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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에 비정규직을 보내겠다”

등록 2007-11-09 00:00 수정 2020-05-03 04:25

홍세화 기획위원이 만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 전주=글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홍세화가 권영길을 만났다. 지난 10월30일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는 전북 전주에 있었다. 전남 순천에서 출발한 그의 민생 탐방 ‘만인보’는 어느덧 13일째를 맞고 있었다. 권 후보의 하루는 아침 8시30분 5일장이 열리는 완주군 봉동시장을 도는 것으로 시작됐다. 시장 귀퉁이에선 아흔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콩 한 되, 호박 네 개, 배추 세 단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오전 11시 닷새간 전북 지역 일정을 마무리하는 권영길은 기자회견을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얘기로 풀어나갔다. “매우 착잡하다. …우리 사회는 아흔이 다 된 노인을 팽개치고 있다. 국가라고 할 수 없는 나라에 우린 살고 있다. 정말 완전히 세상을 바꾸지 않고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권영길은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이 되어 돌아오겠다며 전북도청 기자실을 떠났다.

대담 중 제안 내용, 이틀 뒤 수용

권영길은 오랜 동지를 만난 듯 홍세화 기획위원을 반갑고 편하게 맞았다. 대담의 의미는 컸다. 홍세화 기획위원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비정규직을 배정하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이틀 뒤 권영길 후보는 이를 수용했다. 권 후보는 11월1일 경북 포항 지역 동국대 비정규직 일반노조 조합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내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자를 국회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홍세화(이하 홍): 일부에서는 현장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만 도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냐는 질문도 한다. 서울에 후보가 없으니 (언론을 통해)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거 같다.

권영길(이하 권): 그건 후보가 중앙에 있냐 지방에 있냐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3일 동안 지역을 돌고 나서, 되레 경선 끝나고 바로 (만인보를) 시작했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선 뒤 한 달 동안 서울에 있으면서 ‘이렇게 관성적으로 하다간 안 되겠다’ 싶어 내려왔다. 언론의 철저한 배제 속에서 뭘 할 수 있을 것이냐는 고민도 있었다. 언론 탓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변칙적 행보, 특단의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 민생 탐방을 택한 거다.

(잠시 대담이 중단된다. 점심을 거른 홍세화 기획위원은 자장면을 들었고, 권영길 후보는 보약을 꺼내 마셨다. 한의사인 당의 전북 고창군위원장이 지어준 보약이란다. 자세히 보니 권 후보는 수면 부족으로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하루 세 시간 이상 자기 힘들다고 했다.)

홍: 언론의 의도적인 배제를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5년 전의 경우 후보가 “살림살이는 나아지셨습니까”를 통해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는데 이번 선거에선 그런 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등을 좀더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걸 개발하는 데 소홀한 게 아니었나? ‘코리아연방공화국’이란 구호는 좀 멀게 느껴진다. 당의 정체성에 대해 혼선이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권: (권 후보는 불쑥 당이 5년 전과 너무 달라진 모습을 나 자신도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담 정리자가 ‘뭐가 달라졌다는 건가?’라고 묻자, 당원들의 헌신과 열정이 식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12월19일 이전에 다시 당원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거라고 얘기했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정파적 갈등에서 파생된 게 아니다. 수없이 얘기했지만 통일 운동의 개념 속에서 나온 용어가 아니다. 몇몇 사람이 정파적 갈등으로 해석하고 그게 확산되면서 부정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흐른 대표적 사례가 코리아연방공화국이다. 이 용어는 노회찬 의원이 경선 때 ‘제7공화국’이라고 했던 것처럼 새로운 나라, 새로운 공화국이란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을 담은 거다. 물론 제기되는 문제를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홍: 2002년과 달리 2007년엔 감흥조차 없다. 이런 변화가 어디서 온 거냐? 후보도 이를 감지한다면 그 이유와 배경은 어디서 비롯된 건가?

권: 그런 문제는 중앙과 지역의 괴리도 한 원인이다. 또 하나는 당에서 사업을 기획하고 그 다음에 토론, 의결, 집행, 평가하는 게 일관성 있게 이뤄지지 못했다. 그냥 상투적으로 관성적으로 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했다. 몇 년 전부터 당 사업을 평가하면서 늘 백화점식 방식이 지적되고 선택과 집중을 얘기했는데, 아직도 하나를 하더라도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만한 사업을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

대선보다 총선, 지역구보다 비례대표?

