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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배지 떼고 지방 선거 뛴다

등록 2006-02-15 00:00 수정 2020-05-03 04:24

4년 전과 달리 서울시장 등 광역단체장에 현직의원들 줄줄이 출사표
“큰 실수 없으면 본전은 건지는 자리” 기초단체장 노리는 이들까지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권력의 지도가 바뀌고 있다. 지방 정치인들의 주가가 뜨고 있다. 중앙 정치인들보다 한 급수 낮게 매겨졌던 광역·기초 단체장과 광역·기초 의원 등 지방 정치인들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들의 자치단체장 진출 경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2년 6·13 지방선거와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점이다.

지난 2월8일 맹형규 전 한나라당 의원의 여의도 한양빌딩 6층 사무실이 분주했다. 그는 1월31일 당내 경선을 위한 서울시장 예비후보 등록을 하면서 의원직을 던졌다. 다음날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도 비웠다. 지역구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의원 사무소도 폐쇄했다. 그의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는 민주노동당 중앙당사가 있고, 과거 김대중·노태우 대통령이 집권 전 대선 캠프로 사용한 길지라고 한다. 맹 전 의원이 의원으로서 프리미엄을 버리고 광역단체장인 서울시장에 ‘올인’한 것은 서울시장이 그만큼 큰 자리이기 때문이다. 맹 후보 캠프의 신동철 공보특보는 “3선까지 한 국회의원에게 광역단체장은 새로운 정치적 플랫폼(정거장)”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원인은 ‘이명박 효과’

맹 전 의원뿐 아니라 서울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의원들은 많다. 한나라당 안에서만 홍준표·박진·박계동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열린우리당에서도 민병두·이계안 의원이 나섰다. 의원만 여섯이라고 볼 수 있다. 2002년 지방선거 때 당내 경선을 포함해 김민석·홍사덕·이상수 의원 등 3명이 경쟁했던 것에 비하면 그 수가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가장 큰 원인은 ‘이명박 효과’다. 서울시의 이명박 시장은 현재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대권 후보 경주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명박의 성공신화가 정치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광역단체장이 대권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대권 경주에서 2위를 달리는 고건 전 총리도 서울시장을 지냈다는 것이 화려한 경력으로 거론된다. 손학규 경기지사도 대권 후보로서 뛰고 있다. 인구 1천만 명, 예산 14조원은 서울시장의 중량감을 보여주는 상징적 숫자가 됐다. 경기지사도 서울시에 뒤질 바가 아니다. 299명의 의원 대부분이 ‘큰 꿈’을 꾸겠지만, 굳이 큰 꿈이 아니더라도 광역단체장의 무게는 의원 이상이다. 의원들은 이제 광역단체장을 정치적 성장의 발판으로 인식하고 있다. 곧 급수에서도 의원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는 셈이다. 김혁규 경남 지사는 아직도 의원보다 ‘지사’로 불릴 때가 많다. 299명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한 의원보다 그 지역에서 하나뿐인 지사로 불리는 게 더 예우한다는 배려가 깔려 있는 것이다. 정치권 안팎에서 장관 출신 의원을 장관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2002년만 해도 지역정치 무시했는데…”

2002년엔 자치단체장이 그리 높게 평가되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 출신 인사는 “2002년까지만 해도 지역정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큰 꿈을 꾸는 정치인들에게 행정 CEO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된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또 단체장의 경우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험할 수 있는 물적·인적 환경이 뒷받침된다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자리인 셈이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지방자치의 역사가 10년이 넘으면서 지방자치 운영과 관료조직의 틀이 갖추어졌다. 단체장이 웬만큼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못해도 본전은 건질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경기지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한나라당 의원들은 김문수 의원을 밀면서 뒤로 빠진 남경필 의원을 빼더라도 임태희·전재희·이규택·김영선 의원 등 다섯 명이나 된다. 당내 중진으로 평가되는 3선의 권철현 의원은 부산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한나라당 의원들 가운데 이윤성(인천)·이방호(경남)·권경석(〃)·서상시(대구)·김광원(경북)·이병석(〃)·임인배(〃) 의원 등이 광역단체장 출마 의사를 밝혔거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열린우리당에서도 유필우(인천)·이광재(강원)·이시종(충북)·박상돈(충남)·문석호(〃)·권선택(대전)·정동채(광주)·주승용(전남) 의원 등이 출마 의사를 밝혔거나 자천타천으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현 광역단체장 가운데 직전에 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던 인물은 손학규 지사와 강현욱 전북지사 둘뿐이다. 과거 제대로 된 경선을 치르는 것 없이 중앙당 차원에서 사실상 후보자를 내정하던 풍습도 사라졌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같은 당 출신의 자치단체장이 연임 의사를 밝혔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도전장을 내미는 의원들이 있을 정도다.

심지어 기초단체장으로 거론되는 의원들도 있다. 경북도의회 출신의 재선인 김성조 한나라당 의원은 지역구인 구미의 시장직에 나가는 것을 한때 검토했다. 김 의원 쪽은 “생각하다가 철회했다”고 말했다. 민선 1, 2기 수원시장 출신인 심재덕 열린우리당 의원 쪽도 수원시장 출마설을 부정하진 않고 있다. 통상 기초단체장이나 기초·광역 의원이 성장하면 중앙정치의 무대인 국회로 진출하는 것이 절차였기 때문에 광역단체장도 아닌 기초단체장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과거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수원은 예산이 1조원이 넘는 대도시다. 이인성은 “의원들의 지방자치로의 회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며 “옛날로 치면 당하관인 지방 현감으로 낙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지역구민을 위해서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론조사에선 현직 단체장에 밀려

황아란 부산대 지방행정연구소 간사(행정학 교수)는 “의원들의 권력지향적인 속성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봤다. 의원들이 의원직보다 더 큰 권력인 광역단체장을 좇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김욱 배재대 교수는 “부정적으로 볼 건 없다. 다만 앞으로 지방자치가 더 발전하게 되면 그곳에서 오래 활동한 인물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겠냐”고 말했다.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김형준 국민대 교수(정치학)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의 연장으로 봤지만 이젠 지역민들은 충실한 행정가를 원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경기 지사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후보로 거론되는 국회의원들이 여론조사에서 현직 단체장이나 지방 관료 출신의 인사들에게 밀리는 것도 이같은 현상을 반영한다. 어쨌든 지방정치를 중앙정치의 종속물로 보거나, 지방 정치인들을 중앙 정치인들의 하수로 보는 과거의 공식은 이제 폐기 처분돼야 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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