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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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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이 불러낸 손학규

민주당의 SOS로 4·29 재·보선 지원 유세… 선거 이후 행보에 주목
등록 2009-04-30 15:00 수정 2020-05-03 04:25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꽃다발 가득한 환영 행사는 없었다. 기자회견과 언론 인터뷰도 스스로 사양했다. 손 전 대표는 그저 “(당이) 잠깐 도와달라고 해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4·29 재보선 지원 유세가 본격적인 정계 복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4월22일 오전 인천 부평농협 앞을 찾은 손 전 대표는 만나는 유권자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일부는 “손학규 지사님 아니십니까”라며 화답했다. 몇몇은 내민 손을 외면한 채 출근길을 재촉했다. 그때마다 손 전 대표는 “지각생에게는 인사하기가 어렵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거리에 인적이 끊기면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브이(V)자를 그렸다. ‘브이’는 인천 부평을 재선거에 출마한 기호 2번 홍영표 민주당 후보를 뜻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4월22일 오전 인천 부평구 청천동 GM대우 앞에서 홍영표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를 펼치고 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전주 덕진 무소속 출마로 위기에 처한 민주당은 강원 춘천에서 은둔하고 있던 손학규 전 대표를 불러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4월22일 오전 인천 부평구 청천동 GM대우 앞에서 홍영표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를 펼치고 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전주 덕진 무소속 출마로 위기에 처한 민주당은 강원 춘천에서 은둔하고 있던 손학규 전 대표를 불러냈다.

손 전 대표는 이날 아침 7시부터 홍 후보의 손을 잡고 부평농협과 GM대우 주변을 부지런히 누볐다. 손 전 대표와 마주친 강창규 한나라당 시의원(부평 제3선거구)은 “(지원 유세를) 너무 열정적으로 해주시는 것 아니냐”며 푸념했다. 민주당 당직자는 “주요 인사가 지원 유세를 나오면 대개 유세장에서 마이크 한 번 잡고 돌아가기 쉬운데, 손 전 대표는 자기 선거처럼 열심히 바닥을 누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낙인 지울 기회로

한 달 전만 해도 정치권에서 ‘손학규’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손 전 대표를 도운 한 386 정치인은 말했다. “그가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정치를 다시 시작할 마음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때가 2월 초였다.

손 전 대표가 민주당에서 보낸 1년은 그만큼 시련의 연속이었다. 대선 후보 자리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몫이었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는 본인도, 당도 참패했다. 지난해 7월 대표직을 내놓으며 그는 “이 사회가 손학규를 필요로 하는지,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비울 수 있는 데까지 비우고 돌아보고자 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잊혀졌다.

은둔의 시간은 길었다. 손 전 대표가 민주당에 만들어놓은 공간은 좁았다. 그가 주창한 보수도 진보도 아닌 ‘새로운 진보’, ‘따뜻한 실용’은 메아리를 만들지 못했다. 당 안에 손학규계라 불릴 만한 세력도 없었다. 그를 돕던 민주당 386 그룹조차 “손 전 대표 지지는 ‘차도지계’에 불과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차도지계란 다른 이의 힘을 빌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룬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손 전 대표를 괴롭힌 것은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주홍글씨였다. 대선 후보 경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를 ‘보따리장수’에 비유하며 모욕했다. 경쟁 주자였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도 경선 직전 “한나라당식 사고방식을 검증하겠다”며 손 전 대표의 출신을 문제삼았다. 대선 직후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를 맡자 이번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탈당했다. 한나라당 출신이 이끄는 정당에 몸담을 수 없다는 것이 탈당의 이유였다.

강원 춘천시 농가에서 기약 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던 손학규 전 대표에게 라이벌 정동영 전 장관은 두 가지 선물을 안겼다. 우선 정 전 장관이 전북 전주 덕진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자 민주당이 비로소 그를 찾았다. 재보선 전패의 위기에 놓인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그에게 정치권 복귀의 명분을 만들어줬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쳤던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손 전 대표는 당이 원한다면 백의종군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수도권 재보선 지원 유세에 뛰어들었다. 또 하나, 손 전 대표는 ‘민주당 출신이면서 민주당에 칼을 겨눈’ 정 전 장관과 달리, ‘한나라당 출신이지만 민주당을 위해 헌신하는’ 이미지로 새로운 당내 평가를 받을 기회도 잡았다.

손 전 대표는 4월22일 과 만난 자리에서도 유독 ‘우리 민주당’을 강조했다. 재보선 정국에 대해 그는 “우리 민주당이 안팎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이라며 “지금은 내가 이 선거(부평을 재선거)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이것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동영 전 장관의 무소속 출마에 대해서는 “당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할 때, 더 이상 국민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며 에둘러 비판했다.

평당원 자격 강조하며 확대해석 경계

그러면서도 손 전 대표 쪽에서는 4·29 재보선 지원 유세에 대한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수도권 지원 유세는 어디까지나 당의 부름에 따른 일시적 복귀라는 이야기다. 손 전 대표와 가까운 우상호 전 의원은 “김근태·한명숙 상임고문도 당의 지원 유세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손 전 대표만 특별하게 볼 필요는 없다”며 “자기 정치를 하는 것이라기보다 당의 지도자로서 어려움에 처한 당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손 전 대표도 재보선이 끝나면 춘천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주목되는 것은 재보선 이후다. 부평을 재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긴다면, 손 전 대표는 10월 재보선 출마를 통한 정계 복귀를 무리 없이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도권에 만만치 않은 득표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취약했던 당내 기반을 닦을 수 있다. 내년 수도권 지방선거에서 출마를 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손 전 대표의 협조를 얻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당이 부평에서 패한다면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이 경우 정세균 대표를 도왔던 손 전 대표도 재보선 패배의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동시에 정동영 전 장관이 전주에서 압승을 거두기라도 한다면, 정세균 대표는 물론 손 전 대표의 당내 입지까지도 좁아질 수 있다. 다만 손 전 대표는 지원 유세에 뛰어들며 평당원 자격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책임론이 제기된다고 해도 제한적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오히려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부평을 포함한 재보선에서 패하더라도 손 전 대표가 좀더 일찍 당 전면에 나서야 할 상황이 마련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민주당 관계자는 “만약 재보선 이후 정세균 대표가 물러나고 조기 전당대회가 치러진다고 해도 당권파는 비당권파에게 당권이 넘어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며 “손 전 대표 본인이 직접 나서지는 않겠지만 당권파가 그를 대타로 내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손 전 대표 쪽 관계자는 “크고 작은 선거를 치를 때마다 지도부를 허물어 당내 자원을 고갈시킨다면 그나마 몇 안 되는 민주당 모든 국회의원의 지도부화는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된 야당의 역할을 하기는 어려워진다”며 “만약 지도부에 책임을 묻는 사태가 오더라도 손 전 대표는 현 지도부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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