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범민주세력 대연합 의논하자며 고건 만났지만 끝내 확답은 못 들어
지방선거 전에 손잡고 싶어하지만, 격변 이전에 도박 피하려는 계산의 차이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지방선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수구냉전, 기득권 보수 성향이 있는 세력을 제외한 모든 양심인사와 정치세력이 폭넓은 연대를 이뤄야 한다. 고건 전 총리, 강금실 전 법무장관, 박원순 변호사 등이 구체적인 연합 대상이 될 수 있다.”(김근태 전 장관)
“김 장관 제안에 찬성한다. 김 장관이 제안하면 만나겠다.”(고건 전 총리)
범민주세력 대연합론을 두고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화답하며 한 달 가까이 분위기를 띄워온 고건 전 총리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2월8일 드디어 만났다.
어색한 만남, 온도차 그대로 드러나
이날 만남은 김 전 장관이 강력히 밀어붙인 측면이 강하다. 열린우리당 당권을 놓고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일합을 겨루고 있는 김 전 장관은 이날 오전 ‘새얼문화재단’이 인천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주최한 고 전 총리 조찬 특강장을 전격 방문했다. 김 전 장관 쪽 핵심 관계자는 “두 사람이 직접 통화하거나 만남을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양쪽이 자연스럽게 만나 범민주세력 대연합을 본격 논의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고 전 총리에게 전달했고, 의사가 충분히 전달됐다고 판단해 특강장에 합류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장관의 범민주세력 연대론에 세 차례나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던 고 전 총리는 이날 만남에 그리 적극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물론 말리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고 전 총리의 한 핵심 측근은 “특강 전날인 7일 김 장관 쪽에서 일방적으로 오겠다고 통보해 초저녁에야 결정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날 만남에서도 온도차를 그대로 드러냈다. 오전 유세 일정이 있는데도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1박을 한 뒤 특강장을 찾은 김 전 장관은 1시간 분량의 고 전 총리의 특강을 경청한 뒤 마주 앉았다. 김 전 장관은 “열린우리당과 함께 가자고 압력을 넣기 위해 왔다. 전당대회 뒤 실질적인 대화와 협력을 위해 동맹군으로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며 강력한 압박전을 펼쳤다. “지방선거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우리당과 고건 총리와 각계를 대표하는 양심세력 대연합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고 전 총리는 ‘정치인이 아니다’는 특유의 논리를 앞세워 끝내 확답을 피했다. “김 의원의 범양심세력 대연합론에 원론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은 언론을 통해 이미 표명한 바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 참여할 것인지는 아직 정치적으로 결단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김 전 장관과는 “코드가 아니라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라며 정동영 전 장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도 주파수를 “늘 열어놓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선거전 정치 참여 여부는 확정하지 못했고, 김 장관뿐 아니라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두 사람의 이런 태도는 2·18 전당대회와 5·31 지방선거, 2007년 대선을 바라보는 계산법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어떤 식으로든 열린우리당에 공헌하라”
김근태 장관이 열린우리당 대선후보가 되는 최선의 경로는 2·18 전당대회에서 당 의장으로 선출되고, 5·31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쟁자인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에게 조직력과 대중지지도 등에서 뒤진다. “정동영은 감동이 없다. 나를 뽑아야 제2의 노풍이 분다”고 공언해온 김 전 장관은 당원들에게 자신이 불러올 변화와 돌풍의 실체를 보여줘야 하는 절박한 처지다. 결국 지방선거와 대선 승리 전략으로 제시한 ‘범민주세력 대연합’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물론 대중지지도가 높고,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고 주장해온 고건 전 총리와의 연대 가능성을 입증하는 게 가장 훌륭한 ‘대박’ 시나리오다.
그동안 김 전 장관이 범민주세력 연대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고 전 총리를 염두에 둔 포석이다. 대중성은 앞서지만 열린우리당에 별 정치적 기반이나 조직이 없는 고 전 총리를 향해 기득권을 고수하지 않고 제로 상태에서 협력하고 경쟁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해 참여를 설득한 것이다. 김 전 장관은 대신 고 전 총리에게 지방선거전에서 어떤 식으로든 열린우리당에 공헌하라는 옵션을 내걸었다. 김 장관 쪽의 한 핵심 인사는 “김 전 장관이 고 전 총리는 ‘무임승차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한 것은 지방선거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달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반면 고건 전 장관은 상대적으로 훨씬 느긋하다. ‘창조적 리더십’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강연정치로 자신의 존재를 확신시켜온 고 전 총리는 당장 연대 대상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2007년까지 시간도 많고, 지방선거 이후 정치 지형도 가변적인 만큼 연대의 가능성과 대상을 최대한 넓혀놓고, 김 전 장관의 구애를 적절히 즐기고 활용하면 된다.
