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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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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이 당긴다, 특강을 당겨라

등록 2006-01-04 00:00 수정 2020-05-03 04:24

위상 만회 나선 고건과 당 복귀 준비하는 정동영·김근태의 빡빡한 스케줄
대학 강연에 교회 간증까지 나선 이명박… 박근혜도 캠퍼스 돌며 젊은층 공략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현 정치권이 갈등을 조장하고 갈등을 생산하는 분열의 정치를 하고 있다. 일방적 통치가 아닌 모두를 포용하는 통합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2005년 마감을 앞둔 12월27일, 고건 전 총리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 앞에서 목청 높여 현실 정치권을 질타했다. 전국고등학교 학생회장단 상대 특강이었다.

총리직 퇴임 이후 1년6개월 동안 정치 현안에 침묵해온 그는 요즘 ‘특강정치’에 심혈을 기울인다. 결코 특강 횟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3월16일), 스탠퍼드대(12월1일) 등 해외 원정 특강을 빼면 국내 무대에 선 것은 고작 3번. 하지만 특강은 고건의 대권 행보를 상징한다. 특정 정당을 선택할 수 없는 정치적 한계, 행정 경험은 풍부하지만 ‘한물간’ 인물이라는 이미지, ‘감 떨어질 날’만 기다린다는 비판을 잠재우는 데 특강정치를 전술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대학생·고교생 만난 고건

일단 그가 특강을 시작한 시점은 위상 추락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 특수를 누리며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1위를 넘보기 시작한 11월23일, 연세대 리더십센터 주최 특강에 응하면서 국내 특강정치에 시동을 걸었다. 연세대는 2005년 봄부터 특강을 요청했지만 확답을 주지 않던 그는 몇몇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 자리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수락했다. 측근들은 “너무 활동을 안 해 고 전 총리가 대권에 도전하려는지 의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으니 계속 침묵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당 가입 시점과 대상은 정치 지형 변화를 관망하며 좀더 저울질해야 하지만, 국민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요구가 특강정치로 발현된 셈이다.

특강의 핵심 타깃과 메시지는 고 전 총리가 노리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더 선명하게 설명한다. 연세대 특강의 청중은 20대 초반의 젊은 대학생, 부산 국제신문사에서 열린 두 번째 특강(12월14일)은 고등학교 3학년, 세 번째인 성균관대 특강(12월27일)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청중의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져 예비 유권자에 이르렀다. 행정 경험은 경쟁자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관록을 인정받지만, ‘한물갔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고 미래의 유권자를 잡으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고 전 총리 쪽 관계자들은 그동안 “20~30대가 의외로 고 전 총리에게 호감을 나타내고 있다”며 “젊은 세대가 승부를 가른다”고 말해왔다. 고 전 총리가 퇴임 뒤 생맥줏집 한켠에서 젊은 학생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싸이월드 홈페이지를 개설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고 전 총리의 특강 메시지도 기성 정당에 몸담은 대권주자들과의 차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수·진보는 낡은 냉전시대의 산물로 이념에 사로잡힌 리더십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중적 위협을 극복할 수 없다. 현실을 중시하는 창조적 실용주의로 가자.”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김근태·정동영·박근혜·이명박·손학규 등 유력한 차기 주자들이 이념 대결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은 다르다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특강정치는 고 전 총리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선까지 2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튀지 않게 대중과 스킨십을 강화하면서 지지 기반을 넓히고, 자신만의 독특한 콘텐츠로 비전과 국가운영 능력이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언론과 정치권의 지속적인 조명을 받는 효과적인 선거운동 수단인 특강정치의 유혹을 아무도 뿌리치지 못한다.

특강정치의 원조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이명박 서울시장이다. 여야의 유력한 잠재적 대권주자인 두 사람은 지난해 10월부터 일찌감치 특강정치에 시동을 걸면서 ‘강연정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이 시장은 성신여대(10월31일), 성균관대(11월2일), 고려대(11일), 연세대(24일), 시립대(12월2일) 등 대학가를 훑고 있다. 고려대에서는 11월11일 하루 동안 두 번 특강을 했다. 물론 한나라당 당원 상대 특강도 줄을 잇는다.

정동영 11월만 10건, 김근태 발언 수위 상승

10·26 재보선 참패 뒤 당무 복귀 압박을 받아온 정 장관은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 무려 10건의 외부 특강을 소화했다. 급변하는 남북관계를 다루면서도 3일에 한 차례씩 단상에 선 셈이다. 12월에도 분당의 대안학교 이우학교(12월1일), 고려대 경영대 조찬 특강(5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 강연(6일), <오마이뉴스> 네티즌과의 대화(7일), 열린우리당 경기도당 초청 특강(10일), 서울시당 청년위 주최 강연(11일) 등 그의 특강정치는 계속된다.

정 장관과 라이벌인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도 12월 중순 특강정치에 전력투구했다. 한국과학기술원(12월15일), 경기도당(17일), 국회 ‘한국사회안전망 대해부’ 기조 강연(19일), 열린우리당 전북도당(12월21일)…. 하루 걸러 한 건씩, 업무시간을 쪼개 특강에 나서는 열성을 보였다.

