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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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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종부세 헌재 결정 앞두고 재정부 간부가 헌재 연구관 접촉 하다니
등록 2008-11-11 13:50 수정 2020-05-03 04:25

“헌재와 접촉했는데 확실히 전망할 수 없지만 일부 위헌 결정이 나올 것으로 본다. 주심재판관을 만났다고 들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 한마디가 정국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야당이 “종합부동산세 위헌 의견을 내놓은 기획재정부가 헌법재판소와 접촉한 것은 사법부 위에 군림하려는 위헌적 작태”라며 강력히 반발했고, 졸지에 ‘접촉 파트너’가 된 헌법재판소는 유감을 표하고 나섰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한겨레 강창광 기자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한겨레 강창광 기자

연구관은 결정에 영향 줄 수 있어

뒤늦게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챈(?) 강 장관은 진화를 시도했다. “세제실장이 우리 의견을 말하려고 실무적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나에게 구두로 보고한 것뿐이고, 재판관을 만난 게 아니라 연구관을 만났다.” 헌재도 “기획재정부 관계자가 새로 의견서를 내러 와서 헌재의 수석연구관을 만나 의견서의 취지를 설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헌법재판관이 아니라 연구관을 만나 자료를 건네며 설명을 곁들였을 뿐이란 점에서 양쪽의 설명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이 연구관을 만난 것은 괜찮은 일일까?

헌법재판소법에서는 헌법연구관의 임무를 ‘각종 사건의 심리 및 심판에 관한 조사·연구에 종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 합헌 결정이 내려진 간통죄 사건의 예를 들어보자. 사건이 접수·배당되면 해당 연구관은 간통죄와 관련된 각종 판례는 물론 폐지 쪽과 유지 쪽 주장들의 근거, 판결 뒤 예상되는 파장 등을 종합한 보고서를 작성해 재판관에게 제출한다. 재판관들은 변론서와 이해관계인들이 낸 의견서 등과 함께 연구관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평의에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최종 결정을 내린다. 연구관이 결정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지만, 영향을 줄 수는 있다는 말이다. 헌재에는 재판관 1명당 연구관 1명씩 배속돼 있고, 수석연구관은 연구관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대법원도 이와 비슷하다. 대법원에서는 대법관 1명당 3명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두고 있는데, 이들의 임무도 사건의 심리와 재판에 관한 조사·연구다. 사건과 관련된 판례들을 분석하고 흐름을 종합해 보고서를 제출한다. 대법관들은 사건 기록과 함께 이들 보고서를 참고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 한 판사는 연구관의 이해당사자 접촉과 관련해 “대법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각 대법관 아래에 어떤 판사가 연구관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기밀 사항처럼 취급된다”고 말했다. 각 대법관별 재판연구관들이 누군지 알려지면 연구관을 상대로 로비가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산 탓에 문전박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강 장관의 실언에서 파문은 시작됐지만 이해당사자를 따로 만나 얘기를 들은 헌재의 처신도 문제인 셈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헌재가 예산권을 쥔 기획재정부를 문전박대하기는 어렵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헌재 관계자는 “이번은 이례적인 상황이다. 보통 다른 사건은 이해관계자들을 만날 일이 없다. 불러서 만난 것도 아니고, 찾아와서 자료도 내고 설명 좀 하고 가겠다고 하는데 거절하지 못한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헌재 파견 근무 경력이 있는 한 부장판사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쪽에서) 의견을 내는 것이야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당사자를 만나는 일은 없다”며 “나도 이번 보도를 보고 어찌된 일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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