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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조합원들의 욕망 대변에만 사로잡히면 미국·일본식 실리적 조합주의의 덫에 갇히게 될 것
등록 2008-10-31 11:15 수정 2020-05-03 04:25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 간의 고용 조건 격차로 집약돼 표출되고 있는 노동 양극화를 초래한 핵심적인 원인으로는 그동안 원청 대기업들의 수익 독식 경영체제가 공고화되고,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성장 정책이 지속적으로 펼쳐져온 점을 문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노동 양극화의 추세가 날로 심각해지는 배경에는 분배 정의와 노동자 연대를 구현·강화해야 할 노동조합운동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점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0월18일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10월18일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조합원 실리 극대화를 위한 도구적 존재

우리 노동조합운동에서 조직 자원과 교섭 방식 그리고 성과의 배분 구조를 전반적으로 틀짓는 기업별 활동 체계는 기본적으로 소속 조합원들의 협애한 이해 대변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배태하고 있다. 사업장 안의 경영 독재와 밖의 국가 탄압이 맞물려 있던 노동통제 구조를 동시에 허물기 위해 지역·업종 차원의 연대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던 1987년 직후 노동운동의 분출기에는 이러한 한계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1990년대 들어 대공장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주도의 전투적 투쟁에 의해 조합원 대중들이 경제적인 성과들을 향유하게 되면서 점차 노동조합운동의 족쇄로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해온 대공장 노조들은 대부분 소속 대기업들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점적 수익 배분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더욱이 기업별 조직과 교섭 체계하에서 그들은 전체 노동자 계층의 연대적인 이해에 충실하기보다는 소속 조합원의 실리를 전투주의적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도구적 존재로 변질됐다.

물론 지난 10여 년 동안 노동조합운동은 경제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나름대로 사회경제 개혁투쟁을 전개해오고, 또한 산별 노조로의 조직 전환을 통해 노동연대를 구현하려는 새로운 활동체계를 구축해왔다. 그럼에도 날로 확대되는 노동 양극화의 현실이 방증하듯이 노동조합운동이 그 불평등의 확대재생산을 제어·저지하기에는 크게 역부족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공격적 신자유주의 국정 기조를 공공연히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노동조합운동은 더욱 수세적인 정치 지형에 내몰리고 있다. 현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와 일자리 감소 등 심각한 노동 현안들이 산적돼 있음에도 이를 외면한 채 ‘강부자’와 기업들을 위한 탈규제 정책을 서슴없이 펼쳐나가는 것에 대해 노동조합운동은 제대로 맞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노총은 친기업 정권과의 정책연대 파트너로 안주함으로써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비정규보호법의 형해화와 노사정위원회의 권능 축소 등과 같은 반노동 정책에 협력·방조하는 자가당착의 우를 범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여름 촛불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사회민주적 개혁투쟁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소속 조합원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지도부만의 외로운 투쟁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세계공황과 경제위기가 현실화되는 요즘 많은 노동자들이 다시금 1998년 구조조정의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고용불안과 생활고를 걱정하는 상황을 맞이해 그들을 보호해줄 노동조합운동의 존재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그런데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연대의 가치를 표방하는 사회 개혁적 실천 노선을 내세웠지만, 결국에는 기존 정규직 조합원의 ‘밥그릇 챙기기’식 활동을 넘어서지 못했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정규직 조합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더욱 집착하려는 움직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바, 노동조합운동이 조합원들의 욕망 대변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할 경우에는 비정규직 등 취약한 노동자 집단을 폭넓게 대변하려는 사회연대적 개혁성을 잃은 채 미국과 일본에서와 같이 실리적 조합주의의 덫에 갇히게 될 것으로 심히 우려된다.

미래는 연대정신의 부활

그럴 경우에는 정규직 조합원과 비정규직·영세사업장의 미조직 노동자들 간의 격차 구조가 돌이킬 수 없이 고착화될 뿐 아니라 노동조합운동 역시 사회연대의 대의와는 동떨어진 노동 양극화의 담지자로서 개혁 대상으로 치부될 것이다. 반면 노동조합운동이 경제 불황과 더불어 가중되는 노동의 위기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분명히 인식해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산별, 더 나아가 사회적 연대의 실천 주체로서 탈바꿈할 경우에는 사회민주적 개혁 세력으로서 중추적 위상을 되찾을 수 있다. 결국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미래는 연대정신의 부활에서 찾게 된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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