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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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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어라, 군인 되는 꿈은 꾸지 말아라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난민으로 태어나 난민으로 살아온 레퍼허 학교 교사 레인보우, 네 번째 만남과 이별

▣ 레퍼허(버마)=글·사진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상임활동가

“내년에 꼭 이곳에서 다시 만나!” 잡았던 손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몇 분 뒤 레인보우(31)를 태운 배가 다시 국경을 넘었다. 배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천천히 타이 영토 안으로 걸음을 떼면서 주문이라도 거는 듯 되뇌었다. “그래, 꼭 다시 만나!”

마을 터를 잡자마자 학교를 세워

또다시 ‘그들’을 분쟁 속에 남겨놓고 ‘우리’만 돌아왔다. 네 번째 만남과 이별. 4년을 거듭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매번 ‘다시 만날 수 있을까’란 두려움이 마음을 짓누른다. 특히 올해는 교전을 피해가기 어려울 거란 말에 더욱 겁이 났다. ‘혹여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아닐까?’ 이미 지난해 교전으로 정들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터다.

지난 2005년 처음 만난 카렌의 아이들은 정말 예뻤다. 분쟁 속에서 나고 자라 단 한순간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다. 장난감은 고사하고 그 흔한 딱지나 인형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적은 음식을 기꺼이 함께 나누는 아이들이기에 처음으로 인권활동가의 빈 주머니를 원망했다. 자기보다 어린 아이가 울면 달려가 등을 내밀고, 몸이 불편한 친구의 손을 잡아줄 줄 아는 아이들이기에 마음을 뺏겼다. 그래서 해마다 길을 나섰다.

만나고 접하면서, 깨달았다. 분쟁과 반복된 피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고울 수 있는 건 학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누고 함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친 헌신적인 교사들의 공로라는 것을. 그리고 그 중심에 레인보우가 있다는 것도.

레퍼허 마을에 학교가 들어선 건 지난 2002년. 피난민들이 으레 그러하듯 레퍼허의 어른들 역시 분쟁에 휘말려 단 한 차례도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장래에 무엇이 되겠다는 소망도 가져보지 못했다. 살아남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 레퍼허 마을이 자리를 잡자마자 어른들은 학교를 세웠다. “아이들이 꿈을 갖는 것이 나의 꿈”이라 말하던, 자기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오남매 엄마의 소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레인보우도 그때 처음으로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이들을 꿈꾸게 하겠다’는 어른들의 소망이 어릴 적 그의 부모가 그를 향해 품었던 소망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 군인이 되고 싶었어.” 그의 고향 퀼리는 1984년 쳐들어온 버마군에 의해 파괴됐다. 남자들은 버마군의 학살과 강제 노동을 피해 모두 정글로 숨었고, 남겨진 여자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돼 매일 무거운 짐을 옮겨야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버마군은 동네를 불태우더니 주민들을 모두 강제로 이주시켰다. 운 좋게 그는 그 대열에서 도망쳤다. 그 뒤 타이 쇼클로 난민캠프에서 자랐다. 하지만 5살배기에게 남은 선명한 기억은 그의 유년기를 지배했다. 복수를 다짐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친구들과 함께 군에 자원 입대했을 때가 16살. 하지만 전쟁터에서 목도한 친구의 죽음은 그의 인생을 다시금 바꿔놓았다.

복수를 위해 군인이 되었지만…

“군사훈련을 받고 실전에도 두세 차례 참여했어. 근데 전쟁터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 친구가 옆에서 죽는 걸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지. 총은 피를 부를 뿐이고, 총으론 복수도 평화도 이뤄낼 수 없다는 걸. 총으로 전쟁을 멈출 순 없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느낌.”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때”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뒤 몇 해를 고민하다 그는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함께 입대했던 배꼽친구 마이크로도 뜻을 같이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평화와 카렌의 독립이 실현될 거라 믿지만, 혹시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교육을 통해서라면 카렌을 지키고 평화와 자유를 꿈꾸는 다음 세대를 키워낼 수 있어.” 교육은 그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선택한 ‘무기’였다.

레퍼허에서 총 대신 분필을 들었다. 다행히 몇십 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금세 번성해, 2004년에는 학생이 100명을 넘었다. 2005년에는 중학교를 만들었다. 2008년 현재 총 학생 수는 194명이다. 교장이 된 뒤 첫 사업으로 기숙사를 지었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다닐 학교가 없어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인근 마을 아이들을 위해서다. 2005년 문을 연 기숙사는 학교에 가겠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사나흘을 걸어온 30여 명의 학생들로 채워졌다. 지금은 60여 명의 학생들이 생활한다.

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학교 칠판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선생님들만 겨우 교재를 가졌을 뿐이다. 기숙사 아이들은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린다. 양초도 생필품도 변변치 않다. 학교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은 계속 늘어나지만 재정이 없어 교실도 선생님도 늘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학교는 마을의 희망이자 아이들의 꿈으로 우뚝 섰다. 3년 전 “버마 군인들이 집과 학교를 불태운 뒤 두려움과 공포는 내 인생의 반쪽이 됐다”고 편지를 썼던 초등학교 3학년 나먀케는 “지금은 매일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놀고 공부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18살 포치는 최근 “카렌의 언어와 카렌 국민의 권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교사가 될 뜻을 굳혔다.

넌지시 레인보우에게 “꿈을 이룬 것 같냐”고 물었다.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그가 답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아직 못 바꾼 것이 있어. 소년들의 꿈.” 아직도 많은 아이들이 소년 시절의 그처럼 군인이 되기를 꿈꾼다. 복수를 위해, 배불리 먹기 위해. 10살 전후의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겠다며 군 막사를 기웃거리는 일은 여기선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수의 레퍼허 아이들이 총을 든 군인의 모습을 자신의 미래로 그려낸다. 나 역시 2년 전 카렌민족동맹 혁명기념일 행사에서 소년병들을 여럿 만났다. 당시 14살이던 탁은 “방학을 이용해 군사교육을 받으러 왔다”며 “누구도 내게 군인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카렌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싶다”고 말했다. 탁과 나란히 군사교육을 받던 안데나는 17살이었다.

헤어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최근 레인보우는 학교 바로 앞에 구멍가게를 열었다. 혹여나 교장의 지위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건 아닌지 심기가 불편했다. 조심스레 “웬 가게냐”고 묻자 “책임져야 할 아이가 두 명”이라고 답한다. “다른 수입 없이 교사 월급 500밧(1만6600원)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건 무리”라는 게다.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던 그의 얼굴이 어둡다. 계속 나빠지는 전선 상황도 그를 힘들게 한다. 지난해엔 운 좋게 교전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올해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올해 고등학교를 세우겠노라 포부를 밝힌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꿈은 허무맹랑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난민으로 태어나 난민으로 살아온 그다. 주저하다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갑자기 그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많은 이들이 다음을 기약했지만, 아무도 다시 오지 않았다. 양손에 가득 든 선물 보따리보다 “다시 와준 것이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반겨주던 친구. 그 친구를 헤어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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