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지식인은 아무도 없는가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권력에 갇히고 돈에 묶여 형성된 침묵의 카르텔, 한국 지식계의 위기를 보라

2007년 대선을 향한 초읽기가 시작됐다. 선거일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지만 이미 정책선거는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이른바 ‘BBK 사건’ 등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대한 각종 의혹과 도덕성 논란, 그리고 삼성 비자금 문제를 둘러싼 폭로가 뒤범벅 되면서 대선정국은 ’시계제로’ 상태로 빠져들었다.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가 최근의 대선정국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그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보이는 ‘도덕 불감증’의 한 원인으로 지식인의 ‘실종’을 지적하고 있다.편집자

▣ 고세훈 고려대 교수·공공행정학부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광고

한국 정치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이제 따지는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이래저래 정당정치 60년이요, 이른바 민주화 이후 20년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겐 아직 역사의 신산함을 증언할 정당도, 치열한 논쟁을 통해 벼려지고 숙성되는 이념이나 정강도, 훼절의 유혹들을 견디며 세월을 지켜온 변변한 정치인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대선을 코앞에 둔 작금의 정국이 한국 정치의 부박함을 가장 거칠고도 뻔뻔스럽게 드러내 보여준다 한들, 놀라지 않는다.

특검 대상 확대가 ‘협박’인 세상

광고

정치권 패거리들의 작당문화와 분주한 이합집산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래도 그 조급한 몰골이 지금처럼 적나라했던 적은 없었다. 이른바 지도층 주변에서 날 새면 터지는 파렴치한 도덕적 피폐의 혐의들,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온갖 공허하고 유치한 공방들은 우리를 질리게 만든다. 도덕성 시비에서 한치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대선의 귀추가 암당하다. 연전에 작고한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기업권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벌의 금력에서 발원한 상부상조의 은밀한 고리를 차단할 마지막 보루여야 할 검찰의 두껍고 검은 안면을 또다시 확인해야 하는 처지가 딱하다. 특검발의는 검찰의 업보일 테지만, 그것조차 야당의 발목잡기와 청와대의 딴지걸기로 설왕설래가 도를 넘어섰다. 아니 특검의 대상을 확대하자는 것이 당당한 협박으로 통하는 한심한 세상이니 말 다했다. 지금까지도 청와대를 포함한 정치권은 전근대적 재벌체제의 개혁을 위한 자연스런 호기를 번번이 그냥 팽개쳐왔다.

사회가 이미 약육강식으로 피투성인데 정치마저 약자 편에 서지 않는다면, 그런 정치는 불필요하다. 정치가 사회의 불가피하고 가장 본질적인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정한다고 할 때, 그 조정이란 변화무쌍한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교한 구상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일에 귀착되며, 이를 총체적으로 조직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정당일 것이다.

정치적 갈등이란 정당 간의 이념이나 중·장기적 전망, 단기적 정책을 둘러싼 정비된 갈등이어야 한다. 정당정치를 핵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리 신장에 닿게 되는 것도 이런 과정을 거친다. 정치에서 원칙이 실종되면, 사람들 간의 막무가내식 권력투쟁만 남는다.

광고

‘멀쩡했던’ 교수들의 꼴사나운 충성경쟁

정치에서 아무런 규범적 시그널도 전달받지 못한 유권자들은 민주주의의 유용성을 체득하기도 전에 피동화되고 파편화돼서,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하고 공격한다. 오늘날 이 땅의 유권자들은 잘못된 정치, 잘못된 정치문화에 길들여지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나 불의와 부도덕에 대한 죄의식을 상실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인의 역할이 각별하다. 지식인은 정치와 유권자 사이의 뒤틀린 관계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부단한 조율사가 되어야 한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의 실상을 그린 에서, 지식인이란 “우리는 지식인들이다”라고 외치는 자이며 그런 외침에는 불손하고 무례한 도전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지식인에는 비판적 지식인이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일체의 권력으로부터의 단호한 거리두기야말로 지식인들이 취할 일차적 자세이다. 권력은 도취적이고, 금력과 결합된 권력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작금의 한국 정·관계와 재계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에 대한 지식계 일반의 침묵 카르텔은 비판 행위를 위한 조건들의 작동이 원천적으로 불능화된 데 원인의 일단이 있다.

