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너무 짧았다. 4·27 재·보궐 선거 승리로 들떠 있던 야권의 분위기는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5월4일 국회를 통과하자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잔칫상을 뒤엎은 장본인은 야권 연대의 가장 큰 수혜자인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다른 야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정부·여당에 비준동의안 처리를 합의해줌으로써 ‘민주당의 야권 연대’는 철저히 ‘선거용’이라는 속내를 드러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박지원, 비준동의안 합의한 결과만 ’통보’
비판 과녁의 정중앙엔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있다. 박 원내대표는 5월2일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등 여·야·정 15인 회의에서 5월4일 국회 본회의를 열어 한-EU 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전제는 농민 피해보상 확대와 기업형 슈퍼마켓(SSM) 입점 규제 강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준동의안은 지난 4월13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이 발표한 ‘야 4당 정책연합 합의문’에서 “비준 저지와 전면적 재검토”를 약속한 사안이다. ‘정책 연대’에 기반을 둔 이 합의문은 재보선을 앞두고 진통을 겪던 야권 연대가 성사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합의 내용 가운데 하나인 비준동의안 처리 문제를 정부·여당과 협상하며 박지원 원내대표는 다른 야당과 별다른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 5월4일에 비준동의안을 처리하기로 했다는 협상 결과를 ‘통보’만 했다.
이와 관련해 박 원내대표는 5월3일 “‘야 4당 정책연합 합의문을 어제서야 봤다”며 “어제서야 (합의문을) 본 것은 제 직무유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의원총회나 최고위원회에서도 이런 논의가 구체적으로 없었다. 합의문은 굉장히 좋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현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제1야당의 원내 정책을 책임지는 원내대표가 야권 연대의 근거가 된 정책연합 합의문을 뒤늦게 봤다며 ‘현실’을 들이미는 것은 변명일까, 실수일까.
게다가 박 원내대표는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도 (협상 결과를 듣고) ‘내용에서는 민주당이 잘했지만, 민주노동당은 원천적으로 FTA를 반대하기 때문에 안 되겠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권영길 원내대표는 이튿날 문화방송 라디오 에서 “(제가 여야 합의문에) 내용적으로 동의를 했다고 그러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저희들이 이야기를 나눈 건 ‘졸속 처리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철저한 검증 절차를 거치고 통상절차법을 만들어 6월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며 박 원내대표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민주당 연대연합특위 위원장인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박 원내대표가 (정부·여당과의) 협상 막바지에 정책연합 합의문을 알게 됐다면, 그 상태에서 협상을 중단하고 당 지도부, 민주노동당 등과 논의를 했어야 한다”며 “야권 연대의 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정부와 합의했으니 (비준동의안 처리를) 그대로 간다는 게 민주당의 정도냐”고 박 원내대표의 일처리 방식을 비판했다.
박 원내대표가 일으킨 파장은 컸다. 비준동의안 처리 합의 소식을 접한 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 소속 의원과 대표들은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당도 8시간에 이르는 마라톤 의원총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다. 결국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는 본회의에 민주당 소속 의원 전원이 불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박 원내대표를 향한 비판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다.
호남 기득권 지키려 야권연대 포기?‘정치 9단’인 박 원내대표가 이런 결과를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민주당 일부에선 “비준동의안 처리에 관한 정치적 긴장감이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풀이가 나온다. 한-미 FTA와 달리 한-EU FTA는 다른 야당이나 시민사회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덜한데다, 피해보상 대책 마련 요구를 정부가 수용했기 때문에 5월4일 처리에 손을 들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야당에선 박 원내대표가 야권 연대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지난 4·27 재보선 때 박 원내대표는 민주당의 전남 순천 무공천 방침에 반대하다 막판에 태도를 바꿨다. 심지어 지난 4월9일엔 김대중 정부 때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무소속 조순용 후보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했다. 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때 청와대에서 정무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개인적 인연 때문일 뿐이라고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다른 야당들은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김선동 민주노동당 당시 후보의 당선을 바라지 않는 민주당의 속내를 박 원내대표가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원내대표가 김선동 후보 지원유세에 나선 건은 선거 나흘 전인 4월23일에서였다.
