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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들, 후계자에 울고 웃었네

등록 2006-01-18 00:00 수정 2020-05-03 04:24

7년 단임제 헌법안 확정된 뒤부터 후계구도는 대통령의 중요한 고민거리
전두환에 납작 엎드린 노태우, 이인제 지지하다 ‘뒷방 노인네’ 된 김영삼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윤태영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이 1월8일 국정일기를 통해 대통령의 ‘차세대 육성 구상’을 공개한 것은 유시민 장관 발탁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며, 노 대통령은 레임덕이 두려워 차세대 지도자를 견제·억압하는 구식이 아니라고 해명하려는 의도였다.

박철언을 물리친 김영삼의 결기

그러나 ‘유시민 입각=노무현 음모론’으로 의심해온 정치인들은 더 반발했다. 여당 의원들은 “대통령이 인물 만들기에 개입해 성공한 역사가 있는가”(김영춘), “대통령이 마음먹는다고 키워지겠냐”(이종걸)라고 비판했고, 야당은 “왕조시대냐. 세자를 책봉하게”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대통령은 죽을 때까지 권좌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만큼 후계자 육성에 관심이 없었다. 내부의 충성 경쟁을 유발했을 뿐이다. 하지만 1979년 ‘12·12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전두환 대통령이 7년 단임제 헌법안을 마련한 뒤부터 후계 구도는 대통령의 고민거리가 됐다. ‘후계자 부상=권력 누수’의 공식이 성립되지만, 퇴임 뒤 안전판 확보를 위해 후계자를 적절히 육성·관리해야 할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집권 민정당 안에서는 ‘장세동 후계설’ ‘노신영 후계설’ 등이 나돌았다. 하지만 전 대통령의 정무1수석비서관을 지낸 허화평 전 의원은 “장·노 두 사람이 워낙 실세 행세를 하면서 빚어진 세간의 추측일 뿐 전 대통령은 누굴 후계자로 지목해 관리한 적이 없었다. 전 대통령의 힘이 그만큼 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 대통령도 임기 말인 1987년 직선제 개헌 요구가 빗발치고 권력이 심각하게 흔들리자 후계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육사 동기인 노태우씨는 자신을 지지하는 박철언씨 등 ‘노태우 사단’을 동원해 후계자로 지목받는 데 성공한다. 허 전 의원은 “당시 노태우씨는 전 대통령에게 납작 엎드려 후계자로 확고한 신뢰를 쌓는 데 주력했고, 그를 지지하는 당 안팎의 인사들이 전 대통령을 다각도로 설득하는 방식을 취했다”면서 “위기에 몰린 전 대통령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전 대통령은 6월10일 민정당 중앙위 운영위원회를 통해 노태우씨를 차기 대선후보로 지정한다.

노태우 정권의 후계자는 일찌감치 박철언씨로 굳어지는 듯했다. 정권 출범 특등 공신인 박씨는 ‘6공 황태자’로 불리며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88년 4·26 총선(13대 국회)에서 민정당이 의석 점유율 42%(299선 중 125석)로 과반 확보에 실패하자 이런 후계 구도는 흔들린다. ‘물태우’로 불리며 유약한 모습을 보이던 노 대통령은 통일민주당의 YS, 신민주공화당의 JP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권력을 분점 방식의 안전판 확보에 주력했고, 90년 2월9일 3당 합당에 의한 민자당 창당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호랑이 잡으러 굴에 들어왔다”는 YS는 합당 직후인 90년 3월부터 자신을 민자당 후계자로 지목해달라고 요구하며 노 대통령을 흔들었다. 당내 소수파 수장이던 YS는 대선을 1년 앞둔 91년 ‘후보 조기 가시화론’을 내걸고 민주계 의원들이 ‘탈당 불사 결의문’을 내면서 측면 지원에 나섰다. 하지만 박태준 의원 등 민정계의 집단 반발에 힘입은 노 대통령은 YS의 요구를 거부했고, 92년 3월 총선(14대 국회) 참패 뒤 민정계가 ‘YS 책임론’을 제기하자 노태우의 후계 구상은 다시 힘을 받는 듯했다. 하지만 YS는 청와대로 찾아가 ‘정부책임론’을 역설하며 노 대통령과 담판을 벌였고, 킹메이커인 김윤환 의원 등 민정계 일각의 지원을 받으며 배수진을 친 YS에게 노 대통령은 굴복했다. 그해 5월 전당대회에서 후계자로 낙점된 YS는 차별화 전략을 썼고, 노 대통령은 결국 8월25일 당 총재직까지 YS에게 내주었다.

DJ는 비교적 공정한 태도 취해 성공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계를 압박해 대통령직을 쟁취한 YS는 임기 초반부터 후계 구도 관리에 강하게 집착했다. 1992년 대선 승리 직후 취임 뒤 개혁 프로그램을 전담한 전병민씨의 ‘동숭동팀’으로부터 ‘이인제 서울시장론’에 관한 비밀보고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이른바 ‘세대교체를 통한 후계 구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YS는 임기 3년차인 95년 4월 “차기 대선에서는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라며 이런 구상을 처음 공개했다. 하지만 두 달 뒤, 6·27 지방선거 참패로 권력이 약화되자 “임기가 2년5개월이나 남은 시점에서 후계 구도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논란을 봉쇄했다. 하지만 총리의 권한 행사 문제로 YS와 갈등 끝에 94년 4월 결별한 이회창 전 총리가 차기 대안으로 급격히 부상하자 그해 10월9일 YS는 일본 <니혼게이자이>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이 놀랄 만한 세대교체를 실현하겠다”며 ‘젊은 후보론’을 꺼내든다. 이인제 경기지사를 후계자로 키워 이회창 전 총리의 급부상을 견제하려는 복안이었다.