고 전 총리가 그동안 김 장관이 주창한 범민주세력 연대론에 대해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세 차례나 찬성의 뜻을 표시했지만 정작 김 전 장관을 만나서는 “원론적 찬성”이라고 발을 뺀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고 전 총리의 다른 한 핵심 측근은 “고 전 총리가 ‘통합의 리더십’ ‘창조적 리더십’을 주창해온 만큼 김 전 장관의 범민주세력 통합론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면서 “다만 지방선거 이후 정치판에 격변이 올 것이라는 게 중론인 만큼 지방선거 이전에 입당, 창당 등 명시적 선택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범민주세력 대연합에 원론적 찬성 태도를 표명해 자신이 주창해온 ‘통합의 리더십’을 실증하는 징표로 활용하고, 개혁 성향의 김 장관과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올드하다’는 이미지상 약점을 보완하는 정치적 효과를 얻으면서도 5·31 지방선거 이전에 특정 인물과 손잡는 정치적 도박은 피하겠다는 것이다.
고건, 과도한 의미부여에 부담
고 전 총리에게서 확답을 얻지 못한 김 전 장관 쪽은 일단 두 사람의 만남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김 전 장관 쪽 인사들은 “일단 김근태 후보가 최초로 제시해 전당대회 최대 이슈로 떠오른 ‘범양심세력 대연합론’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는 전기를 마련했고, 전당대회에 국민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킬 계기를 제공한 게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과거처럼 유력 정치인들이 밀실에서 야합한 뒤 그 결과를 국민과 지지자에게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게 아니라 공개석상에서 공론화하고 각각의 지지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 것은 획기적 변화”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고 전 총리 쪽은 과도하게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고 전 총리 쪽 핵심 인사는 “김 장관 쪽에서야 만남 자체를 확대해서 설명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그저 그쪽에서 만나자고 해 만났을 뿐”이라며 “앞으로 어느 누구와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건-김근태 두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발전할까. 정치권에서는 호남 출신인 고 전 총리가 정치적 기반이 같은 정동영 장관과 경쟁관계이고, 김 전 장관 역시 정 장관과 당권·대권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만큼 두 사람의 정치적 이해는 일치되는 측면이 있다는 평가다. 고 전 총리는 대중 지지도가 높지만 현실정치에 별다른 기반이 없고 ‘옛날 사람’이라는 약점이 있는 반면, 김 전 장관은 반대의 단점을 갖고 있어 서로 협력하는 게 이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방선거 이전에 두 사람이 정치 지형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만한 가시적인 연대틀에 합의할 수는 없겠지만, ‘범민주세력 연대론’을 두고 상호 화답하며 대중적 관심을 촉발한 것과 같은 정치적 이벤트는 계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고 전 총리가 여당에 입당해 김 전 장관과 공조하고 대세론을 타는 정 전 장관과 경쟁하는 구도 △2·18 전당대회에서 김 전 장관이 패배하고, 정동영 의장 체제로 치러질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할 경우 고건-김근태 두 사람이 연대해 당내 이탈 및 불만 세력과 민주당 등 외부 세력을 묶어세우는 시나리오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고 전 총리와 김 전 장관 쪽 모두 이런 시나리오에 대해 손사래를 친다. 고 전 총리 쪽의 한 핵심 인사는 “고 전 총리가 과거 이회창씨가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해 선대본부장을 맡는 것과 같은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 “다만 선거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고 전 총리가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후보들을 개별적으로 돕는 지원활동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과 깊숙이 연관돼 정치적 선택수를 좁히지 않고 개인적 우호관계에 따라 후보들을 측면 지원하는 방식으로 무임승차 논란을 피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여당이 지방선거 참패하면 확실히 연대?
김 장관 쪽 관계자도 “한나라당에 대항해 단일한 연대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는 당 안팎의 범민주세력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열린우리당이 구심점이 돼 외연을 더욱 넓히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과정”이라며 “2월18일 당 의장 선거가 끝난 뒤 당내 열린우리당 내부의 합의와 토론 과정을 거쳐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연대할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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