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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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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은 세상, 내게 춤을 다오

등록 2001-02-08 00:00 수정 2020-05-03 04:21

<font size="4" color="#a00000">영국리얼리즘 명맥 잇는 스티븐 달드리의 … 아이의 눈으로 본 노동자의 현실</font>

이제 누구도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영화를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변화와 함께 움직이는 관객의 감성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감동의 영역도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변한 요즘 관객은 메마른 도시의 황량한 삶이나 소통부재의 현실에 대한 우울한 묘사에 카타르시스를 느낄지언정 노동자의 삶에 대한 우직한 애정이나 보편적인 인간애, 연대의 필요성 따위의 주제에는 더이상 감정의 떨림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철지난 감성이라는 데 이미 오래 전 제작자와 관객이 합의를 본 사항이다.

울지 않아, 새처럼 날고 싶어

그래서 21세기 초엽에 보는 영국영화 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오히려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노동조합으로부터 등을 돌린 대처리즘의 칼바람 속에서 빈한한 탄광 노동자 가족의 삶을 기교없이 그려나간 이 영화는 이미 퇴화된 줄 알았던 가슴 한구석의 촉수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1984년, 파업중인 노조와 경찰간의 대치로 석탄보다 더 어두운 구름이 낀 영국 북부의 작은 탄광도시. 11살의 깡마른 소년 빌리는 탄광 노동자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치매증세가 있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권투를 배우던 그는 우연히 같은 체육관을 쓰게 된 발레교실을 훔쳐보다 발레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권투 대신 발레수업을 듣는 사실이 발각되자 아버지와 형은 길길이 뛰고, 파업주동 혐의로 형이 구속되면서 왕립발레학교 오디션의 꿈은 멀어져만 간다.

탁월한 연극연출가 출신으로 를 통해 지난해 데뷔한 스티븐 달드리는 신산했던 80년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삶을 이제 막 10대에 들어선 어린 소년의 눈높이에 맞춘다. 그것은 영국 노동자의 밑바닥 삶을 1인칭 직설화법으로 풀어내는 켄 로치의 방식에 비하면 정공법을 비껴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과 사회와의 마찰로 커다랗고 적대적인 세상과 싸웠던” 감독의 어린 시절과 포개지는 빌리 엘리어트의 삶의 고단함은 형이나 아버지의 것처럼 첨예하지는 않을지라도 더 총체적이다.

“발레는 무슨 얼어죽을 발레, 남자는 축구나 권투, 레슬링을 하는 거다.” 다른 노동자들처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불같은 노여움과 극심한 반대는 빌리를 가로막는 이중의 벽이다.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는다. 노조간부인 형에게 그의 존재는 아랑곳없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유물인 피아노를 부숴버리지만 빌리는 치매의 할머니를 위해 차를 끓이는 의젓함을 잃지 않는다. 노조탄압에 분노한 형이 기어이 사고를 쳐 오디션까지 포기하고 장기간의 파업으로 촛불 하나 켜지 못하는 참혹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지만 빌리의 작은 어깨는 무거운 현실을 묵묵히 들쳐멘다. “모든 게 사라지고 몸이 새처럼 전기처럼 변하는 걸 느끼는” 춤을 출 때 비로소 그의 얼굴에는 나이에 걸맞은 해사한 미소가 피어난다.

감독은 생때같은 이 어린 발레리노의 삶을 80년대 영국 노동자의 삶에 조용히 걸쳐 놓는다. 도망친 시위자가 집에서 집으로 도망다니며 커피까지 얻어마시는 노동자 공동주택의 옹기종기 벌집 같은 풍경,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바리케이드를 친 경찰들의 방패를 무심하게 막대기로 긁고 지나가는 빌리의 모습은 계급적 삶의 일상을 치장없이 묘사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들을 훨훨 털어버리고 새처럼 전기처럼 나르며 연습을 하는 빌리의 모습은 경찰의 거친 진압에 무참하게 밟히면서도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시위대의 모습과 교차된다.