이 때문에 다른 야당과 시민사회에선 박 원내대표의 이번 행동엔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심까지 나온다. 내년 총선에서 야권 연대를 한다면, 민주당은 ‘호남 기득권’을 양보해야 한다. 그런데 호남은 박 원내대표의 기반이다. 4·27 재보선이야 순천 한 곳에서만 치렀기 때문에 당론에 따라 무공천 카드를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총선에선 호남 지역 전체가 문제가 되므로 차원이 달라진다. 박 원내대표로선 최악의 경우 야권 연대를 포기하더라도 호남 기득권을 지키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의심은 지금의 야권 연대 기반이 허약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야권 연대는 ‘반이명박’을 기치로 삼아 내년 총선 승리와 정권 교체를 명분이자 목표로 내세운다. 이들이 내년 총선·대선에서 이겨야 하는 근거는 바로 정책 연대다. 문제는 이 정책 연대의 내용을 지키려는 노력이 소홀하다는 점이다. 민주당 486 인사 모임인 ‘진보행동’의 우상호 운영위원장은 “지금까지 정책 연대와 후보 단일화 문제를 분리해 접근함으로써 정책 연대의 내용이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 민주당의 경우 정책 연대는 정책위원회가 맡고, ‘게임’(후보 단일화)은 야권연대특위가 맡아서 했는데 양쪽 사이에 공백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이번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처럼 정책 연대라는 근거가 흔들리면 야권 연대엔 정치공학만 남는다.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이 비준동의안 처리 직후 낸 논평에서 “야권 연대는 자리 나눠먹기식의 앙상한 후보 단일화가 아니다. 서민의 이익과 진보적 가치에 기반한 정책 연대야말로 야권 연대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하다”고 지적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런 사정 탓인지 진보신당에선 강경한 기류가 감지된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비준동의안 처리와 관련해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야당 대표회담을 여러 차례 제의했지만, 손 대표 쪽은 ‘복잡한 당내 사정’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승수 대표는 “4·27 재보선 (정책 연대) 합의문 작성 때는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달려왔던 손학규 대표가 이번 비준안 처리 합의와 관련해서는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것을 납득할 수 없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합의로 ‘합의 따로, 행동 따로’라는 민주당의 이중적인 모습을 확인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의 독단적 행태가 이번뿐만이 아니라는 문제의식도 크다. 민주당은 진보신당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해 말까지 주택취득세 50%를 깎아주는 지방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처리를 지난 4월12일 정부와 합의했다. 조승수 대표가 “부자감세로 종부세가 대폭 줄어든 상황에서 취득세마저 감면하면 보유세도, 거래세도 모두 낮추는 것”이라며 직접 민주당에 반대 뜻을 밝혔지만, 민주당 쪽은 “정부가 이미 발표를 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고 답했다. 결국 개정안은 지난 4월 말 국회를 통과했다. 진보신당 관계자는 “야권 연대에 대한 민주당의 진정성이 근본적으로 의심스럽다. 선거 연합해서 집권한 정부가 비정규직법을 개악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느냐”며 “민주당이 다수당이어서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 교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야권 연대의 틀 자체가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민주당 최고위원 8명 가운데 박지원 원내대표를 제외한 7명이 한-EU FTA 비준동의안 처리에 반대한 것은 정책합의를 지켜야 야권 연대가 유지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해석된다. “연대를 한다고 해서 모든 정책이 같을 순 없다”거나 “야권 연대 때문에 민주당이 ‘진보정당 2중대’가 될 순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야권 연대를 파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이인영 최고위원은 “비준동의안 처리로 생긴 정책연합의 위기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연대와 신뢰를 높이는 길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보행동도 5월6일 성명을 내 “(이번 합의는) 명백한 민주당의 잘못으로 다른 야당과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야권 연대의 통합과 진전을 위해서는 더욱더 진정성 있는 정책합의와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야권 연대의 분기점은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가 될 것 같다. 정치권에선 정부·여당이 6월 임시국회에서 비준동의안 처리를 강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는 “아직 한-미 FTA, 최저임금 실현, 비정규직 문제 등 중요한 과제가 많이 남았기 때문에 이번 비준동의안 처리와 관련해선 민주당에 ‘경고’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 더 반복되면 야권 연대의 틀은 유지될 수 없다”며 “6월에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상정된다면 이는 18대 국회가 가장 크게 격돌하는 지점이 될 것이다. 민주당은 공조체제와 정책 연대의 틀을 강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유부단한 손학규 대표에게 남은 시험민주당이 이 시험을 잘 통과할까? 지난해 말 민주당은 한-미 FTA 비준동의안 거부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여전히 협정에 찬성하는 의원이 적지 않은데다, 정부·여당이 외교안보 등의 문제를 들이대거나 단독 처리 등으로 압박하면 민주당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더구나 이번 비준동의안 처리 과정 내내 우유부단한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 손학규 대표가 얼마나 명확한 태도를 보여줄지도 의문이다. 야권 연대는 이제야 출발선에 섰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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