물론 YS의 세대교체형 후계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1996년 4·11 총선(15대 국회)이 눈앞에 닥치자 이회창·이홍구 전 국무총리 입당, 이수성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임명, 박찬종씨 등 거물 영입을 통한 국면 전환을 시도한 게 화근이었다. 후보 다극화를 통한 내부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고 판단한 YS는 “당 대선후보에 대해 당 총재로서 분명한 내 입장을 밝히겠다”(96년 12월7일 CBS 회견)며 차기 후보 지명권 행사 의지를 과시했다. 하지만 주관적 바람일 뿐이었다. 97년 봄 한보 사태, 아들 현철씨와 측근들의 비리가 터지자 말발이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영입 거물들은 식물대통령 YS를 제치고 대권을 겨냥한 자기 영업을 시작하면서 이른바 ‘9룡의 쟁투’가 시작됐다. 특히 ‘대쪽’ 이미지로 지지 기반을 구축한 이회창씨는 “국정 공백과 여권 분열을 막기 위해 후보를 조기에 가시화해야 한다”며 YS를 압박했고, 97년 7월20일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노태우를 압박했던 YS도 결국은 힘이 빠지면서 이회창씨에게 밀려나는 뒷방 노인네가 된 것이다. YS는 물론 막판까지 친이인제 성향을 드러내며 버텼다. 하지만 분개한 이회창 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신한국당 의원 70여 명은 YS에게 총재직 이양을 요구했고, 끝내 탈당까지 강요했다. YS는 결국 여당 당원들이 자신의 인형을 화형시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신한국당과 결별했다.

DJ는 후계자 논쟁에 대해 비교적 공정하고 열린 태도를 보였다. 임기 3년차인 2000년 DJ는 “민주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는 같은 조건에서 경쟁시켜 나로부터가 아닌 국민 지지를 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2월27일 <조선일보> 회견), “당내 중진들이 차기 대권 선언을 하는 것은 괜찮다”(3월1일 <동아일보> 회견)며 후계 논쟁을 개방했다. 인재풀도 넓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 영남 출신인 김중권씨를 청와대 비서실장·당 대표 등에 중용했고, 이인제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영입했다. 노무현 전 의원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했고, 정동영·추미애 의원 등이 구동교동을 공략하며 성장하는 것도 용인했다.

노무현 “내가 만들 생각 없다”

대선을 2년 앞둔 2001년부터 잠재적 대권주자들이 대선후보 선출 시기를 놓고 갈등하자 DJ는 “공정한 후보 선출”이라는 원칙론만 강조하는 노회함을 드러냈다. 여권 후보의 조기 가시화에 따른 레임덕 우려, 경선 탈락자들의 불복 및 탈당 가능성 등을 고려해 후보 선출 시기나 방법에 대해선 입을 닫은 것이다. DJ는 오히려 ‘한나라당 이회창 대세론’이 확고해진 2001년 10월5일 여권 주자의 경쟁력 강화를 명분 삼아 ‘여권 대선 후보 문호 개방’ 원칙을 밝힌다. 이를 계기로 민주당 안에서는 이회창에 맞설 경쟁력을 갖춘 ‘제3후보론’이 제기됐고, 대안으로 고건 서울시장, 정몽준 의원,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 영입론까지 속출했다. 그러나 제3후보론이 별 진척이 없자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초로 ‘차기 후보 선출 전 당 총재직 이양’ 의사를 밝히며 ‘국민경선’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결국 2001년 11월부터 민주당에서 ‘대선후보 선출 예비선거’ 도입 논의가 폭발했고, 최고의 흥행작 국민경선이 도입됐다. DJ는 노무현 후보가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면서 퇴임 뒤 비교적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후계 구상은 아직 불확실하다. 누가 되든 별 신경을 안 쓸 것이라는 얘기, 유시민을 열린우리당 대선후보로 지원할 것이라는 관측,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다당제 경쟁 구도를 만들거나 내각제 개헌 등 정치판을 뒤바꾸는 승부수를 펼칠 것이라는 얘기까지 ‘설’과 '음모론'만 무성하다. 노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은 “국민경선을 통해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후보직 박탈 위기와 거듭된 수모를 경험한 노 대통령은 공정한 후보 선출과 승복의 문화를 만드는 데 가장 관심이 있다”면서 “지도자적 자질이 있는 정치인은 누구든 키워주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참여정부 출범 초반 김두관 행자부 장관 임명, 강금실 법무부 장관 발탁을 시작으로 김근태, 정동영, 이해찬, 유시민, 정세균 등을 정부 요직에 발탁하는 일련의 행보, 김혁규 지사 총리 기용 시도, 추미애 전 의원 통일부 장관 기용 시도 등이 그 증거라고 덧붙인다. 노 대통령은 지난 1월11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차세대를 내가 만들 생각이 없다. 되지도 않는다”면서 “당 공식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공인된 과정을 기준으로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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