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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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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우원식, 일흔의 북녘 누이를 만나다



아흔여섯 살 노모를 모시고 뜻밖의 이산가족 상봉…

전 민주당 의원이 몸으로 겪은 이산의 아픔
등록 2010-11-18 11:14 수정 2020-05-03 04:26

우원식 전 민주당 의원은 최근 이산가족이 됐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수십 년간 ‘관념적 이산가족’으로 살아왔는데 지난 10월29일 금강산에서 북의 누이를 만나고 나서야 ‘실존적 이산가족’이 됐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분단 체제가 굳어진 이후인 1957년에 태어났다. 북에서 남쪽의 가족을 찾은 누이 정혜씨는, 누이인데도 일흔이 넘어 있었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북에 두고 온 누이들이 보고 싶을 때면 임진각에 가시곤 했어요. 우리도 이산가족이구나 생각은 했지만 느낄 기회가 없었죠. 올해 아흔여섯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누이를 만난 뒤 몸으로 깨달았어요.”
 
17번의 실패 끝에 얻은 행운

우원식 전 민주당 의원(왼쪽 서 있는 이)의 가족이 11월1일 ‘이별 상봉’을 하고 있다. 가운데 한복을 입은 이가 누이 우정혜씨, 고개 숙인 백발의 노모가 김례정님이다(왼 쪽). 사진공동취재단

우원식 전 민주당 의원(왼쪽 서 있는 이)의 가족이 11월1일 ‘이별 상봉’을 하고 있다. 가운데 한복을 입은 이가 누이 우정혜씨, 고개 숙인 백발의 노모가 김례정님이다(왼 쪽). 사진공동취재단

그동안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모두 열일곱 차례. 우 전 의원의 모친은 1985년부터 매번 북의 두 딸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신청했다. 하지만 만나려는 가족은 많은 반면, 상봉 가족 수는 제한돼 있어 기회가 닿지 않았다. 지쳐서 포기할 즈음 북쪽에 남겨놓고 온 딸이 남쪽의 가족을 찾은 것이다. 정혜씨는 고령인 부모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형제자매를 찾았다. 우 전 의원의 가족은 깜짝 놀랐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상봉 행사가 있었잖아요. 어머니가 워낙 고령이셔서 솔직히 이재정·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나 ‘빽’을 써볼까 싶었어요. 그런데 컴퓨터 추첨 방식이어서 운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도 안 됐는데 남북관계가 이 모양인 이명박 정부에서 나한테 그런 기회가 오겠나 싶어서 아무 기대를 하지 않았거든요.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거죠.”

막상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모친은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지만 최근 5년가량 집 문 밖을 나선 적이 없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부담스러운 금강산을 오가는 길도, 수십 년 떨어져 살아온 딸을 만난 이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도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모친 김례정님은 단호했다.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오래 살았나 보다. 가는 길에 죽더라도 나는 갈란다.”

막상 길을 나섰지만 경기도 일산에서 강원도 춘천과 인제를 거쳐 미시령을 넘는 동안 여러 차례 쉬어야 했다. 우 전 의원은 “상봉 가족들이 모인 설악산 하나콘도에 도착하자 저렇게 기력이 왕성하셨나 싶을 정도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어요. ‘원식아, 정말 가나 보다. 정말 만날 수 있나 보다’ 말씀하셨어요. 다른 이산가족들을 만나고 취재하는 기자들도 보니 실감이 나셨던 거지요.”

