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부 회의가 없고 정책이 없으니 쟁점이 없고 인물이 없고 시간이 없으니 검증도 없고 …
▣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이번 4·9 총선은 □□□□다.’ 정답은? ‘없는 선거’다. 정책이 없어 쟁점이 없다. ‘물갈이’만 있고 인물이 없다. 시간이 없어 검증도 없다.
공천에는 없고 비례대표에는 있고?
한나라당, 통합민주당(민주당) 양쪽 마찬가지다. 인물난이다. 참여정부 마지막 국방부 장관이었던 김장수 장군을 비례대표 후보로 영입하기 위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신경전을 벌일 정도다.
일단 물갈이는 이뤄졌다. 한나라당은 3월20일 현재 18대 총선에 공천을 신청한 현역 의원 123명 중 45명을 탈락시켰다. 교체율 39.1%다. 민주당은 이날까지 현역 119명 중 24명을 탈락시켰다. 교체율은 20.1%. 교체율만 놓고 보면 민주당이 뒤진다. 보수언론에서는 “민주당의 공천 개혁이 용두사미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수도권에 집중된 이른바 ‘386 의원’들의 탈락이 없었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민주당의 한 공천심사위원은 “수도권의 경우는 절대적으로 공천 희망자가 부족했다”며 “한나라당 후보와 맞설 수 있는 후보가 현역 의원인 경우가 많아 교체하기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20일 마감된 민주당 비례대표 신청에는 모두 260명이 원서를 냈다. ‘쉬운 길’만을 가려는 민주당 쪽 예비후보들의 태도는 당 안팎의 비난을 사고 있다.
한나라당 현역 의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에 박수치던 유권자들의 환호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유는 물갈이의 속내와 수준 때문이다. 공천 탈락 이후 3월20일 한나라당을 탈당한 최구식 의원(경남 진주갑)은 “이번 공천은 이방호 의원 개인이 농단했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은 “영남 지역 공천 결과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핵심은 이방호 의원의 원한 풀기”라며 “이 의원이 지난 2006년 전당대회에 최고위원으로 출마했다가 탈락하자, 도와주지 않은 의원들에게 원한을 쌓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방호 의원 쪽에서는 “말도 안 되는 마타도어(흑색선전)”라고 일축했다.
‘친박계’의 핵심인 유승민 의원(대구 동을)도 “탈락한 자리는 모두 이명박 대통령쪽 인물로 채워졌다”며 “한나라당을 ‘이명박당’으로 만들기 위해 국회의원 자격도 없는 함량 미달의 인물들을 공천하니까 이런 사단이 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유사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서울 지역의 한 의원은 “민주당의 공천 개혁이 후퇴하는 것은 손학규·박상천 두 공동대표의 ‘자기 조직 챙기기’ 때문”이라며 “손 대표의 경우 지난해 경선에서 조직의 열세 때문에 졌다는 생각에 자기 사람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북 익산갑에서 현역인 한병도 의원과 김재홍 의원을 제치고 공천을 받은 이춘석 변호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된다. 이 변호사는 지난해 경선 당시 전북에서 가장 활발하게 손학규 지지 활동을 벌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개혁 퇴보의 핵심에는 박상천 대표가 있다. 그는 “옛 민주당 챙기기에 수도권 선거 결과에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내의 정면 반발을 사고 있다. 박 대표는 비례대표 당선 안정권에 자신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국창근 전 의원을 넣어줄 것을 계속 주장했다.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을 비롯한 외부 공천심사위원들이 이에 반발해 ‘사퇴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혀 한때 ‘판이 깨지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 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광주·전남 65.9% “공천 개혁은 실패”
이런 상황은 민주당 지지층의 외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남의 가 3월19일 광주·전남 지역 여론 주도층 404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65.9%의 응답자가 ‘공천 개혁은 실패’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민주당의 공천 결과가 개혁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3.6%가 ‘그저 그렇다’, 22.3%는 ‘아니다’라고 응답한 것이다. 민주당의 서울 지역 한 초선 의원은 “공천 혁명 초기에는 솔직히 100석에 육박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 했지만, 현재로서는 민주당이 80석도 겨우 턱걸이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 지도부가 공천심사위원회와의 권력다툼하는 사이, 정책은 실종됐다. 한나라당에서도, 민주당에서도 이번 총선의 정책을 말하는 지도부가 없다. 지도부 자체가 공백 상태다.
