜 위원장의 ‘조기등판론’은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를 위한 필승 카드였던 셈이지만, 결국 지나치게 이른 시점에 당이 박 위원장의 ‘1인 독주 체제’로 재편되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의 ‘제왕적 총재’ 구조에 반발해 탈당까지 감행했던 박근혜 위원장이 10년 만에 ‘제왕적 비대위원장’으로 변신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군림하는 지도자 곁에서 직언하는 측근은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치러진 2008년 총선에선 적지 않은 친이계 소장 세력이 원내에 진입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냈다. 정두언·정태근·김성식·남경필 의원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여당 의석 150석 중 80% 이상이 친박 혹은 범친박계로 분류되는 19대 국회에선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친박계 인사가 보이지 않는다.
총선을 통해 비대해진 친박계가 분화하는 양상도 보인다. 언론에 따라 근거리 그룹과 원거리 그룹, 핵심 측근 그룹과 비판적 참모 그룹, 구박과 신박 등 다른 용어로 표현된다. 소계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근혜 위원장의 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하는 핵심 측근 그룹의 중심은 최경환 의원이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박근혜 위원장의 의중을 대변하는 최측근 인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번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친이계 현역 의원의 살생부를 직접 작성한 당사자가 최 의원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 밖에 경제정책 전문가인 이한구 의원과 서병수·유정복·이정현 의원 등이 핵심 측근 그룹으로 분류된다. 친박 ‘매파’다.
반면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유승민·이혜훈·구상찬 의원 등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참모들은 지난해부터 박 위원장과의 심리적·실질적 거리를 체감하고 있다.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부상한 핵심 측근, 특히 최경환 의원이 박근혜 위원장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게 이들의 시각이다. 제수씨 성폭행 미수 논란의 김형태 당선인과 논문 표절로 탈당한 문대성 당선인 등 ‘문제적 인사’들의 공천도 핵심 측근 그룹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유승민 의원은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박근혜 위원장을 만나야 하는데 만나기는커녕 전화 통화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혜훈 의원도 “박 위원장에게 올라가는 보고가 사실과 다르지 않느냐는 게 내 짐작”이라고 했다. 친이계 좌장 역할을 했던 이재오 의원에 견줘 최경환 의원을 ‘최재오’(최경환+이재오)라고 부르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5월15일 전당대회를 불과 20여 일 앞둔 시점에 차기 지도부 구성을 놓고 불거진 분란은 그 발단부터 결말까지 ‘제왕’이 군림하던 10년 전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최근 여당 내부에선 당 대표와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차기 지도부와 19대 국회 국회의장 등이 이미 ‘내정’됐고 그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리스트에는 “국회의장 강창희, 당 대표 황우여, 원내대표 서병수, 정책위의장 이주영, 사무총장 최경환” 등 특정 인사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정치권은 이를 최경환 의원이 작성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IMAGE3%%]친박 매파 ‘인의 장막’ 여전히 견고
파문이 불거지자 박근혜 위원장이 직접 ‘교통정리’에 나섰다. 박 위원장은 4월25일 충북 청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총선이 끝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사실이 아닌 왜곡된 이야기를 지어내서 당 안에서 확대재생산하고 언론 플레이를 해 갈등과 분열로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이러면 또 한 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감한 현안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박 위원장으로선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박 위원장은 “또 잘못하면 용서를 빌 데도 없고 기회를 주십사 이야기할 데도 없다”며 “국민에게 부끄럽고 면목 없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구태’ ‘자멸’ ‘당을 해치는 일’ 등 감정적인 언사까지 구사했다. 말하자면 해당 행위를 중단하라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인 셈이다.
결국 ‘리스트’에서 원내대표 후보로 거론됐고 본인도 출마 의사를 밝혀왔던 서병수 의원이 공개적으로 불출마를 선언해 분란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감정적 앙금은 오히려 증폭되는 모양새다. ‘비둘기파’ 인사들은 표면적으로는 양쪽 모두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박 위원장의 일성과 달리 최경환 의원의 입지는 여전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 친박계 의원은 “박근혜 위원장이 사실상 최경환 의원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른 한 의원은 “최 의원에 대한 박근혜 위원장의 신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위원장을 포위한 친박 매파의 ‘인의 장막’은 여전히 견고하다는 이야기다. 여권 내부에선 서병수 의원의 불출마를 계기로 리스트에 등장하는 다른 당직은 그대로 관철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박 위원장의 날 선 경고 이후 차기 지도부 구성을 둘러싼 논의 자체가 실종된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기 지도부는 사실상 박근혜 위원장과 새누리당의 대선을 책임질 야전사령부다. 하지만 ‘리스트 파문’을 두고 박 위원장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그 누구도 출사표를 던지지 못하고 ‘보스’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는 이야기다.
‘경제민주화’ 등 정책적 차원의 논쟁도 여전히 활화산이다. 매파로 분류되는 이한구 의원은 자신을 “경제민주화의 뜻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판한 김종인 전 비대위원을 ‘그 양반’이라고 지칭하며 날을 세웠다. 유승민·이혜훈 의원 등 비둘기파는 경제민주화 논란과 관련해 김종인 전 비대위원의 견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한구 의원은 “그 양반이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필요가 있다”며 “경제민주화는 추상적인 용어이고 다양한 의견 차이가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김종인 전 비대위원은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도 않다”며 “경제민주화가 어떻게 추상적인 용어냐”라고 재반박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은 논란의 핵으로 떠오른 최경환 의원을 두고도 “박근혜 위원장은 이런 사람과 거리를 두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비난하는 등 친박계 내부의 갈등은 감정싸움으로까지 치닫는 모양새다.