이산가족 상봉 가운데 최고령자, 그리고 유일한 모녀 상봉이어서 우 전 의원의 모친에게 남북 양쪽의 이목이 쏠렸다. 우 전 의원은 “‘국민 여동생’이 있으면 ‘국민 어머니’도 있을 수 있잖아요. 스타가 된 어머니 덕 좀 봤어요. 가을에 지역구(서울 노원을) 행사가 많은데 ‘텔레비전 보셨지요? 그분이 제 어머닙니다’ 하면 많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국민 모친’ 김례정님은 일흔 넘은 딸이 자랑 삼아 내놓은 훈장을 보면서 “그래, 잘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또 했다. 숙소에서 가족끼리만 오붓하게 만나던 개별 상봉 때, 노모는 늙은 딸에게 반지 하나를 건넸다.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반지다. 관 속에 들어갈 때 내 입속에 넣어서 가져가려고 했는데 너한테 주고 싶구나.” 모녀가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마른 눈물로 보낸 일흔의 딸
어머니 김례정님의 젊은 시절 사진. 앉아 있는 이가 아버지 우제화, 학생은 삼촌 우제순이고 아이가 큰아들 우영식이다.

어머니 김례정님의 젊은 시절 사진. 앉아 있는 이가 아버지 우제화, 학생은 삼촌 우제순이고 아이가 큰아들 우영식이다.

1박2일, 밥 자리를 빼면 2시간씩 세 번의 만남. 훌쩍 지나가버렸다. 상봉을 신청한 쪽은 당사자만, 신청을 받은 가족은 5명만 만날 수 있는 규칙은 누가 만들었을까. 우 전 의원은 9남매다. 이 가운데 어머니를 포함해 6명만 머리를 맞대고 앉았으니, 헤어진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60년 사이의 그 많은 사람과 그 많은 일을 얘기하기에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10월30일 이별 상봉. 이별과 상봉의 어색한 조합. 60년을 헤어져 살고 겨우 한나절 만났다. 상봉 가족들은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지만, 진심으로 살아서 그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 전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노모는 자식들을 끌어안으면서 남은 눈물을 쏟았다. 몸의 습기가 다 빠져나가버린 듯 마른 울음을 울었다. 우 전 의원은 참혹했고 잔인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우리 가족이 뭘 잘못했습니까? 이산가족이 큰 죄를 지었나요? 그 가족들이 선택한 것도 아닌데 개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잔인하고 참혹한 고통 아닌가요?”

그 질문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역사? 외세? 그 시대의 못난 위정자? 우 전 의원은 남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리고 금강산에서 누이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 한동안 어머니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었다고 한다.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10년 동안 두 번의 민주정부에 참여한 일원으로 겨우 이 정도밖에 하지 못했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념에서 실존적 이산가족으로 바뀐 지난 한 달가량의 경험은 우 전 의원을 바꿔놓았다. 남북 문제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금강산을 가기 전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얘기했어요. 한국자유총연맹도 가고 대한민국재향군인회도 가고. 예전 같았으면 ‘이북에 가족이 있어? 빨갱이 가족 아냐?’ 이런 소리 나왔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보수 단체나 진보개혁 단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들 ‘잘됐다, 축하한다’고 하시는 걸 보면서 남북 문제, 분단 극복 문제의 출발점은 여기구나 깨닫게 됐지요.”

 

분단 체제 극복 고민 깊어져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서 부모와 자식 세대의 만남은 우 전 의원 가족을 포함해 단 두 가족이었다. 분단 1세대가 별로 남지 않은 것이다. 분단이 지속되면 피는 점점 옅어지고 차차 남남이 된다. 우 전 의원은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 화상 통화, 면회소 상시 개방 등 이산가족의 숙원사업을 포함해 평화 정착과 분단 체제 극복이라는 근본 문제까지 깊숙이 공부하고 있다.

“사실 남북 간 체제 경쟁은 끝났잖아요. 남은 것은 먹고사는 문젭니다. 지구에 남은 단 하나의 분단국가, 남북의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국민과 인민의 삶이 고달프잖아요. 북도 문제지만 우리 사회도 경제적 활로를 위해 분단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생각은 쉽다. 말도 쉽다. 하지만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갑갑하다. 선거에서 떨어진 전직 의원에게 세상은 버겁다. 정치인이어서 인터뷰는 정치로 끝났다. 그는 2012년 여의도 국회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때는 예전의 우원식이 아닐 거라면서.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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