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이 쓰라고 만들어준 ‘클린 카드’로 한살림 장만하신 산기평 직원들…산자부 산하 다른 공기업들도 접대비 한도를 엄청나게 초과한 곳 많아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공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기업의 운영을 정부가 보증서주고 지원해주기 때문에 빚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 탓이 크다. 여기에 상당수 공기업의 ‘주인 없는’ 소유 구조는 임직원의 도덕적 해이를 낳기 쉽다. 외부의 끊임없는 비판에 공기업들이 몇 년 전부터 ‘윤리경영’ ‘경영혁신’을 외치지만, 과거보다 더 나아졌다는 증거를 찾기란 어렵다.
헬스클럽에 골프용품까지 펑펑
지난해 3월31일 한국산업기술평가원(산기평)에 근무하는 김아무개씨는 인터내셔날클럽 매니지먼트(헬스클럽)에서 49만원을 결제했다. 사용된 카드는 회사 경비를 지출할 때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법인카드였다.
그런데도 김씨가 개인적 용도에 법인카드를 쓴 것이다. 산기평의 또 다른 김아무개씨는 같은 해 7월15일 미국의 공인 영어시험인 토플(TOEFL) 응시료 59만원을 같은 방식으로 결제했다. 이들 이외에도 회삿돈을 제돈 쓰듯이 한 임직원들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후 직원 윤리강령 실천의 일환으로 지난해 8월부터 도입된 ‘클린 법인카드제’가 시행되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까? 달라진 것은 없다. 되레 악화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지난 1월 산기평의 한 직원은 경기도에 있는 대형 유통점에서 158ℓ짜리 김치냉장고를 샀다. 가격은 59만8천원이었다. 회사 물품이 아니었지만 이 직원은 법인카드로 대금을 지불했다. 또 다른 직원은 대전에 있는 대형 할인마트에서 골프공, 골프장갑 등 72개의 품목을 사는 데 든 72만9천원을 법인카드로 계산했다. 법인용 카드가 개인용 카드로 전락한 것이다.
산업자원부 산하 정부기관인 산기평은 지난해 8월부터 임직원 거의 전원(162명)에게 법인카드(이른바 클린카드)를 지급했다. 애초 뜻은 좋았다. 2004년 당시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등의 지적에 따라 도입된 것으로, 회사 경비를 지출할 때 법인카드 사용을 원칙으로 정해 예산 집행·관리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법인카드 사용수칙도 마련했다. 업무 목적의 경비처리에만 사용토록 한 것이다. 1인당 한도는 적게는 월 100만원에서 많게는 2천만원까지 부여됐다. 산기평은 단란주점이나 나이트클럽, 룸살롱, 노래방, 안마시술소, 미용원 등에서는 사용하지 말도록 거래제한 업종을 지정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오히려 클린카드를 도입한 뒤 임직원들의 씀씀이는 더 헤퍼졌고 용처도 ‘클린’(깨끗)하지 못했다. 산기평이 “노래방, 유흥주점, 골프장 등은 클린카드제 도입 뒤 원천적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지만, 카드 전표의 상호 확인을 통해서 ‘~단란주점’ ‘~주점’ ‘~가요주점’ 등 거래제한 업종에서 버젓이 클린카드로 긁은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20억원의 정부출연금을 해마다 지원받는 산기평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는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실들은 한나라당 이성권 의원과 배일도 의원이 밝혀낸 것으로, 산업자원부 산하 공기업들의 방만한 법인카드 사용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증빙서류의 45%가 대상 불분명
이성권 의원은 회계사의 도움을 받아 정리한 A4용지 22쪽짜리 ‘한국산업기술평가원의 법인카드 사용과 문제점’이란 보고서에서 이같은 문제점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보고서를 잠깐 보자. 산기평은 장부 작성에 대한 기준부터가 불명확하다. 자신들이 마련한 ‘원규집’은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에 의한 기업회계기준을 따른다고 했지만, 실제론 접대비·기부금·급여·복리후생비·소모품비 등의 계정과목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대외협력비·사업추진비·기타업무비·업무협의비·국회업무 활동비·업무추진비·비밀유지회의비 등으로 세부 계정을 관리해왔다.