홍: 민주노동당도 대선 후보를 내야 한다. 그 절차가 있다. 그래서 경선도 했다. 그런데 겉으론 보이지 않지만 당 지도부들이 대선보다 총선을 겨냥해, 더 정확히 말하면 비례대표를 겨냥한 거 아닌가 싶다. 많은 당원들이 총선 비례대표 선출 방식을 놓고 일종의 나눠먹기를 하는 거 아니냐고 보고 있다. 지도부가 겉으론 대선을 말하지만, 속으로 내 차례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던 거 아닌가. 후보께서 이런 문제를 인식한다면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권: 당의 비례대표 후보 선출과 관련해 다시 전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것을 생각 안 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실제적으로 대선에 내가 후보로 확정되기 이전에도 나온, 이번에 민주노동당에 가장 중요한 건 총선이라거나, 대선을 잘 치러야 총선을 잘 치른다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다. 그러나 나는 역으로 얘기하고 싶다. 지금 총선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면 구체적인 방안 수립도 달라진다.

민주노동당에 현재 비례대표 의원들과 한 명의 지역구 의원(권영길)이 있다. 당의 현실적 힘을 판단하는 건 지역구 의원이 몇 명이냐다. 그런데 내년엔 2004년처럼 두 명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엔 한 명도 없을 수 있다. 그러면 현실 정치권에선 민주노동당은 거의 괴멸이다. 그래서 지역구 당선자를 내는 게 중요하다.

홍: 비례대표제는 8명이 들어간 뒤 거꾸로 부메랑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 당의 영향력이 커지려면 지역구 의원이 나와야 하는데, 당 지도부는 거기에 관심이 없다. 당직 선거에서 당원들이 투표를 하기 때문에 당원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는 잘하지만 지역구, 더 나아가 민중과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는 못한다. 울산에서 지역구 의원(조승수)이나 구청장을 놓쳤지만, 치열한 연구도 보고서도 안 나왔다. 이런 게 당이 보여줄 모습인가? 비례대표 문제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권: 이미 늦었다고도 할 수 있다.

홍: 그걸 돌파해낼 수 있는 건 후보인 당신 아닌가. 말로만 비정규직 하지 말고 비정규직을 비례대표에 앉히는 거다. 그러면 국민도 언론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당이 집권을 목표로 한다면 수권정당으로서 자질을 갖춘 그림자 내각을 준비해야 한다. 예컨대 교육, 경제, 국방 등에 식견을 갖춘 분들에게 비례대표를 주어야 한다. 2004년 총선 때 확보한 비례 1~8번까지는 당 지도부가 넘볼 자리가 아니다. 당 지도부 역할을 했던 분들은 이후 자신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신들이 한 몫만큼만 차례가 돌아가야 한다.

권: 비례대표는 당이 갖고 있는 지형을… 암묵적 연합이랄까.

(권 후보는 10월31일 비정규직 400만 명 감축이란 일자리 공약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날 “장애인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그 이전에 여성들에게 정치 진출의 기회를 대폭 보장한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가 국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진보정당 대선 후보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체념했던 서민들을 다시 분노하도록

홍: 나눠먹기 행태죠. 후보가 이 문제를 놓치면 안 된다. 그게 당을 살리는 길이다.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이 이렇게 된 원인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권: 그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홍: 아닌 척하면 안 된다. 지역구 문제나 그림자 내각, 비정규직 문제에 진정성을 갖고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권: 홍 선생의 진단에 동의한다. 그런 고민을 안 한 게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홍: 민주노동당의 형편은 이런데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고공행진을 한다. ‘BBK 사건’이나 황당한 교육정책을 내놓는데도 지지율이 기울지 않는 건 어떤 배경 때문이라고 보나?

권: 서민들 삶은 거의 파탄 났다. 몇 년 전까지는 분노하다가 이젠 완전히 체념했다. 그래서 이명박씨가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도곡동 땅이 이명박 후보의 것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큰 영향이 없는 거다. 이명박이 어쨌든 대재벌의 회장이었으니 경제는 좀 나아지지 않겠냐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된 거다. 서민의 체념을 분노로 바꾸어야 한다. 이명박의 경제가 실제로는 노동자, 농민을 다 죽이는 경제라는 걸 가슴에 와닿게 해야 한다.

홍: 체념을 분노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보나? 조희연 교수는 ‘대중의 급진화’란 표현도 썼던데?

권: 그래서 11월 100만 민중대회를 한다. 당 경선 때 불쑥 꺼낸 얘기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100만 명이 모인다면 모임 그 자체가 핵폭탄 같은 폭발력을 갖고 있다. 거기 참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생각할 때 다른 방안은 없다.

홍: 피곤하고 외로워 보인다.