두 라이벌은 그동안 장관 직무와 관련된 단체 등에서 심심찮게 마이크를 잡았지만, 정치적 발언은 극도로 자제했다. 하지만 10·26 재보선 참패로 당 복귀 방침이 굳어지자 정치 일정을 암시하고, 비전을 제시하고, 지지자를 결속하는 수단으로 특강을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 장관은 지난 11월22일 숭실대 108주년 기념 초청 특강에서 “보다 큰 꿈을 꾸겠다”며 당무 복귀와 차기 대선 도전을 공식화했다. 하루 뒤인 11월23일 ‘한경밀레니엄’ 초청 특강에서 마이크를 잡은 장 장관도 “열린우리당은 국민들로부터 고립된 처지에 빠졌다. 당이 필요로 하면 언제라도 저의 역할을 피하지 않겠다”며 치고 나왔다.

이명박 “3등도 대통령 되더라"

특히 2·18 전당대회를 겨냥해 지난 11월26일 서울시당 여성위 주최 강연회와 12월10일·17일 경기도당 특강 등 당내 행사에서 자기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한다. 기자·정치학자 등 여론 주도층들에게 도덕성을 높이 평가받지만 대중적 지지도가 취약한 김 장관은 보건복지부 장관 경험을 토대로 소외계층, 블루칼라를 집중 공략한다. 특강의 핵심 메시지 역시 ‘양극화 해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따뜻한 시장경제로 사회통합을 이루자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는 ‘창당 초심 회복’을 외치면서 실용주의를 내걸었던 정동영계와 각을 세운다. 황우석 교수의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자 그는 각종 특강에서 “진실이야말로 국익”이라고 외쳤다. 정동영·박근혜·이명박·손학규 등 다른 경쟁자들이 너나 없이 황 교수와 친분을 과시하며 엄호사격하고 나설 때 정반대로 차별화하는 데 특강을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여당의 주류와 밀접히 연계돼 있는 정동영 장관은 ‘지속적인 정치개혁’을 강조하고, 남북 화해의 전도사, 참여정부의 홍보대사를 자임한다. 강연 때마다 “2020년 우리는 남북 경제공동체로 가야 한다는 게 나와 정부의 구상”이라며 ‘2020년 평화경제론’을 역설하고, “참여정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터파기 공사’를 하는 중”이라고 역설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야당 주자들도 특강정치를 통해 경쟁하고 견제한다. 청계천 특수로 지지도가 급상승한 이 시장은 대학 특강, 당원 교육, 교회 행사의 축사·간증 등을 통해 지지 기반을 넓히고 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현대건설에 근무하며 이뤄낸 자신의 신화, 청계천 복원 성공사례 등을 통해 ‘희망’을 얘기하는 게 그의 특강 방식이다. 2005년 11월11일, 연세중앙교회 행사에 참석해 “청계천 준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소망교회 장로라는 자신의 신분을 적절히 활용한 친종교 행사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다른 대권주자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특강을 정치적 야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특히 지난 11월11일 고려대 특강에서 14대 총선 때 종로에서 자신과 겨뤄 이종찬 후보에 이어 3위를 한 노 대통령을 겨냥해 “나는 14대 총선 경험으로 (내 자신을) 위로하고 산다. 3등도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표를 가장 적게 받은 노무현 후보가 지금 대통령이 된 거 보면 정치란 알 수 있는 게 아니다”며 ‘대통령의 꿈’을 드러냈다. 이 시장은 또 사립학교법 개정 논란 이후 박근혜 대표가 국가정체성 논란을 벌이는 것과 관련해 “21세기에 무슨 국가정체성이냐. 이미 끝난 얘기”라며 “일자리를 많이 만들 수 있도록 기업을 지원해 국민들이 좀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을 희망을 주는 일 잘하는 지도자로 설정한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특강정치에 덜 몰입하는 편이다. 당원과 일반 국민을 접촉할 기회가 많은 ‘대표 프리미엄’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 취임 1년이 지난 지난해 6월에야 경북대에서 첫 특강을 할 정도로 특강정치에 신중한 편이다. 그러나 ‘이명박 바람’이 분 뒤 캠퍼스를 돌며 20대 젊은 층을 집중 공략하는 모습이다. 11월3일 영남대 강연에서 ‘선진한국 건설을 위한 블루오션 전략’을 설파하고, 12월6일 부산 동아대 특강에서는 ‘유신공주·수첩공주’라는 비판과 관련해 “전자공학을 전공한 공주 봤냐”며 인간적으로 접근했다. 그는 특히 12월13일 동국포럼 특강에서 “현 정부는 사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켜 전교조에 우리 아이들을 맡기게 했다”며 이념적 대립축을 강화했다. 최근 그는 사학법 개정안 철폐를 위한 장외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국민을 설득하고 있다.

‘대표 프리미엄’ 박근혜 20대 집중

별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손학규 경기지사도 특강정치를 정치적 메시지 전달 창구로 적극 활용한다. 그는 “민주화·산업화 세력의 장점을 통합한 생산적 정치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자”고 역설한다. 민주화운동 경력을 갖춘 자신이 민주세력까지 포용해 보수대표성을 강조하는 한나라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할 카드라는 논리를 설파하는 것이다. 지난 11월24일 한국발전연구원 초청 특강에서 “내가 산업화를 수용하듯이 여러분도 민주화를 대한민국의 메인스트림으로 포용하라. 새로운 조류를 회피하는 듯한 보수의 이미지로는 젊은 세대와 소통할수 없다”며 보수세력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은 게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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