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개정 시안 제시로 정치관계법 개정 논란…과거로의 회귀냐 자율성 확대를 위한 조처냐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좀 불편하다고 개정된 지 1년밖에 안 된 정치관계법을 다시 풀어준다면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이인기 의원·한나라당), “과거의 악령이 다시 살아날 것을 우려해 꼭 손봐야 할 조항들을 그대로 놔둔다면 변화된 시대 흐름을 따라잡기 어렵다. 이제 자유롭고 창의적인 선거운동을 전면 허용해야 한다”(김동훈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처장)….
현수막·유사학력 기재, 부활하나
과거로의 회귀냐, 자율성 확대를 위한 불가피한 조처냐. 지난 2월4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선거연수원 강당에서 열린 ‘정치관계법 개선 공청회’에서 정당법·정치자금법·선거법 등 3대 정치관계법 개정 방향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지난해 3월12일 정치권이 오랜 논쟁 끝에 이른바 ‘오세훈 법안’을 통과시킨 지 1년 만이다.
이번 논쟁은 정치권이 아니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유지담)가 촉발했다. 선관위가 2일 “자유와 참여, 선진화”를 명분으로 정치관계법의 주요 조항에 대한 개정 의견을 담은 시안을 제시하고 본격적인 의견 수렴에 나서면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이견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영식 중앙선관위 선거관리실장은 “2004년 3월12일 개정된 정치관계법으로 17대 총선을 치른 결과 정치자금의 수요처 축소와 투명화, 정당 구조의 개혁과 민주화 촉진 등 진전된 변화가 있었다”고 일단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조 실장은 “많은 성과와 찬사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과 정당활동·기부행위에 대한 폭넓은 규제로 자유와 참여를 지나치게 제한했다”면서 “현실에 맞는 효과적인 처방을 찾아야 한다”고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오세훈 법안’이 많은 긍정적 효과를 냈지만, 지나친 규제로 선거운동 자유와 유권자의 알 권리를 제약하는 부작용은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선거운동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인터넷 언론사의 선거기간 전 대담과 토론회 △정당 및 후보자의 인터넷 광고 등을 허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인터넷 언론사에 신문·방송사와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부여하는 이런 조치들은 매체 환경의 변화 등 시대의 흐름을 수용한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선관위는 이와 함께 과거 선거법 개정 협상에서 문제점이 지적돼 금지됐던 과거의 선거운동 방식을 대대적으로 부활하는 내용을 개정 시안에 담아 논란이 일고 있다. 선관위는 △후보자의 가족, 선거사무 관계자에게 어깨띠·선거운동용 유니폼·피켓의 사용과 인원수에 제한 없이 거리인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선거 홍보물 등에 정규 학력이 아닌 유사 학력을 기재하는 것도 부활하겠다고 밝혔다. 또 △선거기간 중 전면 금지됐던 향우회·종친회·동창회도를 ‘후보자나 그 배우자와 관련이 없거나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허용하고 △폐지됐던 현수막도 부활하기로 했다. 선관위는 “후보자들의 무분별한 세 과시에 따른 선거 과열, 지연·학연 등 연고주의 폐해 등을 막기 위해 금지했지만, 시행 결과 유권자들의 관심을 끄는 창의적인 선거운동을 지나치게 억제하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부활론의 근거를 제시했다. 특히 현수막 부활과 관련해 “실효성이 떨어지는 선거 벽보를 폐지하는 대신 현수막에 인쇄술 발달 등 시대 변화에 걸맞게 후보자의 기호와 이름뿐 아니라 사진·정견·정책 등 주요 홍보사항을 담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유사 학력 기재 부활도 “실존하는 이력을 개제하는 것을 허위사실공표죄로 처벌하는 현행제도는 불합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선거운동의 자유 확대를 명분으로 한 선관위의 이런 개정 시안에 대해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도 불만을 표출하고 있어 앞으로 입법 과정에서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한나라당을 대표해 공청회에 참석한 이인기 의원은 “선거기간 중 향우회·종친회를 허용할 경우 각종 위장 모임이 생길 수밖에 없고, 유사 학력도 그 범위가 너무 복잡해 많은 부작용을 유발할 것”이라며 “현행 금지 규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다만 어깨띠, 거리인사 확대 조치에 대해서는 “무분별한 세 과시에 따른 선거 과열 등 부작용을 막기 위해 후보자의 직계존비속 및 형제자매, 유급 사무원 정도로 범위를 엄격히 제한할 경우 수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선거연령 19살 방안도 논란 거세
