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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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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패율제, 권역별 명부제로 가야

지역구 낙선자 중 득표율 높은 후보 당선시키는 석패율제 논의 활발…

특정 정당 텃밭에서 선전한 경쟁당 후보 당선 가능
등록 2011-03-31 11:40 수정 2020-05-03 04:26

석패율(惜敗率)제도가 정치권의 화두다. 여야 정치권은 현재 이 제도에 대해 큰 이견을 보이지 않아 제도 도입에 걸림돌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나라당은 석패율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왔고, 민주당에서도 당론으로 정해 추진하고 있다.
석패율제도는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중복 출마를 허용하고 지역구에서 탈락한 후보 일부를 석패율에 따라 비례대표로 당선시키는 제도다. 현행 비례대표 선출 방식은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 명단과 당선 순위를 정하고, 정당이 획득한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후보를 당선시키는 방식이다. 석패율제도는 이런 비례대표 선출 방식에 일부 석패율을 적용해 당선인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석패율은 낙선자의 득표수를 당선자의 득표수로 나눠 100을 곱한 값이다. 예컨대 A지역구에서 갑 후보가 5만 표로 당선되고 을 후보가 4만 표로 낙선했다면 을 후보의 석패율은 80%(4만÷5만×100)가 된다.

석패율 운영 국가 일본이 유일

석패율제도는 전세계에서 일본이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독일의 중복입후보제를 모델로 하여 1994년 이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은 중의원 선거에서 300명은 지역구에서, 180명은 비례대표로 선출한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 180명 중 107명이, 2009년 선거에서는 100명이 석패율로 당선됐다.
석패율제도 도입 추진의 취지는 한국 선거의 고질적 문제점인 지역주의 해소에 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도 특정 지역에 지지 기반을 가진 정당이 의석을 독점하는 지역주의가 반복됐다. 영남권 67석 중 46석을 한나라당이 확보한 반면, 민주당은 부산과 경남에서 1석씩을 얻는 데 그쳤다. 반대로 호남권 31석 중 민주당은 25석을 차지한 반면 한나라당은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석패율제는 이런 극심한 의석 편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논의되고 있다. 즉, 한나라당 후보가 호남 지역구에서 낙선하더라도 석패율제도를 통해 비례대표로 당선되면 지역주의를 깰 수 있는 발판이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정치관계법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 이 사안이야말로 주권자인 국민과의 쌍방향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한겨레 탁기형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정치관계법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 이 사안이야말로 주권자인 국민과의 쌍방향 의사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한겨레 탁기형

석패율제도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전국명부 비례제에서도 적용될 수 있고, 독일과 일본이 사용하는 권역별 비례제 방식과도 결합할 수 있다. 최근 선관위가 내놓은 선거법 개정안은 전국명부 비례제에서 석패율제도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전국명부 비례제와 권역별 비례제의 차이는 비례대표 명부를 어느 단위에서 작성하는지에 있다.

전국명부 비례제는 말 그대로 전국을 단위로 비례명부를 작성하는 반면, 권역별 비례제는 권역마다 독자적인 명부를 작성해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전국명부로 당선된 사람은 전국 대표성을 가지고, 권역명부로 당선된 사람은 권역 대표성을 지니게 된다. 석패율제도가 지역주의 완화라는 효과를 보이려면 석패율로 당선된 후보가 자신이 낙선한 지역의 대표성을 띨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역구 선거에서 낙선하고 전국명부로 당선된 의원이 해당 권역의 대표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전국명부로 당선된 비례대표는 전국을 대표하기 때문에 특정 권역만을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다. 전국명부로 당선된 후보가 특정 지역구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 중 득표율이 높아 비례대표로 당선됐다는 이유로 그 지역에서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석패율로 당선된 의원이 국회에서 해당 권역의 대표로서 정체성을 갖고, 또 그렇게 인식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권역 선거구 신설해야 지역주의 해소 가능

사실 권역별로 독자명부를 작성하고 석패율에 따라 권역비례대표를 선출한다면 대표성 문제는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권역별 비례제하에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상대 지역에서 비례대표를 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나라당 득표율이 호남권에서 10%에 못 미치는 현실을 고려할 때 권역별 비례제하에서 석패율제도는 의미 없게 된다.

석패율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지역구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없는 후보도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 있기 때문에 선거 경쟁이 활발해지고 정당 지지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효과는 독일같이 정당 득표가 의석 배분의 일차적 기준이 되는 선거제도를 운영하는 국가의 경우에 가능하다.

독일식 선거제도는 정당 득표가 많을수록 해당 권역명부의 비례의석이 그만큼 늘어나는 방식이다. 정당 지지가 비례의석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변수가 되기 때문에 후보의 선거 경쟁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처럼 정당 득표로 전체 의석이 정해지지 않고 고정된 비례의석수만을 선출하는 방식에서는 정당 지지를 추동하는 유인으로 작용하기 어렵다. 더욱이 정당 투표로 결정되는 비례의석수가 전체 의석의 18%인 54석에 불과하고, 그것도 비례의석 배분이 정당의 전국 득표율로 결정되는 전국명부 비례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석패율제도가 정당 후보 선정의 권한과 재량을 폭넓게 인정한다는 점에서 정당 본위의 선거와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당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물보다는 전략적 고려에 의해서만 후보 추천과 명부 순위가 결정된다면 폐쇄적인 소수 계파 중심의 정당 구조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석패율 적용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 유권자의 참여를 허용하는 방안을 제도화해야 한다. 현행 비례대표 선거에서 채택하고 있는 ‘폐쇄형 명부제’ 대신, 후보 명부 순위 결정에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개방형 명부제’ 도입을 검토해볼 만하다. 이처럼 정당의 개방성을 높이는 것은 석패율제 도입으로 인한 정당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완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석패율제도가 지역주의 완화 효과를 보이려면 권역비례대표 선거구 개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현행 선거구제는 지역구에서 소선거구 방식으로 245석, 전국명부 비례대표로 54석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전국비례대표’의 혼합선거구 방식이다. 여기에 별도의 권역비례대표 선거구를 추가해 ‘소선거구+전국비례대표+권역비례대표’의 3개 선거구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즉 소선거구와 전국비례대표는 기존 방식으로 선출하되, 석패율 적용을 전국명부가 아닌 권역명부로 하여 부활 당선자를 권역 비례대표 선거구에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부활 당선자를 전국비례대표가 아닌 권역대표로서 정체성을 갖도록 제도화하고, 기존 전국비례대표가 갖는 직능대표, 정치적 소수의 대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전체 비례의석수 늘려 보완해야

권역선거구라는 별도의 비례대표 선거구를 둔다고 해서 현행 선거제도가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전체 비례의석 중 일정 수의 의석을 권역선거구로 할당하면 된다. 다만, 이 방식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비례의석을 증원해야 한다. 현행 비례의석 규모만으로는 권역별 정당 득표율로 배분되는 비례의석은 지역패권 정당에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전체 비례의석수를 100석 정도로 늘려야 그중 권역명부로 정해지는 비례의석이 경쟁 정당에도 돌아갈 수 있다.

김종갑 국회입법조사처 선거담당 입법조사관·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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