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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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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무위정치’ 약인가 독인가

재보선에서 파워 과시했지만 ‘계파보스’ 이미지 점점 굳어져
등록 2009-05-12 11:01 수정 2020-05-03 04:25

“박근혜 전 대표는 한나라당이 부도나면 싼값에 인수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당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는 듯한 모습을 벗어나지 않으면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서의 위상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한나라당 중진 의원)
0 대 5. 4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받아든 무참한 성적표는 아무런 지원활동도 하지 않은 박근혜 전 대표의 위력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특히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수성 의원이 당의 총력 지원을 받은 정종복 전 의원을 10%포인트 가까운 차이로 누를 수 있었던 힘이 박 전 대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가 언제까지 이른바 ‘무위(無爲)의 정치’를 계속할 것인지 그의 리더십에 의문을 증폭시키는 계기도 됐다. 요즘 한나라당에선 “그동안 박 전 대표 쪽이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며 아무것도 안 했는데, 결과적으로 대체 누구를 도와준 것이냐”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지난 2월2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초청 오찬에서 나란히 앉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 안팎에선 이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 박 전 대표의 ‘무위의 정치’가 이 대통령을 향한 불만 탓이라고 해석한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2월2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초청 오찬에서 나란히 앉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 안팎에선 이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 박 전 대표의 ‘무위의 정치’가 이 대통령을 향한 불만 탓이라고 해석한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계 의원들은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은 자의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 탓이라고 주장한다. 박 전 대표가 활동할 공간이 열리려면 우선 이 대통령과 신뢰관계가 형성돼야 하는데, 그동안 이 대통령은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측근의 말은 박 전 대표 쪽의 이런 생각을 잘 드러내준다.

“MB 스타일이 박 대표를 궁지 몰아”

“박 전 대표는 당과 나라를 위해 무엇이든 할 마음이 있다. 하지만 집권 초기부터 거론된 ‘박근혜 총리설’부터 친박 인사 장관 기용설, 최근의 김무성 원내대표설까지 이 대통령 쪽은 먼저 언론에 흘려 ‘화합 생색내기’만 했다. 이 대통령 스스로 박 전 대표를 ‘국정의 동반자’로 삼겠다고 했으면, 먼저 의견을 구하는 게 순서 아니냐. 사전 협의도 없이 ‘앞으로 계파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박근혜계 포용책으로) 김무성 의원한테 원내대표 자리를 주겠다’고 하는 건 박 전 대표를 ‘자리 욕심’을 내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밖에 안 된다.”

이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못해 박 전 대표가 입을 열 수 없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박근혜계의 한 인사는 “미디어 관련법이나 ‘사회개혁 법안’ 등 정책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에,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박 전 대표는 무조건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반대 목소리를 내면 ‘패자라서 반대한다’고 욕을 먹는다. 그러니 꼭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말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박 전 대표가 자신의 존재를 ‘반이명박’으로서만 드러내려는 데 기인한 것으로, 차기 지도자를 노리는 정치인의 행보로선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립 성향인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박 전 대표가 그동안 보여준 모습은 ‘차기 지도자’가 아니라 ‘계파 보스’에 불과하다”며 “특히 당 대표까지 지낸 분이 선거 지원마저 나 몰라라 한 건 ‘해당 행위’나 다름없다. ‘네(이 대통령)가 나를 무시했으니, 어디 쓴맛 좀 보라’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말했다.

최근엔 박 전 대표의 계파 챙기기 행보가 더욱 가속화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5월5일 미국 스탠퍼드대 강연, 실리콘밸리 방문 등의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 전 대표를 ‘수행’한 의원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임시국회 회기가 끝난 점을 감안하더라도 세 과시가 필요한 선거 국면도 아닌데 이례적으로 인원이 많다. 게다가 동행한 의원 가운데 유재중·이진복 의원은 지난해 총선에서 ‘친박 무소속 연대’로 출마해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입당한 이들이다. 낯을 가리기로 유명한 박 전 대표가, 당선 직후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을 찾아와 인사를 나눈 뒤론 별다른 공개접촉이 없던 이들을 일주일 일정의 수행단으로 ‘허락’한 것은 ‘내 자식들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당 안팎에 두루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 두 의원은 당협위원장 임명 문제로 이명박계와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이다.