반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과거에 시행됐던 몇몇 조항을 부활하는 소극적 방식이 아니라, 자율성을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전향적 방향으로 정치관계법을 손봐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화영 의원은 “현재 허용되는 것 외에는 모두 금지하는 네거티브 방식의 선거법을 계속 유지할 경우 선관위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처벌을 받는 문제점이 계속될 것”이라며 “해서는 안 되는 금지 항목을 정한 뒤 나머지는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선거법을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선관위가 선거운동의 자율성 확대를 얘기하면서도 정작 시민사회단체와 유권자의 참여와 선택을 강화하는 핵심 내용들이 빠져 있다는 의문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정원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치입법팀장과 김동훈 공선협 사무처장 등은 구체적으로 △여론조사 공표 금지 완화 △시민사회단체의 자유로운 선거운동을 부정하는 선거법 87조 폐지 △자발적인 유권자 모금운동 허용 △선거기간 중 폭넓은 집회·시위 허용 등을 요구했다. 김동훈 공선협 사무처장은 “현행 법안의 선거 규제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 문제점만 보완하는 수준의 선관위 개정 시안으로는 우리 사회의 발전과 분화 등 시대 흐름을 담기 어렵다”면서 “사회 각 부분 대표자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선관위가 선거 연령을 19살로 한살 낮추겠다고 밝힌 것도 정치권 안팎에서 논란이 거세다. 선관위는 “세계 각국이 실정에 따라 선거 연령을 다양하게 정하고 있으나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 추세”라면서 “청소년의 정치적 의사결정 능력, 그동안의 사회 변화, 성년 연령 조정을 위한 민법 개정 추진 상황 등을 감안해 선거 연령을 19살로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방안에 대해 한나라당만 찬성할 뿐, 다수는 18살로 선거 연령을 낮출 것을 요구했다. 특히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은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이 모두 18살로 선거 연령 조정에 동의하고, 한나라당만 19살 당론을 채택한 상황에서 선관위가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주는 정치적 의도가 뭐냐”며 반발하고 있다.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연대’의 김종민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 18살 청소년은 국민의 4대 의무인 국방·납세·근로·교육을 다 짊어지고 있는데 2살을 한꺼번에 낮추면 국가적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유로 1살만 낮추려는 선관위 개정안은 보수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논리”라며 “재고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4월 국회에 법안 제출하겠다”
한편 △현행 시·도지사까지 허용된 선거방송 토론회를 구·시·군 기초단체장 및 비례대표 시·도의원까지 확대하고 △복잡한 정치관계법 때문에 선거 관련 사무 처리에 어려움을 겪는 후보자와 공무원의 선거업무 지원 기피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선거관리사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선관위의 개선 방안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시민단체 대표들은 “방송토론 참여 범위 확대도 중요하지만, 유력 후보의 토론 불참 등 기피현상 개선이 더 시급하다”면서 “토론 불참자에게 기탁금 반환 때 페널티를 주는 등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선거관리사 제도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비용, 시험 주체, 후보자와 선거관리사의 유착 등 적잖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서 “규제 위주의 복잡한 정치관계법을 단순명료하게 개선하고 자율성을 확대하는 게 먼저”라고 비판했다.
조영식 선관위 선거관리실장은 개정안의 한계를 지적하는 각계의 목소리를 의식한 듯 “선관위에서 각계의 의견을 재검토한 뒤 4월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한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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