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졸속 FTA, 증거가 쏟아진다

등록 2006-10-14 00:00 수정 2020-05-03 04:24

정부 공식 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진 한미 FTA의 밀어붙이기식 추진…산자부는 연구용역 보고서도 완성하지 못했고 KIEP 종합보고서는 부실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졸속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지난 9월28일 문화방송 에 출연한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제기되고 있는 ‘FTA 졸속 추진 비판론’을 강하게 부인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 정부 차원에서는 2003년부터 준비를 했고, 2005년 5월께 통상교섭본부장에게 (한미 FTA) 추진을 지시했다”며 “충분히 검토했다”고 반박했다.

광고

대통령 말과 달리 2006년 초 검토 시작

하지만 취재 결과, 우리 정부가 ‘충분히 검토’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지난 4월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의 폭로로 시작된 ‘졸속 추진’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광고

이 열린우리당 조정식 의원을 통해 입수한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는 주무 부처인 산업자원부가 실질적으로 FTA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초가 아니라 1년가량 늦은 2006년 3월께였다. 노 대통령이 통상교섭본부장(외교통상부)에게 한미 FTA 추진을 지시한 시점이 2005년 5월인지는 몰라도, 한미 FTA가 한국 경제와 산업에 미치는 여러 파장을 실무적으로 검토해야 할 산자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은 그로부터 수개월 뒤였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문서기록들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3차 협상이 진행되던 9월 초까지도 산자부의 연구용역 보고서는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한미 FTA가 얼마나 준비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조정식 의원이 공개한 산자부 자유무역협정팀(이하 FTA팀)의 ‘정책연구용역’ 현황을 살펴보면, FTA팀은 총 7개 산업분야(철강·전자·섬유 등)에서 FTA 연구용역을 8건 발주했다. 이 중 2006년 5월에 나온 섬유 분야의 연구용역 보고서(‘한미 FTA 체결시 섬유 분야의 한국의 대응 전략’)와 7월13일에 완성한 전자 분야의 보고서(‘한미 FTA 협상을 활용한 전자산업 구조 고도화 전략’)를 제외한 나머지 연구용역 보고서들은 3차 협상이 종료된 9월 이후에야 완성된다. 한미 FTA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도 없는 상태에서 분야별 협상에 임해왔다는 말이다.

그나마 섬유 분야 보고서가 일찍 나온 이유도 한미 FTA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섬유 분야가 다른 분야와 달리 독립 분과인데다 한-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FTA를 경험했기 때문에 지난 12월에 자체적으로 연구용역을 발주해 빨리 연구용역 보고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분야의 경우 협상이 3차 끝난 뒤에야 보고서를 내는 등 ‘뒷북 연구’를 하기에 바빴다.

광고

졸속 추진의 증거는 예산의 흐름에서도 확인된다. 산자부는 지난해 12월30일 연구용역비 지급을 요청하고, 5개월이 지난 올 5월에서야 예산을 확보하게 된다. 충분히 검토하고 준비했다면, 한미 FTA 관련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싸움을 하는 곳에 변변한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맞서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자부가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고 늦장 대응을 한 것일까. 한미 FTA 추진 일지를 살펴보자. 한미 FTA는 2003년 8월에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FTA 추진 로드맵’을 논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2005년 2월에서 4월까지는 ‘사전실무 점검회의’를 해왔다. 즉 한미 FTA는 2003년과 2005년 초까지 준비 과정을 거친 뒤, 노무현 대통령이 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2005년 5월께에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준비 기간은 문서 공백기?

그러나 산자부의 한미 FTA 추진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FTA 관련 공문서’ 문서철을 보면 정부의 주장에 따라 FTA를 활발하게 준비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긴 공백 기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2005년 3월에서 2006년 9월13일까지 한미 FTA 공문서는 총 188건이다.