[%%IMAGE4%%]견고한 대세론이 불러온 부작용
몇몇 측근 인사들의 ‘전횡’을 둘러싼 내부 갈등 구조도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논란과 닮았다. 하지만 시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상득·최시중·박영준 등 ‘권력 사유화’의 주체로 지목된 인사들은 대선 국면에서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침묵했다. 대신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버스전용차로 등 진보적 친서민 정책을 도입해 ‘중도층을 아우를 수 있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던 정두언·정태근 의원 등이 전면에서 활약했다. 두 정 의원이 일련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권부의 핵심에서 밀려난 것은 이 대통령의 압도적 대선 승리 이후의 일이다. 이에 비하면 친박 내부의 분화는 너무 일찍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다.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위원장과 경쟁할 만한 내부 인물이 없다는 점도 견고한 대세론이 가져온 부작용으로 꼽힌다. 2008년 대선은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경쟁이 본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갈등과 치열한 난타전이 강력한 흥행 요소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처럼 친이계 또는 비박계 대선주자들이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의 지지율에 머물러 있는 한 2007년과 같은 프레임은 작동하기 어렵다. 오히려 경선 국면에서 유권자의 시선은 야권으로 쏠릴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박 위원장의 벽을 넘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경선 국면에서 상대 후보들의 십자포화가 박 위원장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일단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가장 먼저 출마를 선언한 쪽은 김문수 경기도지사다. 김 지사는 “현재로선 박근혜 위원장이 가장 대통령에 근접해 있지만 과거를 붙들고 있다”며 “지금의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세론에 의해 1인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다. 이회창 때보다 더 심하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특히 김 지사는 최근의 ‘리스트 파문’ 등을 언급하며 “베일 속에 가려진 신비주의적 방식으로 당의 의사 결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박근혜 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은 소통이 안 된다고 이야기하던데 박 위원장은 완전 불통”이라며 “앞으로 (박 위원장이) 청와대에 가면 더 아찔할 것”이라고 도 했다.
김 지사 쪽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박근혜 위원장과 김 지사를 각각 ‘얼음공주’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서민’으로 규정할 것을 제안하는 취지의 홍보 문건은 박 위원장에 대한 김 지사 쪽의 ‘공격 포인트’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해당 문건은 박 위원장의 정치적 이미지를 설명하는 열쇳말로 ‘공주’ ‘귀족’ ‘청와대 영부인 대행’ ‘침묵’ ‘신비주의’ 등을 제시하고 있다. 경기도청은 해당 문건을 이면지로 활용하다 파문을 불렀다.
비박계 주자들 단일화 시도 가능성
이재오 의원도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을 앞두고 당의 구조 자체가 이미 불공정하게 돼 있어 그 후유증이 12월 대선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당이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게 됐다”고 박 위원장의 리더십에 견제구를 던졌다. 이재오 의원은 4월25일 부산을 시작으로 충청과 호남, 수도권 등 전국을 도는 2주간의 민생 탐방 일정을 마친 뒤 5월10일께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는 방침이다. 상대적으로 박 위원장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는 자제하고 있는 정몽준 의원은 ‘국민통합’의 메시지를 골자로 4월29일께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정 의원이 2007년 대선에 나설 당시 창당했던 당의 이름도 ‘국민통합21’이었다. 국무총리에 내정됐지만 ‘스폰서 논란’ 등으로 인사청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김태호 의원도 대선 출마 여부를 가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에선 어떤 형식으로든 여권의 비박계 주자들이 연대해 ‘박근혜 대항마’로의 단일화를 시도할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다. 비박계 주자들은 한목소리로 박근혜 위원장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인물’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동시에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을 골자로 한 ‘경선 룰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당심과 민심을 각각 50%씩 반영하도록 한 현행 룰로는, 게다가 각개약진으로는 승산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 ‘제왕적 총재론’에 반발해 탈당을 감행했던 박 위원장의 이력까지 거론하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김문수 지사는 “박근혜 위원장은 이회창 전 총재가 압도적 대세를 이루던 2002년 경선 룰을 고치자고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었다”며 “그런 자신의 경험과 요구는 다 잊어버린 것 같다”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완전국민경선제 도입 요구에 대해 박근혜 위원장은 “선수가 룰에 맞춰 경기를 하는 것이지, 매번 선수에게 룰을 맞추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일축했다. 친박계 이정현 의원은 “박 위원장이 2002년에 탈당을 한 것은 당권·대권 분리와 50 대 50 국민경선 주장 등 정치 개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 요구가 받아들여져 복당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완전국민경선을 하자는 것은 요행을 바란다는 것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고도 했다. 야권 지지자들이 대거 경선에 참여해 상대적 약체인 비박계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일종의 ‘역선택’을 기대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에서다.
당내 경선 결말은 9할 정도 정해져
비박계 후보들의 연대가 성사된다고 가정해도 어느 정도나 파괴력을 가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한 정치평론가는 “김문수 지사와 이재오·정몽준 의원 등의 출마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라기보다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당내 일각에서 추대론마저 제기되는 마당에 가시권에서 경쟁할 후보군이 없다는 것은 박 위원장과 새누리당으로선 오히려 악재로 작용하는 측면이 크다”고 분석했다. 적어도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 경선이 치러질 8월까지는 결말이 9할 정도는 정해진 드라마라는 이야기다. 그 드라마의 작가, 연출, 주연은 물론 박근혜 위원장의 대세론이다. 그 흥행 성적표에 따른 자산과 부채는 12월 대선에서, 전적으로 박 위원장 본인이 결산할 수밖에 없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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