10월 재보선 패배 땐 몸값 더 올라

박 전 대표 쪽은 나아가 “가만히 있어도 당의 힘은 우리 쪽으로 쏠릴 것이므로 박 전 대표가 이리 저리 나설 필요가 없다”는 속내도 감추지 않는다. 한 인사는 “‘구도’가 그렇게 흘러갈 거다. 이 대통령이 지금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박 전 대표에게 손을 못 내밀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며 “총리든 장관이든 원내대표든, 지금은 우리가 굳이 자리를 떠맡는 게 실익도 없고, 그런 식으로 ‘동반 심판’을 받을 이유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런 ‘계산’은 한나라당이 10월 재보선에서도 질 확률이 높다는 정치권 안팎의 전망과 맞닿아 있다. 10월 재보선은 수도권 4곳을 비롯해 7곳 안팎에서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며 출마자도 여야 모두 ‘거물급’으로 거론되는 ‘미니 총선’이다. 야당의 선거 프레임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명박 심판론’이다. 여기서 한나라당이 지면 내년 6월 지방선거도 낙관할 수 없다. 지방선거 패배는 곧 이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을 뜻하기 때문에, 10월 이후엔 계파를 가리지 않고 ‘박근혜’를 부르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10월 재보선은 사실상 수도권 선거인데, 수도권은 이명박계의 근거지다. 여기서 한나라당이 지게 되면 의원들의 ‘주이야박’(낮엔 이명박계, 밤엔 박근혜계라는 뜻으로 공천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의원들이 양쪽 계파에 모두 발을 담그는 현상)이 더욱 심해질 뿐 아니라 지지 기반 기층의 동요가 심각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박 전 대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당내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쪽의 계산과 달리, 상황이 정반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 “4월 재보선이 끝난 다음부터 박 전 대표에게 역할을 요구했는데, 왜 이를 외면해 상황을 더 악화시켰느냐”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이재오 전 의원이 10월 재보선에서 정치적 재기에 성공해 이명박계가 구심점을 확보하게 된다면, 당내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더욱 거세게 박 전 대표를 공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5월5일 인천공항 귀빈실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미국 출국에 앞서 측근인 유정복 의원(앞줄 오른쪽 두 번째) 등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 성연재

5월5일 인천공항 귀빈실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미국 출국에 앞서 측근인 유정복 의원(앞줄 오른쪽 두 번째) 등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연합 성연재

“실체가 없는 괴물 같다”

근본적으로는 박 전 대표가 그간 보여준 모습이 ‘차기 대선 후보감’이었느냐는 의문도 고개를 든다. 한나라당의 한 고참 보좌관은 “박 전 대표는 ‘실체가 없는 괴물’ 같다”고 표현했다. “어떤 지도자인지 도무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체가 없다. 검증을 하고 싶어도 검증할 만한 말이나 행동, 정책을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괴물이다.”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도 “‘무위의 정치’ ‘외마디 정치’만으로는 박 전 대표가 대선 주자로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다. 반면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남경필·원희룡 의원 등 ‘차기’로 거론되는 당내 인사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며 “지금의 박 전 대표는 탄탄해 보이는 차기 주자로서의 입지를 스스로 흔드는 것 같다”고 했다.

영남 지역의 한 초선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지난번 대선 후보 경선에서 왜 단기필마로 시작한 이 대통령에게 졌는지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대선은 당내 세력을 누가 더 많이 갖고 있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변화의 큰 줄기를 잡아 ‘시대정신’을 보여주느냐의 싸움”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전 대표는 당원 투표에선 이겼으나,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뒤져 “당심은 잡았지만 민심을 못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박정희 향수’에 기대 20%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율’은 역설적으로 35% 위로도 올라가지 않는 ‘징크스’로 변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초선 의원은 “지금 박 전 대표는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했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박 전 대표 쪽도 이런 지적에 수긍한다. 심지어 “박 전 대표가 변하지 않는다면 다음은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 때문인지 최근엔 박 전 대표와 일부 소장파의 연대설이 꽤 설득력 있게 흘러나온다. ‘과거’를 재해석할 만한 참신한 이미지가 필요한 박 전 대표와, 안정적인 당내 세력이 필요한 소장파가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다. 내년 지방선거 전으로 전당대회를 앞당겨 당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장파 일각에선 ‘박근혜 대표론’도 거론된다. 박근혜계 의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지만, 실무진 가운데선 “과거 소장파와 각을 세우던 때와 달리 함께 갈 수 있다면 고려해볼 만한 얘기 아니냐”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제법 있다.

변화하지 못하면 또 한계 봉착

어쨌거나 스스로의 동력으로든 외부 요인으로든 박 전 대표가 ‘10월 이후, 내년 6월 이전’엔 움직일 것이라는 전망은 당내에서 일치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여론의 시험대에 오를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16대 대선 때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핵심 참모였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회창 대세론’이 있었다. 당시 후보들을 거명하고 지지 여부를 물으면 이회창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주관식으로 물으면 지지율이 절반으로 꺾였다. 대세론은 결국 상대적인 지지라는 얘기다. 박 전 대표도 마찬가지일 거다. 지금 박 전 대표가 다른 정치인보다 지지율이 월등히 높은 건 사실이지만, 상대적인 거다. 지금까진 수동적으로 이 대통령의 상대적인 역할만 하면 현상 유지가 가능했지만, 일단 시험대에 올라서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언제나 계파 갈등의 당사자이기만 해선 안 된다. 대통령 비판이든, 정책 비전이든 국민이 ‘지도자’라고 평가할 만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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