한나라당의 경우는 3월 이후 각종 지도부 회의가 잇따라 파행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수요일에 열리는 원내대책회의와 최고중진연석회의는 3월4일과 5일을 마지막으로 열리지 않았다. 주요당직자회의와 최고위원회가 날짜를 바꿔 열리는 날도 이어졌다. 최고위원회에 참석한 강재섭 대표의 모두 발언도 대부분 공천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언론사 기자들에게 공개되는 모두 발언은 그날의 핵심적인 정치 의제를 던지는 자리다. 한나라당 지도부의 관심이 모두 공천에만 쏠려 있었다는 방증이다. 한나라당의 한 서울 지역 의원은 “이번 총선의 공약은 결국 이명박 정부가 추진할 정책이기 때문에 당에서 따로 정책을 내세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제대로 된 대안을 세워야 할 민주당과 손학규 대표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는 점이다. 손 대표가 3월5일 이후 열린 최고위원회 모두에 말한 내용들도 절반이 공천에 관련된 사항이었다. 손 대표가 정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 것은 19일 최고위원회에서 “‘민생 제일주의의 5대 핵심 민생과제’로 ‘물가 5적 잡기’ ‘등록금 문제 해결’ ‘소상공인 전성시대’ 등의 정책을 제시하겠다”고 밝힌 것이 사실상 유일했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단계부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국민들 대다수와는 전혀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인사와 정책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며 “민주당에서 정책을 통해 제대로 전선을 만들지 못하면서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민주당 의원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의 마음이 새카맣게 타고 있는데, 손학규 대표에게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말을 들을 수가 없다”고 개탄했다.
손학규 대표가 정치적·정책적 조언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손 대표의 핵심 측근은 송영길·김부겸·조정식·임종석·우상호·정봉주 의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선거 때문에 지역구에 매달려 있다. 최재성 민주당 의원(경기 남양주갑)은 “전략기획을 제대로 맡을 수 있는 의원 2명만 제대로 보좌한다면 총선 전략은 제대로 세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례대표 후보자 등록 직전 윤곽
서울 종로에 출마한 손학규 대표와 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정동영 전 대통령 후보가 한나라당의 박진 의원과 정몽준 의원에게 여론조사에서 뒤지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한나라당과 맞서는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지도부를 살려야 할 필요를 유권자들이 느끼지 못하니 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영남과 호남 지역의 현역 의원들이 총선의 전략기획과 정책 수립을 맡아줘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수도권에서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동료 의원들을 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역의 의원들이 좀더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너무 늦었다. 유권자들은 중앙선관위원회 후보등록이 시작되는 3월25일 직전에나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확정된 지역구 공천자들과 비례대표 후보자들의 면면을 보게 될 것으로 보인다. 4·9 총선까지 남은 보름은 후보 검증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결국 유권자들은 평가가 아닌 ‘찍기’만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이런 현상이 한국 정치의 고질인 준비 부족과 시스템 부재 때문이라고 혹평했다. 2007년 12월 대선이 끝나면 2008년 4월에 총선이 있다는 스케줄이 이미 확정된 상태인데도, 정책이나 인물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정치권의 책임이라는 비판이다. 김 교수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직도 불확실성이 지배한다는 것”이라며 “정치 선진화는 바로 예측 가능한 정치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임기 동안 두 차례의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는 것이다. 2012년이 되면 19대 국회의원 선거(4월)와 19대 대통령 선거(12월)가 8개월 사이에 잇따라 열리게 된다. 이 선거의 승패는 이명박 대통령의 중간평가라고 할 수 있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사실상 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중간평가의 1차적 변수는 이명박 정부의 성공 여부다. 2차적 변수는 어느 정당이 ‘준비된 후보’와 ‘준비된 정책’을 갖추느냐는 것이다.
선출 시한 3~6개월 앞당겨야
김형준 교수는 “19대 총선부터 정치적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후보자 선출시한을 선거 전 3개월 또는 6개월 전으로 앞당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3~6개월 전에 후보자가 확정되면, 선거 직전의 탈당·입당이라는 꼴불견을 없앨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후보자들이 중심이 된 정책 개발과 정책 대결이 가능해질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른바 ‘선진화’ 열풍이 대단한데, 정치의 선진화는 예측 가능한 정치를 만드는 것이고 예측 가능한 정치는 준비에서 시작된다. 그 토대를 만들기 위한 정치관계법 개정이야말로 ‘없는 선거’로 구성될 18대 국회의 첫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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