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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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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무죄! 검찰 유죄!


재판부의 강압수사에 의한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판단…
골프·미국 유학비 의혹에 대해서도 “판단할 이유가 없다”
등록 2010-04-15 21:45 수정 2020-05-03 04:26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 5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4월9일 무죄가 선고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6월2일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예정인 한 전 총리의 정치 행보가 한결 가벼워질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 5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4월9일 무죄가 선고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6월2일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예정인 한 전 총리의 정치 행보가 한결 가벼워질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한명숙 전 총리에게 5만달러를 줬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의심된다.”

“곽씨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억과 다른 진술을 하는 성격으로 보인다.”

“곽씨에 대한 검찰의 조사 시간이 진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곽씨가 궁박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검찰에 협조적인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변호사 입회 없이 새벽 늦게까지 ‘면담’

참패도 이런 참패가 없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겨냥해 5개월 넘게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핵심 인력을 집중 투입한 검찰이 4월9일 참담한 패배를 맛봤다(802호 표지이야기 ‘지방선거 태풍의 눈! 한명숙’ 참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김형두)는 이날 한 전 총리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가 한 전 총리를 무죄라고 판단한 핵심적인 이유는 검찰의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 진술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검찰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지만, 검찰의 ‘무리한 수사 관행’에 대한 지적은 이미 사건 수사 과정에서도 끊이지 않았다.

우선 심야 조사의 문제가 드러난 것은 3월11일이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곽 전 사장은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조사가 끝난 뒤에도 새벽 늦게까지 남아 검사와 ‘면담’을 했다고 밝혔다. 면담에서는 변호사 입회 없이 주로 정치인과 관련된 혐의를 진술했으며, 구치소에 돌아가면 2시간밖에 잠을 잘 수 없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고 증언했다. 곽 전 사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검찰의 명백한 강압수사였다.

검찰은 즉각 반발했다. 심야 조사는 없었으며 오해를 풀기 위해 구치소 출정기록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무부는 실제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곽 전 사장의 구치소 출정기록 제출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다. 이후 검찰은 재판 과정에서 곽 전 사장이 주장하는 심야 조사가 ‘면담’일 뿐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믿지 않은 셈이다.

2006년 9월 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 기고를 실은 ‘죄’로 결국 서울중앙지검에서 옷을 벗은 금태섭 변호사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횡령 혐의로 구속돼 있던 곽 전 사장은 명목이야 어떻든 검찰이 심야 조사를 하겠다고 나오면 거절하기 어려운 처지였다”며 “검찰이 단순히 형식적 동의 절차를 밟았다고 해도 한밤중에 상대적 약자인 피의자를 조사하는 수사 관행의 문제가 지적돼야 한다”고 말했다.

곽 전 사장이 공판 과정에서 수차례 말을 바꾼 것도 검찰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특히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5만달러’의 행방과 관련해 그는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한 전 총리에게 직접 건넨 것이 아니라 총리실 오찬장 의자에 놓고 나왔다”고 말해 검찰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인사 청탁에 대해서도 “한 전 총리에게 청탁한 사실이 없다”고 말해 법정을 술렁이게 했다. 재판부는 곽 전 사장의 오락가락하는 진술 등을 근거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는지 여부 및 액수에 관해 진술이 계속 바뀌고 일관되지 못해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했다.

곽 전 사장이 공판 시작과 함께 말을 바꾸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검찰은 ‘골프채 선물’과 ‘제주 골프빌리지 공짜 숙박’ 등 혐의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실까지 흘리며 한 전 총리 압박에 나섰다. 한 전 총리 쪽에서는 진술거부권으로 맞섰다. 검찰이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는 골프 의혹 등으로 한 전 총리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4월1일 공판은 검찰이 한 전 총리를 향해 마치 독백을 하듯 골프 의혹과 아들의 미국 유학비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같은 의혹도 4월9일 재판부가 “판단할 이유가 없다”며 아예 무시함으로써 말 그대로 검찰의 메아리 없는 독백으로 남게 됐다.

서울시장 선거에 ‘탄력’ 전망

한 전 총리가 ‘5만달러’ 수수 혐의를 깨끗하게 씻어냄으로써 6월2일 서울시장 선거를 향한 한 전 총리와 민주당의 발걸음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한 전 총리는 그동안 서울시장 후보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선두 오세훈 시장을 추격하는 흐름을 보였다. ‘5만달러’ 무죄 선고는 한 전 총리와 야권의 선거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이번 지방선거를 ‘MB정권 심판’이라는 구호로 치러야 하는 야권에게 정권 심판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실제 사례라는 점에서 한 전 총리 무죄 판결이 일정한 효과가 가질 수 있다”면서도 “다만 천안함 침몰 사고와 월드컵 변수와 맞물릴 때, 한 전 총리 무죄 카드가 어느 정도의 추동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의 고집도 변수다. ‘5만달러’ 사건이 완벽한 패배로 일단락됐지만, 한 전 총리를 향한 검찰의 수사 의지는 식지 않고 있다. 검찰은 선고 하루 전인 4월8일 한 전 총리가 연루된 또 다른 불법 정치자금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전례가 없는 선고 직전 별건 수사 착수에 대해 ‘표적수사’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검찰은 비판은 비판대로 듣되 수사는 수사대로 하겠다는 태도다. 권력욕과 오기로 가득 찬 권력집단의 횡포와 사법정의 실현을 위한 불타는 사명감, 과연 한 전 총리를 향한 검찰의 집념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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