수신문서를 보면 2005년 7월15일치 ‘한미 FTA 사전실무점검협의 결과 책자 송부’가 그해의 마지막 공문서다. 그리고 8개월 뒤인 2006년 3월9일에서야 ‘한미 FTA 공청회 개최 장소 변경’이라는 공문서를 볼 수 있다. 발신문서의 경우에도 ‘한미 FTA 3차 예비협의 산자부 대표단 추천’(2005년 4월15일) 이후 8개월 동안 아무 문서도 없다. “충분히 검토했다”는 노 대통령의 주장대로라면 2005년 하반기부터 한미 FTA 관련 공문서가 많아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도 없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반면 2006년 3월9일 이후부터는 한미 FTA 관련 공문서가 하루에도 5~6개 이상씩 나온다. ‘문서 공백기’를 바로 ‘업무 공백기’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외교부 통상교섭본부를 중심으로 정부의 여러 부처가 분주하게 준비하던 시기에 핵심 부서인 산자부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에 대해 조정식 의원은 “2005년 하반기에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미 FTA 추진이 갑자기 중단됐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FTA가 이뤄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 연말에 FTA 추진 소식을 듣고 급하게 준비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서 공백기’와 연구용역도 없이 협상에 임했다는 비판에 대해 산자부의 답변은 옹색하다. 산자부 FTA팀의 김준동 팀장은 “공문서가 왜 필요한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 된다” “연구용역이 없으면 협상을 못한다는 법이라도 있느냐”고 반박했지만, 김 팀장 자신도 (FTA 추진 통보를) 언제 받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미 FTA를 서두른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산자부의 다른 관계자들도 “한미 FTA를 추진한다는 것을 지난해 12월이 돼서야 알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됐다”며 “우리도 답답해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만 입장이 난감하다”며 답변하기 어려운 상황을 토로했다.

사실 한미 FTA 준비가 허술한 것은 산자부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정부가 협상 준비를 충실히 해왔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 자료로 제시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정부의 연구용역 보고서들 중 대부분이 먼저 만든 한 개의 보고서를 재탕해, 후속 보고서들을 만든 것으로 취재 결과 드러났다.

KIEP 추가 보고서는 재탕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한미 FTA의 산업별 영향 및 관세양허안 도출’이라는 연구용역 보고서를 2005년 12월에 완성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보고서는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만들어진 유일한 종합보고서다. 그러나 조정식 의원 쪽은 “지난해 12월에 완성했다는 이 보고서를 정부는 통째로 공개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분할 발표해왔다”며 이 종합보고서의 모든 내용이 과연 작년 12월 이전에 완성됐는지 여부에 의문을 제기했다. 즉 가장 일찍 만든 보고서를 먼저 발표한 뒤, 늦게 완성한 나머지 보고서들도 지난해 12월에 완성했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 의원실 이관후 비서관은 “2006년 2월17일 국정 브리핑에서 정부는 이 보고서가 515쪽 분량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확인한 결과 221쪽 뿐”이라며 “12월에 완성했다는 보고서를 왜 통째로 공개하지 않냐”며 의심했다.

게다가 취재 결과, 이 종합보고서는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력에 비춰볼 때 내용이 너무 부실했고, 이후에 나온 추가 연구보고서들은 심하게 표현하면 ‘낡은 레코드판을 계속 돌리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종합보고서의 대부분을 ‘한미 FTA 연구 목적과 동향 및 통상 현안’에 할애한 반면, 거시경제적 효과 분석 4쪽, 1차 산업에 대한 연구는 6쪽, 제조업은 9쪽, 서비스업에 대해서는 6쪽으로 구성해 산업 관련 연구 내용은 많지 않았다. 종합보고서 64쪽, ‘한미 FTA의 시나리오별 거시경제적 효과’(GDP는 정태효과 0.42%, 동태효과 1.99%로 각각 증가하고, 후생 수준도 0.61%(약 24억달러) 증가할 것이라는 내용)는 ‘한미 FTA의 필요성과 경제적 효과’(2006년 1월18일)라는 KIEP의 보고서 4쪽과 내용이 동일하다. 또 3월에 발표한 ‘한미 FTA의 의의와 기대효과’라는 보고서 26쪽과도 같다. 종합보고서의 ‘FTA 체결로 실질 GDP가 증가, 물가 수준 하락, 교역 조건이 개선되는 등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얻지만, 농업은 타격을 입을 것’(61~63쪽)이라는 내용도 다른 보고서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미 FTA의 효과: 서비스 부문’이라는 3월3일 보고서의 ‘한미 FTA 경제적 효과 부분’(21~25쪽)도 종합보고서(115~117쪽)와 내용이 동일했다. 대부분의 추가 보고서들이 12월 종합보고서를 기초로 했으되, 더 심화된 내용을 찾기는 힘들었다.

“무조건 고!”가 불안하다

노 대통령과 정부는 “한미 FTA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고 역사적 과제”라고 강변해왔다. “무조건 고!”를 외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졸속 추진의 증거들이 속속 드러날 때마다 더욱 불안하다. 노 대통령의 핵심 경제 참모였던 이정우(56) 경북대 교수는 지난 7월 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맺으려는 FTA는 말이 FTA지, 실제론 경제통합으로 가는 것”이라며 “협상 과정에서 독소조항을 빼야 할 뿐 아니라 FTA를 체결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로 남겨둬야 한다”고 말했다.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