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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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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자, 겸손한 남자, 무서운 바람…

7·28 재보선 최대 격전지 서울 은평을…
정권심판론 띄우는 장상과 밑바닥 훑는 이재오, 야권 연대 바람이 변수
등록 2010-07-23 19:40 수정 2020-05-03 04:26
7월13일 후보 등록을 마친 장상 민주당 후보(왼쪽 사진 가운데)와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맨 오른쪽)가 지역을 누비고 있다. 서울 은평을은 7·28 재보선의 최대 격전지다.

7월13일 후보 등록을 마친 장상 민주당 후보(왼쪽 사진 가운데)와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맨 오른쪽)가 지역을 누비고 있다. 서울 은평을은 7·28 재보선의 최대 격전지다.

7·28 재보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7월15일 오후 서울 은평구 대조시장에 장상 민주당 후보가 나타났다. 민주당을 상징하는 초록색 반팔 셔츠에 가벼운 운동화 차림이었다. 이날 아침 7시 지하철 불광역 출근 인사부터 시작해 쉬는 시간 없이 1시간 단위로 계획된 유세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도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예상보다 뜨거운 현장 분위기에 잔뜩 고무된 눈치였다.

민주당 ‘4대강 저지’ 여론 규합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어요. 지난 일요일부터 왔거든요. 현장 분위기가 조금씩 따뜻해진다 싶었는데 이제 뜨거워졌어요. 아주 좋습니다. 선거를 해보면 이런 분위기를 만나기 쉽지 않거든요.”

선거운동 첫날의 소감을 묻자 장 후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또 다른 유권자가 그에게 인사를 청했다. 기자보다는 유권자가 먼저다. 발걸음을 옮기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장 후보의 약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72살의 나이가 무색해 보였다. 수행원 조국정씨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 흰색 셔츠를 입고 두 팔을 걷어붙인 박 원내대표는 지나가는 사람도 붙잡아놓았다. “어디 가세요. 사장님, 저 좀 보세요. 제가 아까 이런 노래 했잖아요. ‘국회의원 아~무나 하나, 기호 2번 장~상뿐이다’, 우리 장상 후보 잘 부탁합니다.” 박 원내대표는 가수 태진아의 곡 가사를 바꿔 부르며 장상 지지를 부탁했다.

서울 은평을은 7·28 재보선의 최대 격전지다. 재보선이 치러지는 8곳 가운데 서울은 은평을이 유일하다. 게다가 한나라당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오른팔’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을 내보내면서 선거의 무게가 달라졌다. 이재오라는 중량급 후보를 공천한 한나라당도,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오랜만에 승리를 맛본 민주당도 은평을을 내주기 어렵다.

민주당이 이날 ‘7·28 재보선 선거대책본부 출정식’을 은평을에서 연 것도 ‘은평을만은 내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4대강 공사 저지 결의대회를 겸한 이날 출정식에는 장상 후보는 물론 정세균 대표와 정동영·손학규 상임고문, 박지원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가 대거 출동했다.

민주당 선거 전략의 초점은 4대강 반대 여론과 정권심판론 극대화에 있다.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가 4대강 전도사를 자처한 만큼 4대강 반대 여론을 선거에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민주당 당직자는 “선거 구도를 새롭게 짜는 것보다 6·2 지방선거에서 효과를 봤던 정권심판론과 이재오 후보 맞춤형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는 ‘4대강 저지’ 여론을 결합하겠다는 계산”이라고 설명했다.

장 후보는 출정식에서 “이명박 정권은 부자와 ‘영포 라인’ 공직자, 대기업, 군부독재 추종 세력, 극우 세력에게는 위대한 정부”라며 “4대강 사업을 강행하면서 영포 라인만 확실히 챙기는 정권을 심판해 국민의 위대함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이재오, 유세 차량도 로고송도 없어
7·28 재보선 출마자 현황

7·28 재보선 출마자 현황

실제 민심은 어떨까? 대조시장에서 생닭을 팔고 있는 박영준(55)씨는 이날 오후 장상 후보 유세단이 지나간 뒤 “지금 나라가 4대강 사업을 벌일 때가 아니다”라며 “온 국민이 반대하는 4대강은 자제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4대강 저지 구호에 공감하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그렇죠”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은평구 대조동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나하균(48)씨는 6·2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국회의원 재선거에서도 여전히 ‘정권 심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저도 과거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인데 그때 그렇게 지키려 노력했던 인권과 언론 자유 등의 가치가 퇴색하는 상황이 안타까웠습니다. 한나라당이 그동안 너무 서민을 무시하고 인권을 탄압해왔잖아요. 그래서 저는 민주당입니다.”

민주당이 대규모 유세단을 꾸려 장상 후보를 지원하는 등 은평을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면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는 정반대의 선거전을 펼치고 있다. 이름을 붙이자면 ‘겸손하고 낮은 선거운동’이다. 유세 차량도 마련하지 않았고 선거 로고송도 만들지 않았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선거사무소도 후보 등록 직후 문을 닫아버렸다. 이 후보는 7월13일 후보 등록 직후 “이번 재보선에서 주민의 진정한 심판을 받겠다”고 말했다. 겸손하면서도 결연한 의지가 응축된 표현이었다.