우선 한국처럼 지식 위주의 보상 체계가 두드러진 사회에서 지식인은 존재만으로도 권력자, 가해자의 위치에 서기 쉽다. 그런데도 저 권력 언저리에 부나비같이 몰려 있는 지식인 군상들을 보라. 지식인을 ‘모시는’ 정치권의 삼고초려는 옛말이 되었고, 권력의 손짓에 노심초사하는 지식인들만이 넘쳐나고 있다. 해방 이후 무수한 지식인들이 정치권을 오가며 지식과 명성을 권력과 거래해왔지만, 그들이 한국 정치를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가를 떠올리는 내심은 고약하다. 출사의 변은 변함없이 거창할지언정, 퇴장은 사실상 거의 불명예의 소리 없는 강제 퇴진이기 십상이었다. 오히려 앞장서서 정치의 타락에 일조해온 일그러진 지식인상만이 역사에 명멸한다. 그래서 멀쩡했던 교수들이 권력을 접하면서 막무가내식 몸싸움으로 충성경쟁에 나서는 꼴을 번번이 지켜봐야 하는 심사는 더 참담하다. 만일 한국 정치의 위상이 그나마 나아졌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권력 세계 밖의 노력과 투쟁에 힘입은 덕이다.

단테의 지옥불 앞자리는 ‘침묵했던 중립’

오늘날 돈의 조직적 위력이 스며들지 않은 사회 영역은 없다. 지식계의 경우는 그 방식과 정도가 심각하다. 금력은 거대 재벌들이 소유한 방대한 연구기관들을 통해, 재벌언론과 언론재벌을 통해, 대학캠퍼스에 재벌 이름을 달고 속속 들어서는 건물들을 통해, 연구비와 각종 금전적 수혜를 통해, 지식계 깊숙이 스며 있다. 언뜻 무해하고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실상이 한국 사회의 전근대적 연고주의와 결합될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부정적 함의는 불을 보듯 명확해진다. 한두 다리 건너서도 이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인이 있다면, 그는 필경 ‘무능’하든가 별종으로 왕따되기 일쑤다. 권력에 갇히고 금력에 묶인 지식인들의 언행의 귀추가 어디에 도달할지는 너무 자명해서 이제 민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식의 한계와 지식인의 나약함을 절절히 그린 에서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오늘날 권력 주위를 서성이는 한국 지식인 백태를 좋게 봐서 방황이라고 치자. 그런데 방황하는 지식인들보다 더 고약한 경우가 바로 ’빌라도’식 지식인들이다. 빌라도는 자기 책임을 슬쩍 놓아버림으로써 예수의 십자가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은 형벌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짐을 벗었다고 했지만, 오늘도 교회는 예수의 고난이 그에게서 비롯됐다며 주일마다 신앙고백을 한다. 단테의 지옥 편은 이승에서 불의 앞에 중립을 표방하며 침묵했던 점잖은 사람들을 가장 먼저 배치시킨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정밀하게 계산된 혹독한 형벌이다.

우익은 사람이 무섭고, 좌익은 이론이 무섭다. 우익은 사람을 통해 이론을 도그마로 만들고, 좌익은 이론을 통해 사람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관찰에 따르면, 당시 영국의 우익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지나쳐 파시즘을 관용했고, 좌파 지식인들은 파시즘에 대한 증오가 넘쳐 스탈린 공산주의에 침묵했다.

우리는 영국 지식인들의 이런 역사적 오류마저 부러워해야 한다. 이론과 원칙이 없으면, 그나마 우익도 없고 좌익도 없기 때문이다. 정책과 이념의 대결이 실종되면, 사적인 이해관계와 감정에 따라 우연히 갈리는 사람 중심의 네 편, 내 편만이 남는다. 그 와중에 가장 초보적인 도덕적 질문조차 회피되기 일쑤고 공범자의 너그러움만 넘친다. 지식인의 외침은 단연코 권력 세계 밖에서 들려와야 한다. 지식인이 오지랖이 넓으면, 곳곳에 드리워진 기득권층의 그물에 걸리게 돼 있다.

거리 위에 드러난 ‘위기’를 보라

오늘 아파트 정문을 나서니 과일장수 아주머니의 좌판이 또 하나 늘었다. 광주리, 리어카, 트럭 위에 채소, 과일, 꽃, 옷가지, 순대, 붕어빵 그리고 최근엔 산낙지를 파는 사람들까지, 아파트 앞 도로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루의 매상을 대략 추측해보니, 그들의 고단한 좌판들은 그냥 거리에 나앉을 수 없는 인생들의 막막한 궁여지책일 터였다. 차도에는 부쩍 늘어난 고급 차들이 쌩쌩 달린다. 영국의 사회경제사가 리처드 토니는 빈부의 차이가 거리 위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할 때, 이미 그 사회는 위기에 들어선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국 지식계의 위기가 한국 사회의 위기와 겹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