영국 프리시네마의 전통은 계속된다

크리스마스 밤 차디찬 체육관에서 친구와 춤을 추며 놀던 빌리는 아버지에게 들키자, 그 앞에서 반항과 갈구가 담긴 춤을 미친 듯 추고 아버지는 아들의 내면에 그제서야 귀를 기울인다. 왕립발레학교 오디션에 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죽은 아내의 패물까지 팔지만 턱없이 모자랐던 그는 어제까지 투쟁의 동지였던 동료들의 계란 세례를 뒤로 한 채 작업장으로 돌아간다. 작업장으로 쫓아가서 아버지를 비난하는 큰아들에게 “빌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절규하며 아들과 끌어안고 우는 부자의 모습은 잔고 한푼 없는 실직상태에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외동딸의 성찬식 예복을 마련하기 위해 눈물겨운 돈벌이를 하는 아버지를 그린 켄 로치의 (1993)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풍경과도 많이 닮아 있다.

아버지 동료들의 십시일반 도움으로 여비를 마련해 난생 처음 런던행 버스를 탄 빌리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왜 런던에 가보지 않았어요?” “런던에는 탄광이 없잖아.” 이 짧은 대화는 이 작품이 리얼리즘의 쇠락이라는 세계영화의 흐름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내려온 영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영화의 적손임을 환기시켜 준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겪고 최초의 근대적 노동자 계급을 탄생시켰으며 노동자의 당이 오랜 기간 집권한 영국에서 사회적 사실주의의 전통이 만들어진 건 당연해 보인다. 실제 노동계급을 지지하는 좌파 지식인이 많았던 영국영화계에 프리시네마가 시작되면서 사회적 사실주의는 영국영화의 한 갈래로 자리잡게 됐다. 1956년부터 영국 국립극장에서 사회의식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며 붙인 프로그램 이름에서 따온 프리시네마는 다큐멘터리 수법으로 노동계급의 삶을 거짓없이 그리려 한 젊은 영화인들의 영화운동이다. 계급체계의 고정성과 불평등에 대한 공격적 태도 때문에 ‘성난 젊은이들’이라고 불린 젊은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이 운동은 (1958), (1959)를 기점으로 장편영화로 확산되었고 이런 작품들은 구질구질한 일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키친 싱크’(개수대)라고 불렸다. 현실에 대한 환상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차분하게 노동자의 삶을 직시했던 이 흐름은 그러나 10년도 못 가서 시들해지고 말했다. 많은 프리시네마 감독들이 할리우드영화 같은 판타지의 세계로 귀착했을 때 신념을 버리지 않은 좌파감독들은 텔레비전으로 들어갔다. 반사회적인 예술가들이 공영방송에서 작품을 만든다는 게 우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bbc>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60∼70년대 돈없는 좌파감독들의 유일한 출구였다. 프리시네마에서 출발해 아직까지도 영화가 부패한 자본주의사회에 대항하는 무기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켄 로치는 여기서 사회파 드라마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1968)를 만들었다. 역시 <bbc>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80년대부터는 영화 전용채널인 가 실력있는 감독들을 키워냈다. 켄 로치뿐 아니라 마이크 리와 스티븐 프리어즈 등이 에서 ‘적들의 칼로 적들의 심장을 찌른’ 사회파 감독들이다.

오히려 풍요로워 지는 사실주의 영화

90년대 이후 영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영화는 오히려 더 풍요로워지는 듯하다. 그 앞에는 환갑이 지난 뒤에도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는 켄 로치가 있다. 외에 미혼모의 실화를 통해 영국 복지정책의 그늘에 비수를 날린 (19994) 등 일상적인 사실주의에 입각한 노동자의 삶을 그린 영화뿐 아니라 스페인 내전을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재현한 (1995)과 98년 스코틀랜드 지역 빈민들의 마약거래와 알코올중독 같은 이슈를 건드린 까지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사회파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5)로 동성애와 인종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했던 스티븐 프리어즈 역시 두 실직자 친구간의 동업을 통해 또다른 계급 문제를 제기했던 (1996) 같은 사실주의의 수을 내놓았으며 신인감독인 마크 허만의 (1997), 피터 카타네오의 (1998)에 이어 까지 조금씩 변주는 되었지만 노동자의 삶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는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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