이재오 후보 선거캠프의 김해진 언론특보는 “지난 2008년 총선 때 (당내에서) ‘실세라고 목에 힘주고 다닌다’는 비난이 제기되는 바람에 후유증을 정말 혹독하게 앓았다”며 “그래서 이번에는 예비후보 등록을 한 직후부터 수행원만 한 명 데리고 다니며 낮은 자세로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고 말했다.

7월14일 새로 선출된 안상수 대표 등이 선거 지원에 나서겠다고 제안했지만 이 후보가 “날 살리려면 한강을 건너지 말아달라. 내가 한강을 넘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며 거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선거전에서 당 차원의 지원을 거부한 채 선거사무소와 유세 차량, 로고송마저 없앴다는 것은 전쟁터의 장수가 모든 보급을 스스로 끊고 배수진을 친 것과 같다. 결코 ‘싸움의 정석’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 후보의 선거운동 과정을 지켜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 6명의 야당 후보가 출마한 서울 은평을 재선거의 남은 변수는 야권 연대다.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 6명의 야당 후보가 출마한 서울 은평을 재선거의 남은 변수는 야권 연대다.

문국현이 이재오에게 남긴 트라우마

이 후보는 장상 민주당 후보에 앞서 7월13일 오전 불광역 일대를 찾았다. 어깨띠나 로고 셔츠 등 한나라당 후보라는 사실을 알리는 어떤 표시도 없었다. 그는 불광역 인근 상가를 찾아다니며 지지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의 안부를 물었다.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당수 상인이 그의 등장을 반겼다.

“어,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운동을 하니까 빠지죠. 물 한 잔 주세요.”

불광역 주변 상인들에게 이 후보는 이웃 주민의 모습 그 자체였다. 반갑게 달려온 한 중년 남성은 이 후보에게 귀한 ‘정보’를 건네기도 했다. “우리 옆 가게 아무개 알잖아. 자꾸 (야당 후보 지지로) 돌아서는 것 같아. 가서 좀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이 후보와 인사를 나눈 ‘엄마손 분식’의 장종선(58)씨는 역촌동 등 은평구에서만 40년째 살아온 토박이다. 장씨는 “국회의원 선거가 돌아올 때마다 매번 이재오씨를 찍었다”며 “워낙 오래전부터 같은 동네에 살다 보니 만날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장씨는 이번 재선거에서도 이 후보에게 표를 줄 생각이다. “이재오씨가 서민적이잖아요.” 장씨의 생각이다.

‘40년 은평 터줏대감’으로 통하는 이재오의 힘이었다. 이 후보는 과거 신한국당에 입당한 뒤 1996년 총선부터 은평을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2004년 ‘탄핵 역풍’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되찾은 직후인 2008년 총선 때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에게 1만 표 이상 차이로 진 것은 그래서 더 뼈아팠다.

불광역 일대를 한 바퀴 훑은 이 후보는 과의 인터뷰에서 ‘밑바닥의 힘’을 강조했다. “민심은 지금 본 그대로입니다. 제가 은평에서 교사 생활을 한 것까지 포함해 수십 년을 살았으니 은평 주민은 나를 자식처럼 생각하죠. 지난 총선 때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오만해지지 않을까 하는 여론이 있었죠. 그래서 저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지, 애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압도적인 인지도, 탄탄한 밑바닥 조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이 후보가 경계하는 것은 ‘바람’이다. 변수는 야권 연대 가능성이다. 2년 전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후보가 일으켰던 바람이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것이다.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분위기는 2년 전 총선 때와는 또 다르게 좋습니다. 다만 야권 연대 등 정치적 이슈가 선거와 결합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직은 모르는 것이죠.”

이재오 후보가 경계하는 야권 연대는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전망은 불투명하다. 국민참여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사회당에서도 7월15일 각각 은평을 선대위 출정식을 열고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7월28일 선거일 전까지 13일의 선거운동 기간에 전면적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리라 보기는 어렵다.

‘민주당 중심 야권 연대’ 거부하는 국민참여당

당의 간판 주자 가운데 한 명인 천호선 후보를 내세운 국민참여당이 특히 강경하다. 원내 1석 확보가 절실한 국민참여당은 민주당이 과거처럼 ‘민주당 중심의 야권 연대’를 계속 고집한다면 결코 협상에 응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국민참여당에서는 민주당이 은평을을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와 가상 대결 여론조사를 해도 천 후보가 장상 민주당 후보보다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깔려 있다.

민주당이 믿는 구석은 ‘여론의 압박’이다. 민주당의 핵심 당직자는 7월15일 “지금은 야권 연대가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선거가 무르익으며 단일화 요구가 거세지면 현실적으로 정치권이 이를 외면하기는 어려운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다시 말해 ‘치킨게임’에 의존하겠다는 뜻이다. 치킨게임이란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모두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게임 이론을 가리킨다.

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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