권: 수면 부족이다. 외롭다는 데 동의한다. 권영길은 외롭게 살아오면서 만들어졌다. 1996~97년 총파업 때는 더 외롭고 비난과 공격도 더 받았다. 하지만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홍: 민주노동당이 독자 노선을 걸어 대선에서 몇%를 얻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만큼이 그대로 단일화된 범여권 후보한테로 갔다면, 이명박을 떨어뜨릴 수 있게 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랄프 네이더처럼 결국 독자 출마로 부시한테 권력을 넘겨줬다는 비판에 부닥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미리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준비돼 있는지 묻고 싶다.

권: 이명박 후보를 이기기 위해 다 뭉치라는 건 안 된다. 셈으로 해선 안 된다. 나는 가치의 연정을 제안했다. 여러 접근법이 가능하다. 일단 화두만 던졌다. 그 다음 과정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

홍: 아까 체념을 분노로 바꾸겠다는 것과 관련해 당의 정확한 정책 방향이란 게 국민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뭘 말하고 싶은지 간단히 구호로 정리해서 말해줄 수 있나?

권: 고민 끝에 나온 구호성 용어론 ‘우리가 살고 있는 게 나라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데 아니다’라는 게 있다. 나라가 아니니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조금 추상적이긴 하지만 ‘서민의 지갑을 채워주겠다’는 것도 있다.

무상교육·무상의료 로드맵 보여줘야

홍: 무상 의료나 교육, 서민에겐 복지, 부자에겐 세금 등의 구호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게 돼버린 건지 궁금하다.

권: 아니다. 그건 민주노동당의 생명처럼 돼 있다.

홍: 그게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

권: 그렇게 얘기해선 안 된다. 무상교육을 수없이 얘기해왔다. 이명박이 뭔 얘기를 하면 다들 믿는데, 민주노동당이 얘기하면 안 믿는다. 구호의 문제가 아니다. 집권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집권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생명이다.

홍: 국민들이 구호는 아는데,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권: 그게 민주노동당의 딜레마다.

홍: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것도 한 이유가 아니겠나.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 가능하다는 건지 연구해야 하는데, 구호만 있고 숫자나 로드맵이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니 신뢰를 못 주고 영향력 있는 지지로 나타나지 못하고, 다시 집권과 멀어지는 순환 구조가 문제다. 이번 대선을 보면 기본적 정책 구조가 뭔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코리아연방공화국 등 딴 얘기를….

권: (얼굴 표정이 변하면서) 대담이 아니라 자꾸 토론식으로 간다. 권영길은 서민 지갑을 채우겠다는 걸 끊임없이 강조했다. 어떤 말로 전달할지 못 찾아내고는 있지만… 그걸 내팽개쳤다는 건, 그건 권영길을 모욕하는 거다. 누가 팽개쳤나?

홍: 예민하게 반응하니, 나로선 당혹스럽다.

권: 자꾸 얘기를 하니…. 사과하겠다.

홍: 내가 그런 표현을 썼다면 지나쳤다. 나머지 것들을 이어가자. (짧은 침묵이 흐름)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있는 국민들에게 어떻게 확신을 줄 수 있는지?

권: 실현 가능성은 재원과 현실적인 힘, 두 가지의 문제다. 재원은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부유세와 사회복지세 등으로 36조5천억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단계적으로 로드맵을 마련하고 더 정치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홍: 혹시 대선에서 안 되면 내년 총선에 다시 출마하는 건가?

권: (웃으며) 대선에 당선되려고 나왔는데, 당선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홍: 지지율이 앞으로 오를 것으로 확신하는지 궁금하다.

권: 밑바닥 민심을 잡는 길이 어떤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전남·북을 돌면서 농민들과 감정 교류의 폭을 넓혀놨다.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숙제가 남았다. 머리가 굉장히 무겁다.

홍: 암튼 ‘가치의 연정’이라고 표현한 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국민들이 많이 궁금해할 거 같다.

당 전체가 ‘진보통’ 겪는 듯

권: 홍 선생이 제기한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비례대표 문제는 단순한 당내 문제가 아니라, 진보정당의 앞날을 열어가는 데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늘 생각해왔다. 다시 한 번 그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을 던져주셨다.

홍: 후보가 열심히 하는데 너무 떨어져 있어서 혼자 고생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당이 중심에 서서 나가지 못하는 게 안타깝고 답답하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 진보하기 위해 ‘진보통’(성장통이란 말을 변형시킴)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담이 끝난 뒤 홍세화 기획위원은 강연을 위해 전주교대로 향했고, 권영길 후보는 울산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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