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열린우리당·고건·민주당·국민중심당 등 가칭 ‘중도포럼' 창립 추진…한나라당은 ‘보수’, 민노당은 ‘진보’, 나머지 세력은 뭉쳐야 산다? </font>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중도 바람이 불고 있다. 정치의 계절이 왔다는 방증이다. 진보와 보수, 혹은 좌나 우 양극단에 서 있던 정치 세력은 큰 선거를 앞두고 중도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 선거라는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길’이라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우리나라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교적인 오랜 훈련에서 그리 된 것이기도 하지만 예부터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무난히 중도를 택하는 것이 우리의 구미에 맞는 행실이었다”고.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그런데 최근 중도를 내세우는 일부 정치인들의 움직임은, 그동안 정당들이 보여왔던 일반적인 중도 지향과는 차이가 있다. 중도라는 브랜드 가치를 내세워 모이고 이를 디딤돌 삼아 정치세력화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친다. 당의 진로를 놓고 갈팡질팡하는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
열린우리당 탈출 위한 포장인가
열린우리당 내에서 보수적인 성향의 의원들이 모인 ‘안개모’(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가 적극적이다. ‘고건 전도사’를 자처하는 안영근 의원과 함께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김성곤 의원은 12월15일 “정치권의 중도 세력이 공동 논의할 수 있는 가칭 ‘중도포럼’이란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며 “이 포럼에는 열린우리당 내 중도 세력, 고건 전 총리,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4개 그룹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4개 그룹에 속한 인사들이 각각 당적을 유지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만나 통합신당의 흐름을 형성하겠다는 얘기다. 김 의원은 이런 제안을 19일 당내 중도 성향의원 모임인 희망21포럼, 실사구시, 안개모의 공동토론회에서 공식화한 뒤 1월 중 다른 그룹과 함께 중도포럼의 창립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고 전 총리는 “김 의원과 수차례 만나 의견교환을 가졌고 중도 성향의 정치적 연대를 위한 대화와 논의의 틀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앞으로도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즉각 화답했지만, 민주당 등 다른 그룹이나 심지어 당내 다른 모임의 반응은 뜨듯미지근하다. 당장 김 의원이 ‘고건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포럼이 고 전 총리를 추대하기 위한 연대기구로 비칠 수 있고, 당내에서 진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당 밖에서 제3의 기구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제2의 후단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민주당의 김효석 원내대표도 제안은 받았으나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는 “국민적 심판을 받은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는 모양새라면 국민의 호응을 얻기 어렵고, 실패한 정권에서 탈출하기 위한 포장이라면 더더욱 참여하기 어렵다”며 “중도포럼 참여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운동권 출신+한나라당 개혁파 조합도
고 전 총리 중심의 통합신당을 지향하는 중도포럼과는 다른 중도 모임을 지향하는 정치 세력이 또 있다. 김부겸·조정식 의원 등 원적지가 한나라당인 몇몇 열린우리당 전·현직 의원들이다. 이들은 12월21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릴 ‘대한민국 선진화 대회’에 참석할 정치권 안팎의 인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진 코리아 준비모임’이라는, 아직은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단체에서 주최하는 행사인데 한나라당 대선주자 가운데 한 명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격려사를 하고 박세일 전 한나라당 의원(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이 발제자로 나선다. 전략가로 손꼽히는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도 참석한다. 이쯤 되면 친한나라당 성향의 토론회이겠거니 생각할 텐데 참여자의 면면이 이채롭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에서 영향력 있는 전·현직 의원들과 종교계·학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할 것으로 전해졌다.
열린우리당에서 김부겸·유인태·원혜영·조정식·신학용 의원, 민주당에서 김효석·김종인 의원이 참석하고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이강철 노무현 대통령 정치특보도 자리를 함께할 예정이다. 원희룡 의원 등 일부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은 참석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들과 한나라당 개혁파들의 조합이다. 대부분 현 정부 들어 개혁·진보에 대한 피로도가 증가하면서 피해를 본 이들이며, 현 시점으로 국한해보면 소속 정당에서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고 궁지에 몰려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날 모임에 대해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은 “보수, 진보 간의 대립이나 지역주의를 뛰어넘는 큰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며 “중도개혁 세력이 통합해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효석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금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정당은 한 지붕 두 가족, 세 가족이 됐다”며 “(정치 세력을) 진보와 중도, 보수 세 개의 세력으로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원내대표는 지난 11월9일 국회에서 대표연설을 하면서 손 전 지사와 고진화 의원 등 한나라당 개혁 성향 의원 몇몇을 지목한 뒤 “그 자리가 불편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보수, 민주노동당은 진보로 두고 나머지 세력은 중도의 깃발 아래 뭉쳐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참석자 수만큼 동상다(多)몽?
하지만 이 대회의 참석자들 모두가 김 의원, 김 원내대표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김부겸·조정식 의원 쪽은 이날 대회에서 조심스럽게 ‘중도 세력의 정치세력화’, 즉 신당에 관한 언급을 할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수준이지만 다른 참석자들은 그렇지 않다. 손학규 전 지사만 봐도 그렇다. 이쪽저쪽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많고 중도 세력의 통합이 이뤄지면 우군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한다는 게 손 전 지사 쪽 설명이다. 참석자들의 꿈만큼이나 많은 ‘그림’이 존재할 수 있다.
어느 정치 세력이 무엇을 대표상품으로 내세우건 그들의 자유다. 다만 현명한 유권자들은 그들의 입을 보고 투표하지는 않는다. 걸어온 길과 갈 길을 본다. 그래서 진보이건, 보수이건, 중도이건 내용이 실하지 않으면 다 허언이 되고 만다. 진보와 보수에 비해 중도는 자체 논리 구조가 빈약하다. 때로는 진보를 취하고 때로는 보수를 취한다. 그래서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지만 중도 역시 상대적 개념이다.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서 진보와 보수가 분명할 때 중도가 설 땅도 탄탄해진다. 그러나 우리 정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는 정책과 이념 노선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 지역적·역사적 배경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나라당은 보수, 열린우리당은 진보여서 그 사이에 중도의 넓은 공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중도’를 대표상품으로 내걸고 나오는 정치 세력이 있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혹시 다른 의도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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