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과도한 비용을 지불하고 인수·합병(M&A) 경쟁에서 이겼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형제 경영’의 전통이 깨진 게 문제가 아니다. ‘형제의 난’의 피해를 고스란히 주주들과 대우건설 직원들이 뒤집어써야 한다는 게 문제다.
7월28일 오전 서울 신문로 금호아시아나그룹 본사에서 열린 금호석유화학 이사회에서 박찬구(61) 석유화학 부문 회장은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에서 해임됐다. 이날 오후 박삼구(64)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을 맡기로 했다고 밝혔다.
시작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지나친 M&A 때문이었다. 금호는 지난 2006년 건설업계 1위 대우건설을 인수하며 일약 재계 서열 11위에서 8위로 뛰어올랐다. 금호가 국내 건설업계 1위 대우건설 인수에 들인 돈은 무려 6조4225억원이었다. ‘실탄’이 넉넉지 않았던 금호는 국내외 금융기관에 손을 벌렸다. 대우건설 주식 39.6%를 담보로 내놓고 3조5천억원을 빌렸다. 인수자금의 절반이 ‘빚’이었다.
대우건설 인수자금 절반이 ‘빚’당시 금호는 3년 뒤인 올해 말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주당 3만1500원을 밑돌 경우 금융기관이 갖고 있는 대우건설 주식을 이 값에 사준다는 ‘풋백옵션’을 제시했다. 주가가 떨어져도 금융기관에 일정한 수익을 보장해준 것이다. 대우건설 주가가 기준가격을 웃돌면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막대한 ‘빚’이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지난해 금융위기로 대우건설 주가는 한때 6천원대로 떨어졌고, 최근 주가는 1만2천원대에 그치고 있다. 이 상태에서 투자자들이 풋백옵션을 행사하면 금호아시아나는 당장 4조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다. 이러한 금융비용 부담으로 그룹 전체의 재무구조가 악화됐다.
금호가 무리하게 대우건설을 인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경기가 좋을 때 건설회사는 그룹의 ‘캐시카우’(돈줄)가 된다. 여기에 대우건설은 서울역 앞 대우빌딩 등 여러 부동산과 2조원에 이르는 현금 유동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나쁠 때 건설회사는 돈 먹는 하마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금호는 미처 하지 못했다.
게다가 금호는 지난해 대한통운까지 사들였다. 두 건의 M&A 뒤 금호의 유동성 위기설은 시장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금호는 대우건설을 사자마자 대우빌딩을 팔아치우며 유동성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위기설은 현실화됐다. 결국 대우건설 포기로 이어졌다.
물론 재계 안팎에선 이같은 위기설을 놓고 현 정권의 ‘호남 기업 손보기’라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참여정부 때 한진그룹 회장이 한나라당에 불법 대선자금 20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반면 라이벌 그룹인 금호는 지난 정부 때 자산순위에서 한진을 제치며 잘나갔다. 이 때문에 현 정부에서 금호를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위기설은 형제의 갈등으로 전이됐다. 형인 박삼구 회장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등을 M&A하면서 공격 경영으로 그룹 외형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금호가 대우건설을 내놓기로 결정한 뒤 동생인 박찬구 회장은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위기 국면을 야기했다며 박삼구 회장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박찬구 회장은 독자 노선을 택했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물론 차기 경영권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박찬구 회장은 관례상 자기 차례인 차기 그룹 회장 자리를 승계받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고 한다. 박삼구 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 상무가 고속 승진을 하고 있었지만, 박찬구 회장의 아들인 박준경 금호타이어 회계팀 부장은 부장직에 머물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다고 한다.
사실 금호의 형제 경영은 25년 전인 198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금호그룹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의 차남인 고 박정구 회장의 아들 박철완 아시아나항공 부장, 3남 박삼구 회장과 그의 아들인 박세창 전략경영본부 상무, 4남 박찬구 회장 부자 등의 금호석유화학 지분은 각각 10.01%씩이었다. 금호산업 역시 6.11%씩으로 똑같았다.
그러다 박찬구 회장 부자가 지난 6월15일부터 금호산업 지분을 팔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금호산업의 나머지 지분을 모두 팔아치운 이들 부자는 현재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18.43%까지 늘린 상태다. 박삼구 회장은 동생의 행보에 큰 분노를 표했으며, 가족회의를 통해 자신과 동생의 동반 퇴진까지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호는 양대 지주회사 격인 금호석유화학과 금호산업이 48개에 이르는 계열사를 거느리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금호석유화학이 금호산업 지분 19.03%를 갖고 있어 금호석유화학을 지배하면 실질적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앞으로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일단 박삼구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뒤에도 구조조정을 직접 챙기겠다고 밝혔다. 현재 박삼구 회장은 금호석유화학, 금호타이어, 대우건설, 대한통운, 아시아나항공 등 5개 계열사의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재계 안팎에선 박 회장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처럼 일선에선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그룹을 원격 조종하려는 것으로 읽고 있다. 일각에서는 전문경영인인 박찬법 후임 회장 체제를 과도기로 거친 뒤 박삼구 회장의 아들 박세창 상무 체제로 경영권이 넘어가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동반퇴진 명분 삼아 박삼구 회장 원격 조종?하지만 박찬구 회장이 법정 공방이나 지분 경쟁 등 반격에 나서게 되면 사태가 장기화될 수 있다. 박찬구 회장 쪽에선 “기습적으로 당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박찬구 회장이 해임 결의에 불복한다면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돼, 계열 분리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박찬구 회장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법원에 이사회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카드는 지분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현재 박찬구 회장 쪽 금호석유화학 지분은 18.47%로 나머지 형제 가계의 지분(28.17%)에 크게 뒤진다. 하지만 양쪽의 우호 지분 확보 여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금호 관련 주식은 7월29일 ‘형제의 난’이란 돌발 변수에 휘말리면서 약세를 보였다. 금호산업이 6.80% 하락했고, 다른 계열사도 금호타이어 -4.44%, 대우건설 -2.33%, 아시아나항공 -1.78% 등 약세를 면치 못했다. 경영권 분쟁 가능성으로 주목받은 금호석유화학은 한때 12.38%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차익 실현 매물에 밀려 소폭 상승에 그쳤다.
재벌 기업들은 M&A를 통해 문어발식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외환위기 때 큰 대가를 치렀다. 금호는 무리한 M&A에 나서면 반드시 발목이 잡힌다는 사실,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영 실패에 대한 오너의 책임은 ‘형제의 난’으로 묻혀버렸다. 언론은 물론 주주들도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피해는 다른 이들의 몫이 됐다. 대우건설은 미래를 위한 비전 제시나 투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다시 매물 시장에 나오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금호 관련 주식을 산 주주들 역시 기업 실적과 상관없이 경영권 분쟁이라는 엉뚱한 원인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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