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탈당’부터 ‘탈당 예고’까지 열린우리당의 탈당 파노라마
▣ 김보협 기자bhkim@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탈당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대통합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겠다.”(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인터뷰, 6월1일)
“(민주당과 중도개혁통합신당이) 소통합을 강행할 경우 탈당을 포함한 중대 결단을 할 수도 있다.”(민주당 김효석·이낙연·신중식 의원 등, 6월1일)
“당초 6월15일로 예정된 탈당 시점을 10일 이전으로 앞당기는 방안을 비롯한 대응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열린우리당 정대철 상임고문, 김덕규·문학진 의원 등, 6월1일)
“최고위원회가 의결해 선도 탈당까지 하면서 대통합신당을 준비하라고 하면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문희상 전 열린우리당 의장, 5월31일)
참 희한하다. 올해의 정치 상황이 역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와 다른 점을 꼽아보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지만, 최근 하루이틀 사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주요 정치인들이 탈당을 언급하고 나선 점도 그중 하나다. 하나같이 올 연말 대선 승리를 위한 대통합을 강조하지만 대통합신당을 주장하는 의원들 수만큼이나 대통합에 이르는 길은 제각각이다.
누구나 말하는 대통합, 길은 제각각
이는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 체제의 활동 마감 시한과 관련돼 있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2월 임시 지도부 성격의 정 의장을 추대하면서 6월14일까지 통합신당을 만들기로 했다. 그때까지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전당대회 직전까지 이어졌던 탈당 행렬이 재연될 수 있다. 몸만 열린우리당에 남아 있고 마음은 이미 떠난 의원들이 제 살길을 찾아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탈당과 관련된 정치 행보도 과거와 양상이 달라졌다. 기껏해야 탈당 엄포, 탈당, 잔류 등 분류가 비교적 간단했다. 요새는 복잡해졌다. 탈당 날짜를 미리 못박는 ‘탈당 예고’가 있는가 하면, 시기와 방식에 따라 ‘선도 탈당’ ‘기획 탈당’ ‘지도부 승인 탈당’이라 이름 붙일 만한 탈당파도 생겨났다.
가장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는 쪽은 ‘정치 생명’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정세균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중진들이다. 정 의장은 “6·10항쟁 기념일인 10일께 대통합신당 창당 선언을 하기 위해 제 정파와 협의하고 있다”며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창당 선언이 14일 이후로 늦춰질 수 있다”고 밝혔다.
정 의장은 열린우리당 의원 15~20명 정도가 6월 초순 선도 탈당해, 시민사회 세력과 함께 ‘제3지대’에서 창당 선언을 하고 창당 준비위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주로 학생운동 출신의 ‘386’ 의원들과 몇몇 중진들이 거론되는데, 이 경우 당의 정체성이나 당 지도부의 처신을 비판하면서 탈당을 결행했던 과거의 탈당과는 궤를 달리한다. 탈당이라기보다는 김대중 정부 시절 자민련을 국회 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이 당적을 옮겨 ‘의원 꿔주기’ 논란을 불렀던 사례에 가깝다. 지도부의 승인을 받아 탈당하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먼저 파견하는 형식이어서 ‘기획탈당’이란 비난을 들을 소지가 있다. 문 전 의장의 “최고위원회가 의결해 선도 탈당까지 하면서 대통합신당을 준비하라고 하면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발언은 자신도 그런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얘기다.
시민사회 쪽에서도 미묘한 변화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의원들과 ‘통합번영 미래구상’ 등 시민사회 세력이 먼저 ‘제3지대’를 만들게 되면, 올 초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던 중도개혁통합신당과 민생정치모임, 대통합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이 여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대통합신당에 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1차 난관은 시민사회 세력이 이런 구상에 힘을 보태줄지 여부인데, 그동안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해왔던 시민사회 쪽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통합번영 미래구상의 최열 공동대표는 6월1일 한국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현실 정치인 없이 신뢰 있는 정당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제도권 내에도 개혁적인 분들이 상당수 있다”며 “가급적 10일을 전후해서 창당을 제안하고 발기인대회를 할 때는 정치인들도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선도 탈당 의원’과 최 대표가 언급한 ‘제도권 내 개혁 정치인’의 교집합이 클수록 1차 관문을 통과할 가능성이 커질 전망이다.
당 지도부의 ‘선도 탈당’ 혹은 ‘기획 탈당’과 속도 경쟁을 벌이고 있는 또 다른 탈당 흐름은 정대철 상임고문이 주도하고 있다. 5월30일 정 의장 체제의 활동 마감 시한에 맞춰 탈당 시점을 6월15일로 못박았던 10여 명의 의원들은 ‘거사일’을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탈당에 동의하는 의원들의 탈당계를 미리 받아두고 탈당 날짜까지 못박는 것을 보면, 이들의 탈당 실행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지만, 정 의장 등 당 지도부의 대통합신당 구상과 자신들의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당 지도부가 하지 못한 대통합신당 추진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겠다는 것인지 등은 탈당 의지만큼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김근태·정동영 전 의장 등 ‘대주주’들이 가세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선택지가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의 김효석·이낙연·신중식 의원의 탈당 공언은, 민주당과 중도개혁통합신당의 ‘소통합’ 움직임과 관련돼 있다. 양당의 통합 협상은 거의 의견 접근을 이룬 듯했지만, 양당의 통합 뒤 다른 정치세력과의 통합, 구체적으로는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핵심세력과의 통합 여부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이낙연 의원 등 통합파 세 의원은 특정 인사·세력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소통합’이 이뤄진다면 대통합을 이룰 명분이 없으므로 탈당하겠다는 것인데, 양당의 통합 줄다리기는 쉽게 결론이 날 것 같지 않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6월 들어 각 정치세력의 탈당과 통합 움직임이 빨라지는 이유는 시간의 절박성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무대를 만들고 공연을 시작했는데,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나머지 정치세력은 아직 무대도 만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상황 인식은 비슷하다. 추석 연휴(9월23~26일) 전에는 완전국민경선(오픈프라이머리) 방식으로 대선 후보를 선출해야 하고, 시간의 역순을 따져볼 때 늦어도 7월까지는 대통합신당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더 있다면 통합을 자신들이 주도하고 싶어한다. 절박함에도 속도가 붙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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