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한 번 물러서면 그를 감추기 위해 두 번 물러서게 되고, 그다음엔 갈지자로 엉망이 된 자기 발자국 속에서 처음에 어디로 가고자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요.”
주인공 김윤희가 노론 영수인 좌의정 이정무에게 한 얘기다. 노론의 정적이던 김윤희의 아버지는 10년 전 이정무의 핵심 측근 하우규의 사주로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정무는 하우규의 죄를 눈감아주고,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는 일을 거들었다. 김윤희가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자, 이정무는 마치 자신은 그 사건과 무관한 듯 “나를 원망했느냐”고 묻고, 김윤희는 “(당신의 행동을) 경계로 삼겠다”며 이렇게 답한다.
지금 이 대사를 귀기울여 들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이명박 대통령이 아닐까. 민간인 불법사찰과 ‘대포폰 게이트’의 몸통이 청와 대 혹은 여권 실세라는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됐다.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를 불법사찰한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 말고 또다른 ‘사찰의 축’이 청와대 안에 존재했다는 내용이다.
부하 직원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 이유
이석현 민주당 의원은 11월17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이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으로 일하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박영준 비서관 밑에서 일하던 이창화 전 행정관이 김성호 당시 국정원장 등을 사찰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 행정관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국정원에서 일하다 청와대로 파견됐고, 2008년 9월 다시 국무총리실로 파견됐다가 2009년 3월 국정원으로 되돌아갔다. 이 전 행정관이 기획조정비서관실에서 일하게 된 건 이례적이다. 통상적으로 국정원 파견자는 사정 업무를 담당하는 민정수석실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박 차관은 이 전 행정관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다. “(이 전 행정관이) 박영준 차관의 인맥이라는 (보도의)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신청인(박영준 차관)은 그와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나 업무에 있어서나 아무런 관계도 없다.” 박 차관이 보도(817호 줌인 ‘박영준 사조직의 민간인 사찰 의혹’)와 관련해 지난 8월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 청구를 하면서 낸 의견서다. 자기 밑에서 일하던 행정관을 “업무에 있어서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거짓말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 전 행정관이 박 차장과 갈등 관계인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뒷조사를 한 것이 정 의원 쪽에 알려져 청와대 근무를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와 관련해 이석현 의원이 의혹을 제기한 이 전 행정관의 사찰 시기와 대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의원은 이 전 행정관이 김성호 전 국정원장을 비롯해 정두언·정태근 의원의 부인, 이재오 의원 쪽과 가까운 전옥현 전 국정원 1차장의 부인 등을 사찰했다며 구체적인 정황까지 공개했다. 사찰이 이뤄진 시기는 대부분 박영준 차관이 청와대를 그만두기 전인 2008년 4~5월이다. 또한 이재오 의원과 정두언·정태근 의원은, 박 차관이 보좌관 신분으로 10년 가까이 ‘모신’ 이상득 의원의 18대 총선 공천에 거세게 반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약 이석현 의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전 행정관의 직속 상관이던 박 차관은 ‘청와대의 사찰’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생긴다. 5급에 불과한 행정관이 이명박 대통령 측근 등을 광범위하게 사찰하면서 이를 상관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득 의원의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박 차관이, 이 의원 공천을 반대한 정 의원 등을 압박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박 차관이 이 전 행정관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한 것은 이런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고 싶어서였을까?
‘형제’를 위해 일한 박영준 차관?어쨌거나 이 전 행정관이 자신의 부인을 사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두언 의원은 이상득 의원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박 차관이 연루됐다고 본 것이다. 당시 이상득 의원은 “내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박 차관을) 어쩌란 말이냐”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이 전 행정관은 국정원으로 복귀하려 했지만, 김성호 당시 국정원장이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원장 역시 이 전 행정관이 자신을 사찰한 것을 알고 불쾌해했고, 청와대 고위 인사와 조율해 그를 총리실로 보냈다는 게 여권 인사들의 얘기다.
