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한나라당 의원들 수준 아니냐.”
지난 12월14일 한나라당 쇄신파 의원 7명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만난 뒤, 쇄신파와 가까운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쇄신파는 박 전 대표가 맡을 비상대책위원회의 역할에 ‘신당 수준의 재창당’을 명시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바로 하루 전 의원총회에서 쇄신파의 요구와 달리 박근혜계 의원들이 줄지어 “재창당을 못박지 말고, 박근혜 비대위에 전권을 주자”며 세몰이에 나서자, 쇄신파인 정태근·김성식 의원이 탈당까지 선언한 상황이었다. 쇄신파의 추가 탈당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박 전 대표는 쇄신파 일부를 만났다. 1시간30분 남짓 동안 쇄신파는 ‘재창당’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박 전 대표는 “당이 잘못했다고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것은 국민이 눈속임이라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쇄신파는 박 전 대표의 뜻대로 ‘재창당을 뛰어넘는 개혁’에 합의했다. 이 인사의 발언은 이런 움직임을 자조한 것이다. “탈당이라는 신문고를 두드려서 박근혜라는 여왕님을 만나 감읍해하는 한나라당 의원이라는 백성을 보고 있자니 측은지심이 든다”는 김기식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대표의 트위터 멘션과 결이 다르지 않은 얘기였다.
순식간에 각자의 길 간 쇄신파
한나라당 쇄신파는 이렇게 또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만세를 부르고 말았다. 한나라당 소속 보좌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 사이버테러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재창당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탈당도 불사하겠다던 결기를 확인시켜준 이는 정태근·김성식 의원 두 사람뿐이었다.
떠난 자와 남은 자. 한나라당 쇄신파는 왜 이렇게 순식간에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일까. 쇄신파인 수도권의 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의 탈당 등으로) 다급한 쪽은 박 전 대표였다. 이대로 가면 소수지만 쇄신파가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박 전 대표를 만난 뒤 그렇게 돼버렸다. 나도 황당했다.” 그는 쇄신파와 박 전 대표의 만남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 안에선 쇄신파의 ‘변심’을 두고 “탈당하지 않을 명분을 찾으려고 무지하게 노력한 것 같다”고 비꼬았다.
이날 만남에서 어떤 내밀한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적어도 쇄신파의 구성을 보면 이들의 ‘분열’은 예고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쇄신파들은 주로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로, 이명박 정부의 일방적 국정운영을 비판하며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책 대안을 내놓고, 한나라당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박근혜 역할론’을 제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게 전부다. 가치나 정치철학을 공유하는 집단도 아니고, 이명박계와 박근혜계, 중립 성향 의원이 뒤섞인 일종의 ‘연합군’이었다. 그래서 한나라당 안팎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인기도 없고, 영남 의원들처럼 지역적인 지지 기반도 부족하니 이들이 다음 총선에서 살아남으려면 ‘쇄신’ 말고 다른 방도가 있었겠느냐”는 차가운 평가도 존재했다.
이들 사이엔 ‘한나라당은 망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런데 남은 이들과 탈당한 이들은 ‘망하면 우리가 접수해 면모를 일신하자’는 의견과 ‘망한 당은 재생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우리가 한나라당의 적통이 되기는 어렵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의견 차이는 ‘박근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서 비롯된다. 쇄신파의 박근혜계 의원들을 제외하면, 이들 대부분은 박 전 대표가 ‘구시대의 인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나라당에서 미래권력을 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박 전 대표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표가 나서서 당을 쇄신해 재창당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한나라당 해산 수순에 들어갔다”
정태근 의원은 탈당을 선언한 12월13일 “당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라면 의총에 나와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박 전 대표를 비판했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인 박 전 대표는 “박 전 대표가 의총에 참석했다는 자체부터 변화의 시작”(김성태 의원)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다른 의원들과의 수평적 의사소통에 인색했다. 이런 박 전 대표의 권위주의가 “더는 당 내부에서 할 일은 없는 것 같다”는 정 의원의 판단으로 이어진 셈이다.
탈당파와 가까운 여권의 한 인사는 ‘박정희의 딸’에 대한 거부감도 이들의 탈당 결심을 굳히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했다. 그는 “아무리 그래도, ‘대선후보 박근혜’의 당선을 위해 이들이 어떻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김성식·정태근 의원은 독재정권 때 학생운동을 했던 이력이 있다.
남아 있는 쇄신파들도 박 전 대표에게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탈당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시 박 전 대표다. 쇄신파 사정에 밝은 한나라당 관계자는 “새로운 보수 세력을 형성할 수 있어야 탈당이 유의미한 일인데, 한나라당 안에 박 전 대표가 존재하는 한 보수 진영이 해체돼 세력 재편이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며 “더구나 내년 총선에선 야권 전체가 ‘반한나라당’으로 뭉쳐 단일후보를 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분열하면 한나라당도, 탈당한 이들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보수의 재구성’을 이루려면 “내년 대선에선 한나라당이 패배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굳이 지금 탈당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한나라당은 해산 수순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선관위 사이버테러 때문이다. 서울의 한 쇄신파 의원은 “만약 (사이버테러에 쓰인) 돈이 당에서 나왔다면, 이는 위헌정당 해산 사유다. 쇄신이고 뭐고 자진해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의원도 “상식적으로 국회의원 비서들이 그랬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한나라당 의원들이 관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곧 당을 해산하고 재창당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특별한 근거를 대진 않았지만, 자신들도 믿지 못하는 경찰의 수사 결과에 격앙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검찰 수사 등에서 ‘진실’의 일단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다면 쇄신파가 탈당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한나라당이 재편되는 상황에 놓일 거라는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따로 또 같이’의 가능성
물론 탈당파와 잔류 쇄신파는 ‘따로 또 같이’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떠난 김성식 의원은 “만약 우리 결단이 (한나라당 변화의) 작은 물꼬를 틔웠다고 한다면, (당에) 남아서 국민이 바라는 최대한의 쇄신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남은 정두언 의원은 “두 동료 의원의 탈당으로 현재 달라진 건 박 전 대표의 의총 출석과 ‘재창당을 뛰어넘는’이라는 정치적 수사뿐이다. 신뢰를 중시하는 박 전 대표가 국민에게 약속한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과 개혁’을 말 그대로 실천한 것으로 믿고 싶다”며 박 전 대표를 압박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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