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4월27일 치르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은 공천과 선거 연합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지만 울산 동구청장 선거 준비는 제법 속도를 내고 있다. 이번 재선거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정천석 전 구청장의 공천을 한나라당이 무리하게 강행해 낳은 결과다. 민주당을 거친 정 전 구청장은 2006년 무소속으로 당선됐다가 200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한 울산 지역 일간지가 실시한 지방선거 여론조사 비용 명목으로 언론사에 500만원을 건넨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한나라당은 지역 시민단체 등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의 공천을 강행했고, 정 전 구청장은 1999표 차이로 김종훈 민주노동당 후보를 힘겹게 따돌렸다. 하지만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이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확정돼 결국 당선무효가 됐다.
재선거에 책임 있는 한나라당은 지난 3월14일 임명숙 전 울산시 복지여성국장을 후보로 확정했다.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은 줄다리기 끝에 3월23일 ‘야 4당 선거연대 합의’를 통해 김종훈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를 단일후보로 확정했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 공천 결과에 반발한 천기옥 전 울산 동구의회 의장과 ‘야 4당 선거연대’에 반대하는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각각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겉으로는 선거 구도가 ‘한나라당 계열 후보 2명’과 ‘야권 후보 2명’으로 짜이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당과의 연대 반대”
공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해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건 익히 봐온 장면이라 치더라도, 야권 연대·연합이 ‘대세’인 지금 이갑용 전 위원장의 무소속 출마 강행은 어찌된 일일까? 이 전 위원장의 출마 선언을 지켜보는 야 4당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판이 잘 정리되고 있는데 왜 갑자기 툭 튀어나와 ‘고춧가루’를 뿌리느냐는 식이다.
이 전 위원장은 “야 4당이 단일화를 추진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 반대하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고민을 했다. 누군가 나서서 막아야 하는데, 논의 끝에 결국 내가 나서게 된 것”이라며 “후보 등록일은 4월12일이고, 나는 그 전에 이미 출마할 뜻을 밝혔는데 왜 갑자기 이러느냐는 건 민주노동당 등의 폭력”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전국적으로 선거 연합이 논의되는데, 비정규직법을 만들고 정리해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등 신자유주의를 이끈 민주당에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야합엔 동의할 수 없다. 이번 재보선에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내년 총선·대선에선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운동은 없어지고, 권력을 잡기 위한 야합만 남는다”고 출마 이유를 밝혔다.
복잡하고 곡절 많은 울산 동구청장 선거의 역사를 보면, 이 전 위원장의 출마에 다른 배경이 짐작된다. 지방선거를 처음 민선으로 치른 1998년,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위원장이 구청장에 당선됐다. 하지만 취임 한 달 만에 김대중 정부의 첫 공안사건인 ‘반제청년동맹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김 전 구청장이 구속됐다. 이듬해 보궐선거에선 그의 부인 이영순 전 의원이 ‘설욕전’에 성공해 당시 전국에서 유일한 여성 지방자치단체장이 됐다.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선 이영순 구청장이 재도전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당내 역학 구도 등으로 인해 민주노동당 후보는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출신 이갑용 전 위원장으로 결정됐다. 동구청장에 당선된 그는 2004년 11월 전국공무원노조 총파업 참여 공무원을 징계하라는 행정자치부의 지침을 어겨, ‘직무유기’로 이듬해 울산지법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직무정지를 당했다. 구청장 때 주민참여예산조례를 만드는 등 의욕적으로 일했던 그로선, 정치적 이유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한’이 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민주노총은 김종훈 후보 지지정파가 다른 김창현 위원장과 껄끄러운 관계가 무소속 출마의 한 이유라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노동당 관계자의 얘기는 이랬다. “울산 동구는 원래 자주파(NL)인 김 위원장과 이영순 전 의원의 정치적 기반인데, 이 전 의원의 구청장 연임을 당내 평등파(PD)가 반대하면서 당선된 사람이 이갑용 전 위원장이었다. 당선 뒤 당 조직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서 김 위원장과 불편해졌는데, 이 전 위원장을 뒷받침해준 현대중공업 노조가 ‘자판기 비리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 이 전 위원장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번에 야 4당 단일후보로 확정된 김종훈 예비후보도 김 위원장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이 전 위원장으로선 단일화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 위원장의 ‘파괴력’은 얼마나 될까? 지난 3월10일 민주노동당이 ‘임의번호걸기’(Random Digit Dialing) 방식으로 동구 주민 495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김종훈 후보는 30.3%의 지지율로 2위인 임명숙 한나라당 후보(26.9%)를 근소하게 앞섰다. 이 전 위원장의 지지율은 10.5%에 그쳤다. 임의번호걸기는 KT 전화번호부에 등재되지 않은 가구의 전화번호까지 무작위로 추출해 여론조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정확성이 좀더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조사는 천기옥 전 동구의회 의장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기 전에 나온 결과다. 이 때문에 야 4당은 김종훈 후보가 비교적 유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으리라 내다본다. 천 전 의장이 직전까지 한나라당 동구 지역의 조직책이었던데다, 이 지역에 영향력이 큰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와 가까워 임명숙 한나라당 후보 표를 잠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전 위원장은 정당 등의 조직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의 지지율을 반등시키기는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노총은 3월24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김종훈 후보를 울산 동구청장 재선거의 ‘민주노총 지지후보’로 확정했다. 이에 앞서 이 전 위원장은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 자신을 ‘민주노총 후보’로 결정해달라고 요구했다가 민주노동당 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민주노총 후보와 지지후보는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선거를 지원하는 후보라는 의미로, 지난 지방선거 때도 야권 연대를 뒷받침하는 주요한 힘 가운데 하나였다. 이와 관련해 이 전 위원장은 “내가 민주노총 조합원이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요구 아니냐”며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를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잡으면서 횡포를 부린 건데, 조합원 80만 명 중에 당원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하부 조직이냐”고 비판했다.
이갑용 후보 “끝까지 완주”김종훈 후보는 “이 전 위원장 출마로 (지지자들 사이에) 약간의 혼란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며 “울산 동구는 노동운동의 시발점이자 진보정치의 출발점인데, (이 전 위원장의 무소속 출마가)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이 들게 할지 고민이 된다. 대의와 노조(민주노총)의 요구에 이 전 위원장이 따라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등으로선 4·27 선거의 ‘반이명박 연대’가 내년 총선·대선에서 진보개혁 진영이 이길 밑돌을 놓는 중요한 일인데, 이를 이 전 위원장이 명분 없는 ‘묻지마 연합’으로 몰아가면서 자신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한 불만이 깔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전 위원장은 “후보 사퇴도, (김종훈 후보와의) 단일화도 없다. 끝까지 완주하겠다”고 강조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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