그런데 총리실 안에서 이 전 행정관이 속했던 부서를 놓고 말들이 엇갈린다. 총리실은 그가 정보관리비서관실에서 5급 사무관으로 근무했다고 밝혔다. 박 차관도 앞서 언급한 언론중재위 의견서에 “(이 전 행정관은) 지원관실에서 근무한 적이 없다”고 썼다. 그런데 이석현 의원은 그가 지원관실에서 근무했다고 주장한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안팎의 여러 인사들도 “실제론 지원관실에서 일했다”고 말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가능성은 두 가지다. 문서상으로만 정보관리비서관실에 적을 두고, 실제 업무는 지원관실 일을 했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보관리비서관실도 지원관실과 비슷한 일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대구 출신인 김아무개 당시 정보관리비서관은 박영준 차관과 가까운 사이로, 권한 이상으로 정보를 수집해 박 차관에게 ‘비선 보고’를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산 바 있다.
한편,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의 ‘출국 공작설’을 제기했다. 불법사찰과 ‘대포폰 게이트’의 또 다른 윗선으로 지목받는 이 전 비서관을 ‘도피’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11월18일 에 “‘누군가’ 이 전 비서관을 출국시키려 하지만, 이 전 비서관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처럼 일단 나가면 못 들어온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의 말대로라면, 여야를 막론하고 들끓는 불법사찰·증거인멸 진상 규명 요구를 피해가려는 세력이 존재하며, 이들이 이 전 비서관의 ‘입’을 틀어막아 ‘진짜 윗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속하고 있다는 시나리오가 된다.
민주당·자유선진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 소속 의원 111명은 11월19일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불법사찰 등 대포폰 게이트 및 그랜저 스폰서 검사 사건의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을 공동 발의했다. 특검법안은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 수사 대상으로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실의 불법사찰’을 명시해, 이창화 전 행정관의 불법사찰과 박영준 차관의 관련 가능성을 열어뒀다. 또한 △지원관실의 불법 민간인 사찰 △지원관실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훼손과 청와대의 대포폰 지급 등 불법사찰 은폐 사건도 수사 대상으로 못박았다. 법안만 놓고 보자면, 대포폰을 지급한 최아무개 행정관은 물론 지원관실 설치·운영을 주도한 ‘윗선’으로 지목받는 이영호 전 비서관, 박영준 차관 등도 수사선상에 오른다. 야당은 특검법안 발의에 앞서 국정조사 요구서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청와대 “야당이 번지수 잘못 찾았다”하지만 한나라당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 “이미 검찰에서 수사를 한 사건이기 때문에 국정조사와 특검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는 이에 앞서 연 기자간담회에서도 “국정조사는 할 생각이 없다. 이 문제로 야당이 예산 심의를 보이콧하는 것은 절대 수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지금 구속된 사람(이인규 전 지원관 등)이 자기 선에서 모든 걸 다 했다고 하는데 재수사를 해봐야 나올 게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다만 한나라당 안에서도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재수사 요구를 의식한 탓인지 “국민적 감정은 뭔가 석연치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좀더 고민해보겠다”며 여운을 남겼다.
청와대는 매우 강경한 태도다. 민주당 소속 의원 51명이 불법사찰 등과 관련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청와대에 전달한 직후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당의 주장과 요구는 국회와 사법 당국 관련 사항으로, (질의서를 청와대에 전달한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다.” 재수사든 특검이든 국정조사든, 불법사찰·증거인멸과 관련한 ‘진상 규명’ 요구 자체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태도는 한나라당 안에서도 번지는 ‘불법사찰의 몸통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우려에 맥이 닿는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여러 인사들은 “대통령이 불법사찰 관련 내용을 박영준 차관, 이영호 전 비서관에게 직접 보고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이 청와대나 지원관실에서 행해진 불법사찰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 차관과 이 전 비서관을 수사할 경우, 이들이 가만히 있겠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구나 수사를 새로 하게 되면 검찰로선 뭐라도 새로운 성과를 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상처를 입고 본격적인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재수사 찬성 59.2% vs 반대 15.3%하지만 여론은 청와대의 태도를 수긍하지 않는 것 같다. 지난 11월13일 청와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대포폰 의혹 등의 재수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에 앞서 리얼미터가 11월12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선 불법사찰을 재수사해야 한다는 답변이 59.2%나 됐다. 반대 의견은 15.3%에 불과했다.
갈지자로 엉망이 된 자기 발자국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답은 하나다. 물러섰던 발자국을 깨끗이 지우면 길은 다시 열린다. 지금 여론은 이 대통령이 이 답을 선택할지 지켜보고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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