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한다면서 세금을 축내는 이들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부류가 국회의원과 공무원이다. 막상 곁에서 지켜보면 실제보다 과장된 얘기다. 그런 비판과 비아냥을 들어도 싼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국회와 정부 청사, 각종 공기업 사무실의 불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시기가 있다. 가을 정기국회, 특히 국정감사 기간이다. 짝수 달에는 임시국회를 자동 개회하고 행정부의 현안 보고가 잦아지면서 사실상 상시 국정감사 체제로 바뀌어 예전보다 주목도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든 국정 현안과 이슈를 집약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국정감사는 여전히 정기국회의 꽃이다.
지난 10월4일 시작된 국정감사가 10월23일 막을 내렸다. 은 829호 정치 ‘서민을 위한 여야 충돌?’ 기사에서 이번 국감에서 주목해야 할 이슈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 절반 이상이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난 4대강 사업을 포함해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문제로 불거진 ‘현대판 음서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벌어진 민간인 불법 사찰 △정부·여당은 종결을 선언했으나 여전히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천안함 침몰 사고 △조현오 경찰청장과 이인규 전 대검 중앙수사부장의 발언으로 촉발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 의혹 등이다. 각 사안들은 올해 초부터 이 표지이야기로 주요하게 다뤄온 이슈와도 일치한다.
‘고위 공무원 자녀 채용 현황’ 이름 빼고 제출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해소되지 못했다. 4대강 공사와 관련해서는 금강 구간에서 공사 승인 허가에 필요한 절차를 빠뜨리고도 서류상에 허위로 기재해 불법으로 시공한 사례가 드러나는가 하면, 정부가 줄곧 부인해온 운하사업의 정황이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속도전’을 막을 만한 파괴력은 없었다. 민간인 사찰에 관여해 구속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이 법정에서 청와대에 정기적으로 보고를 했다고 진술했고, 부하 직원인 원아무개씨 수첩에서 청와대(Blue House)를 뜻하는 영문 알파벳이 등장하는 메모(‘BH 지시사항’)가 발견됐지만, 국감장에서 사찰과 증거인멸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윗선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천안함의 진실 역시 아직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
국감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해당 정부 부처가 자료를 부실하게 제출하거나 여야 합의로 채택된 주요 증인들이 국감 출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는 남경필 위원장을 비롯해 여러 위원이 ‘전·현직 외교관 및 정부 고위 부처 공무원 자녀의 채용 현황과 보직’ 자료를 요구했다. 외교부는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를 내세워 이름을 가리고 성만 표기해 제출했다. 유능한 재외동포를 채용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으나 실제로는 고위 외교관 자녀의 등용문으로 이용된 ‘외무고시 2부’ 출신자들이 채용과 인사 과정에서 특혜(828호 표지이야기 ‘쉿! 평민들은 모르는 세습사회의 비밀’ 참조)를 누린 것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함인데, 외교부의 태도는 ‘능력껏 빈칸을 채워보라’는 식이었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의 결정적인 제보가 추가되지 않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자료였다.
채용 심사 관련 서류 제출 요구에는, ‘시험의 적정한 실시나 평가의 공정한 관리를 저해할 수 있는 정보’는 비공개 대상이라는 ‘외교부 정보공개운영지침’을 방패로 삼았다. 시험이 적정했는지 평가가 공정했는지를 국회가 감사하겠다는데, 외교부는 감사 행위 자체가 공정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료 제출을 거부한 셈이다.
증인 문제로 들어가면 더 가관이다. 힘없는 사람들은 국회가 불렀는데 안 가면 큰일 나는 줄 안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맹점을 잘 아는 힘있는 사람들, 특히 정부의 장차관급을 지낸 인사들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갔다.
자녀의 외교부 채용 및 인사 특혜 의혹과 관련해 증인으로 채택된 유명환·유종하 전 외교부 장관은 국감 전 국외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신병 치료와 강연 등이 불출석 사유였다. 외교부 공무원들조차 “외교부의 수장을 지낸 이들이 소나기를 피하겠다고 외교부 전체를 욕보인다”고 비판했다.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해 국회 정무위의 국무총리실 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구속 수감)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국회의 동행 명령마저 거부했다. 이 전 지원관은 진행 중인 재판에 불리할 수 있다는 이유를, 이 전 비서관은 검찰 수사에서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댔다. 특히 이 전 비서관은 ‘공직 사임 이후 생계유지 등을 위해 다각도로 해외 진출 모색’이라는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해 이번 국감의 유일한 성과라면,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공무원이 설마 증거를 인멸하겠느냐 그런 생각에서 (압수수색이 늦어졌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 아니었나 싶다”며 수사 의뢰를 받은 나흘 뒤에야 실시한 ‘늑장 압수수색’의 잘못을 시인했다는 점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이 한 강연에서 언급한 ‘노무현 차명계좌’에 대해 “조 청장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해 노무현재단으로부터 고소·고발당한 이인규 변호사(전 대검 중앙수사부장)는 국회의 동행명령장 집행을 위해 방문한 국회 입법조사관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했다.
최악의 경우 벌금으로 때우면 된다?‘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은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은 증인, 보고 또는 서류 제출 요구를 거절한 자, 선서 또는 증언이나 감정을 거부한 증인이나 감정인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국회의 소극적인 고발과 검찰 기소, 사법부 재판의 세 단계를 거치는 동안 엄벌 의지는 줄어든다. 국회가 어렵게 여야 합의를 이뤄 고발을 해도, 검찰이 대부분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극소수만이 재판에 회부돼 벌금형에 처해진다. 힘있고 돈 많은 증인들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증인석에서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느니 일단 피하고 최악의 경우 돈으로 때우고 마는 관행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해마다 시민의 눈으로 국정감사를 평가해온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의 황영민 간사는 “입법부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법과 제도가 정비돼왔지만, 국감에서 부실한 자료 제출과 증인 불출석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국회의 고발이 처벌로 이어질 수 있는 강제력을 갖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보협 기자bhkim@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 대선 막 올랐다…초박빙 승패 윤곽 이르면 6일 낮 나올 수도
한양대 교수들도 시국선언 “모든 분야 반동과 퇴행…윤석열 퇴진” [전문]
황룡사 터에서 1300년 전 청동접시 나왔다…‘대’ 새기고 손님맞이
한라산 4t ‘뽀빠이 돌’ 훔치려…1t 트럭에 운반하다 등산로에 쿵
[단독] 경찰, ‘윤 퇴진 집회’ 촛불행동 압수수색…회원 명단 포함
9살 손잡고 “떨어지면 편입”…대치동 그 학원 1800명 북새통
서초 서리풀지구 그린벨트 풀린다…수도권에 5만가구 공급
이런 감나무 가로수 봤어?…영동, 1만9천 그루에 수백만개 주렁
백종원 선생님 믿고 갔는데 “최악”…우산 쓰고 음식 먹었다
SNL, 대통령 풍자는 잘해도…하니 흉내로 뭇매 맞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