제정된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셀 수 없다. 산기평은 원규집에 “전표는 증빙에 의해서 작성되어야 하며 작성 일자, 계정 과목, 금액 및 거래 상대방, 내용 등이 명기되어야 한다”고 밝혔지만, 상당수의 증빙서류가 대상을 불분명하게 기재하고 심지어 대상란에 아무런 기재를 하지 않은 증빙서류들도 있다. 지난 1월 한 달 동안 처리된 증빙서류 가운데 대상이 불분명한 경우는 카드결제액의 45%에 달한다. 거주지 주변, 할인마트, 헬스클럽 등에서 사용한 것과 공휴일 카드 결제액, 출장지와는 다른 장소에서 출장 기간에 결제된 금액 등 상당 부분이 사적인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법인카드 결제액이 엄청나다고 이성권 의원 쪽은 보고 있다. 상급기관(산업자원부) 소재지(경기 과천) 주변의 카드사용액이 늘고, 50만원 이상 접대비 집행시 상대방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하도록 한 정부 산하기관 예산 관리기준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같은 날짜에 동일한 카드주가 두 차례 이상에 걸쳐서 결제한 사례가 많은 것도 문제다. 산기평은 “주5일제 시행 뒤 주말을 활용해 세미나와 심의위원회 개최 등 평가관리 업무가 진행되고 있어서 공휴일에도 법인카드 집행이 발생하고, 과천 지역을 위주로 경비 지출이 집중된 것은 정부 관련 부처와의 업무 협의 등에 기인한 것”이라고 일부 해명하면서도 “법인카드의 개인적 이용 사례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를 조사한 뒤 확인될 경우 중징계 등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성권 의원은 “이같은 행위는 도덕적 타락뿐만 아니라 국고의 유용, 자산의 횡령 또는 배임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임이 틀림없다”며 “국민의 혈세를 눈먼 돈 취급하는 원장과 공공기관의 돈으로 사익을 추구한 임직원을 처벌하고 감사원의 감사와 탈루한 소득세를 추징할 과세 관청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무조사 받지 않고 내부 감사도 형식적
산업자원부 산하 다른 공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도 심각하다.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지난해 접대비 한도는 5천만원밖에 안 되지만 실제 지출된 접대비는 12억6천여만원으로 2385%를 초과했다. 가스안전공사 쪽에서는 회계 처리 부적정으로 접대비가 과다하게 계상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성권 의원은 가스안전공사 쪽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초과 접대비가 8억원을 넘는다고 주장했다. 한국수력원자력도 지난 3년 동안 접대비 한도 초과액이 계속 늘어나, 지난해엔 초과 비율이 349%에 달했다. 공사의 접대비 한도액은 법인세법과 조세특례제한법 등의 규정에 따라 매출액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는 것으로서 초과 금액에 대해서는 가산세 등 불이익을 받도록 돼 있다. 이성권 의원 쪽에 따르면 산업자원부 산하 34개 조사 대상기관 중 접대비 한도를 초과한 곳은 17개에 달한다. 위에 언급된 기관 이외에도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전기안전공사·한국생산성본부·한국산업단지공단·중소기업진흥공단·대한광업진흥공사·한국석유공사·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에너지관리공단·중소기업중앙회·대한석탄공사·한국석유품질관리원·한국기술거래소·한국중부발전·한국전력거래소·전국신용보증재단연합회 등이 접대비 한도액을 초과했다.
대형 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영업활동이 필요하지 않은 법정수수료 사업 위주의 공기업이 접대비 한도를 초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영업활동 이외에 편법 내지는 탈법적 지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런 일들은 공기업이 세무조사를 받지 않고 내부 감사도 지극히 형식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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