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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싸움’ 피해 ‘거수기’로?

비준안 강행 처리 태세인 한나라당과 ‘몸싸움 거부’ 합의한 민주당 보수파… 의회민주주의 알맹이 버리고 껍데기만 중시
등록 2011-11-24 10:38 수정 2020-05-03 04:26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이 표결일까, 합의일까. 한나라당은 11월17일 의원총회를 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조속히 처리”키로 했다. 소속 의원 169명 가운데 90% 가까운 148명이 참석해 7시간 넘게 진행된 의총에서 한나라당은 “처리와 관련해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 절차는 지도부에 일임”하며, “의회민주주의 틀 안에서 여야가 대화와 협력을 통해 원만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조건도 당론으로 확정했다. 그동안 맞서오던 한나라당 내 강경파의 ‘표결 강행’과 협상파의 ‘여야 합의’ 주장이 절충된 결과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형식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여야 합의 처리를 위해 노력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지난 11월17일 오후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여부와 관련해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김진표 민주당 운내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지난 11월17일 오후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여부와 관련해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김진표 민주당 운내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한나라, 11월24일 본회의 처리 시도할 듯

하지만 이 당론은 한나라당의 비준안 단독 표결 강행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비준안을 “조속히 처리”키로 한 것은 “민주당이 변하고 있으니 서둘러 시간을 정할 이유가 없다. 마지막까지 정상적 합의 비준을 위해 노력하자”(정태근 의원)는 협상파 의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의총에서 홍준표 대표는 “민주당 내 강경파의 ‘폭력으로 저지하겠다’는 위협도 이제는 돌파해야 한다”며 강경론을 폈고, 발언자 대부분도 조속한 처리를 주장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11월24일 본회의에서 비준안 처리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안에선 그다음 본회의 예정일인 12월2일 예산안과 함께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지금으로선 ‘조속한 처리’를 강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한나라당의 강경론에 힘이 실린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협정 발효 3개월 뒤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재협상’ 제안을 민주당이 거부하면서다. 민주당이 비준안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상현 의원은 이날 한나라당 의총에서 “한-미 FTA가 반미 FTA로 변질됐다. 민주당이 총선에서의 공천연대를 위한 연결고리로 한-미 FTA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진 의원도 “과거 경험으로 봐도 민주당은 (비준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는다. 의회 헌정 질서 파괴는 절대 용인 못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강행 처리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나라당은 비준안 처리 상임위원회인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외통위)에서 협상파인 김세연·황영철 의원 등을 빼고, 강경파인 안상수·이윤성 의원 등을 투입했다. 특히 김세연 의원은 외통위원 사임과 관련해 사전에 어떤 언질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비준안이 외통위에 상정돼 있기 때문에 ‘절차대로’ 이를 외통위에서 처리할 경우에 대비해 ‘전투력’을 보강한 것이다.

외통위를 거치지 않고 본회의에 바로 직권 상정한 뒤 표결을 강행할 가능성도 높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외통위 전체회의실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는데다 외통위원장인 남경필 의원이 협상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박희태 국회의장은 외통위에서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11월15일 직접 국회를 찾아와 여야 지도부에 비준안 처리를 압박해 부담이 커진 상황이다. 박 의장은 11월17일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 “이 대통령이 강한 의지를 갖고 (미국에) ISD 재협상 요구를 하고, 이를 관철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만큼 민주당의 우려는 불식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선 박 의장이 비준안 직권 상정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내분에 휩싸인 민주당

상황이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는 데는 민주당의 지리멸렬한 태도도 한몫했다. 민주당은 이미 ISD 폐기와 재협상 등이 주요 내용인 ‘10+2’ 재재협상안을 당론으로 정했고, 손학규 대표 등은 내년 총선 때 한-미 FTA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까지 제안했다. 그러나 김진표 원내대표는 당론과 다르게 10월30일 황우여 원내대표와 ‘협정 발효 뒤 한-미 정부 간 ISD 협의’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민주당 내부의 거센 반발로 ‘없던 일’이 됐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똑같은 주장을 ‘해법’으로 내놓는 빌미를 주게 됐다. 민주당은 이 대통령의 제안에 ‘양국 장관급 이상의 ISD 폐기 문서 합의’를 역제안했지만, 한나라당에선 “원내대표끼리 한 합의도 뒤집고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당 지도부가 이렇게 혼란을 자초하는 동안, 몸싸움을 하더라도 당론을 고수해야 한다는 당론파에 반발하는 보수파가 한나라당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박상천·김성곤·강봉균·신낙균 의원은 한나라당 협상파인 주광덕·현기환·황영철·홍정욱 의원과 함께 11월10일 기자회견을 열어 “양국 정부가 협정 발효와 동시에 ISD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약속하면 비준안 처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미 폐기된 원내대표 합의를 이행하라고 당 지도부에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민주당 의원 45명을 상대로 이에 동의하는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다.

김동철·김성곤·정장선 의원은 ‘몸싸움 거부’를 내세워 남경필·홍정욱·황영철 한나라당 의원과 함께 11월15일 ‘6인 협의체’를 꾸렸다. 이들은 비준안 합의 처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성곤 의원은 11월17일 문화방송 라디오 등에서 ‘무기명 비밀투표’를 주장했다. “(이름이 공개되면) 사이버테러를 받고, 지역에서 항의를 받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 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직 양심에 의해 투표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보수파의 움직임을 ‘칭찬’하고 나선 것은 다. 한-미 FTA가 발효될 때 제기될 수 있는 우려를 ‘괴담’으로 전락시킨 는 11월10일 사설을 통해 보수파를 ‘합리파’로 추어올렸다. 바로 아래의 사설은 외통위 점거농성 중인 민주노동당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몸싸움 거부와 협정 처리엔 ‘합리’, 몸싸움을 무릅쓴 협정 반대엔 ‘비합리’와 ‘괴담’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협정 내용엔 눈감은 채 비준안 처리 형식과 절차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형식’에만 집착하는 국회의원들

지난해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한 뒤 황우여 원내대표, 남경필 외통위원장 등은 “이명박 정부의 거수기 노릇은 하지 않겠다”며 앞으로 국회에서 몸싸움을 할 경우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대부분 협상파인 탓에 강경파인 심재철 의원은 의총에서 “황 원내대표와 남 위원장이 몸싸움 안 하겠다는 약속 때문에 할 일을 못한다면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수기 거부’라는 본질은 외면한 채 ‘몸싸움 거부’라는 형식만 남긴 것이다. 한나라당이 ‘합의가 안 되면 단독 표결’을 주장하는 것, 민주당 보수파가 ‘몸싸움 거부’를 명분으로 합의를 주장하는 것도 이렇게 형식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알맹이는 내팽개치고 껍데기만 중시하는 태도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은 비준안 처리에 앞서 한-미 FTA가 민주주의의 본질에 부합하는지, 한국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지를 고심해야 할 때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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