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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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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애국주의가 휘날린다

등록 2004-07-16 00:00 수정 2020-05-03 04:23

‘박근혜 파워’의 원천에 대한 코드 분석… 7·19 전당대회 이후 새로운 시험대에

▣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박근혜 의원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표직을 사퇴한 7월5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표 직무 수행 100여일을 되짚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개인을 위해 하는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당이 신뢰받는 정당, 어떻게 하면 잘될 것인지 정치나 경제, 나라의 발목을 잡지 않고 나라에 기여하는 당이 되는 것을 생각하며 대표직을 수행했다.”

‘자기 사람’ 내세우지 않는 리더

박 의원은 실제로 지난 3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표가 된 뒤 당권을 이용해 자기 사람을 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최병렬 전임 대표가 물러나면서 17대 총선 비례대표 공천권을 쥐었지만, 그것을 박세일 당시 선거대책위원장에게 고스란히 넘겼다. 대표와 선대위원장간에는 “전문가를 영입하자”는 합의만 존재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신임 당 대표, 또는 당 의장은 당직 개편부터 단행한다. ‘호흡이 맞는 사람을 내세워 일할 수 있도록…’이라는 게 그 명분이다. 그 결과 ‘대표의 사람들’이 사무총장이나 정책위의장 등 주요 당직에 포진하는, 이른바 ‘친정 체제’가 구축된다.

그러나 박 의원은 대표 시절에 당직 개편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대표 비서실 실무 당료도 전임 대표 시절의 사람들을 그대로 썼다. 이른바 ‘박근혜의 측근’이란 사람들이 외부에서 들어와 실세로 떠오르는 일도 없었다. 당내 비주류 인사들도 이 점에는 이론을 달지 않는다.

이를 두고 구상찬 한나라당 부대변인은 “친정 체제를 구축해 당을 장악하는 전통적인 리더십과 달리, 대중적 인기에서 비롯된 권위를 토대로 당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 점은 사실 노무현 대통령과 흡사하다. 노 대통령은 계보라 할 만한 현역 의원 한 사람도 없이 대중적 바람몰이를 토대로 민주당 대선 후보를 따냈다. 후보가 된 뒤에도 소수의 386 참모들 중심으로 기능적 선거캠프를 운영하는 것 외에, 당내 의원들을 그물망 엮듯이 관리해나가는 일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박 의원은 그 대신 한나라당의 정치 기풍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이를 위한 그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당리당략을 위한 정쟁은 절대 안 된다. 상대를 꺾기 위해 싸우기보다 정책 대결을 해야 한다.”(7월5일 대표직 퇴임 기자간담회)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신행정수도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소속 의원들의 서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국회 특별법 졸속 심의에 대한 사과’ ‘국회 행정수도 특위를 통한 타당성 검토’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국민투표론은 정책의 타당성을 차분하게 하나하나 따지기보다는,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자는 ‘원샷 정치’에 가까웠다. 그러한 정치의 극단적 형태가 탄핵 의결인데, 한나라당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반면에 박 의원은 선명해 보이진 않더라도 실용주의적 인상이 강한 해법을 냈다. 박 의원이 7월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이런 해법을 제시한 뒤로 당내 비주류 진영도 일단 잠잠해졌다.

싸이월드에 실은 ‘나라 사랑’

미적지근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련의 행보를 통해 복잡다기한 세력이 모인 한나라당을 그가 이끌어간 힘의 원천은 역시 당 밖 지지자들의 관심과 열정이었다. 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전·현직 대통령을 제외한 현역 정치인 가운데 인기 1위를 구가하고 있다. ‘박사모’ ‘사랑혜’ 등의 인터넷 팬클럽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는 개설 넉달 만에 방문자 100만명을 넘어섰다.

그렇다면 ‘박근혜 인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의 어떤 메시지가 지지자들의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박 의원은 어떤 자리에서든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국가에 대한 책임”을 그는 늘 강조한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비전도 ‘부국강병’으로 요약한다.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 상단에 적어넣은 키워드는 애국애족(愛國愛族)이다.

그는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열흘에 한번꼴로 자신의 일기를 적어 올리기도 한다. 일종의 ‘일기 정치’(日記 政治)인 셈인데, 현충일인 6월6일 0시44분에 올린 일기는 이렇게 적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선 개인의 희생도 있어야 하고 책임도 있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이 아무리 신개혁주의로 가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나라를 지켜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기본 국가관이요, 철학이다….”

네티즌들은 한밤중에 그의 일기가 오를 때마다 “이번에는 내가 첫째”라며 앞다퉈 댓글을 올리고 있다. 쏟아지는 댓글을 관통하는 키워드도 역시 ‘나라’ ‘국가’ ‘국민’이다. 네티즌들은 이런 키워드를 앞세워 “근혜 누님의 말이 가슴을 찌릅니다”라고 응답하고 있다.

애국주의 부활 기류 꿰뚫어

이런 흐름으로 볼 때 ‘박근혜 메시지’는 한마디로 ‘애국주의’(patriotism)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나라 사랑에 대한 헌신과 솔선수범을 강조함으로써 집단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정치 마케팅 포인트를 그가 선점하고 있다는 뜻이다. 박 의원이 애국주의를 자신의 브랜드로 정식화한 적은 없다. 그러나 1998년 그의 정계 입문 때부터 함께 일해온 정호성 보좌관은 “그런 해석에 동감한다”며 “우리의 자문그룹 중 일부 인사도 박 의원의 정치 이념을 애국주의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정치 사상의 역사에서 애국주의는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가장 쉬운 이념코드임이 검증된 바 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건국의 영웅인 가리발디가 ‘통일 이탈리아’의 깃발을 치켜들고 로마로 진군할 때 국민들을 열광시킨 것이나, 프랑스 나폴레옹의 영광도 모두 애국주의적 열정을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었다. 가깝게는 9·11 테러 직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인기가 치솟았던 것도 애국주의가 자극된 탓이었다.

‘애국주의에 대한 열망’의 징후는 최근 우리 사회에도 만만찮게 존재한다. 영화 의 강우석 감독은 5월24일 와의 인터뷰에서 의 성공 배경을 “애국심으로 연결지을 수도 있다. 독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독도우표가 판매 4시간 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는 이런 사회 현상과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 현상’에는 애국주의와 ‘광장 문화’의 두 요소가 담겼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이 가운데 ‘광장 문화’ 요소를 ‘국민 참여’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박 의원의 애국주의는 박정희 대통령을 계승한 측면도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정희 시대의 으뜸 캐치프레이즈는 ‘조국 근대화’였다. 그 시절에는 국민교육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등 ‘국난 극복의 영웅’ 장려 등 애국주의를 고취할 여러 상징 만들기가 시도됐다. 박 의원은 지난 3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저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던 이순신의 말”을 대표 수락 연설의 키워드로 삼았다.

우리 사회에서 하필이면 박 의원을 통해 애국주의가 정치적 힘을 되찾게 된 배경도 흥미롭다.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이 애국주의를 활용하지 않은 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그것을 주창하는 세력의 기득권을 고수하는 도구로 비치는 순간에 생명력을 상실한다.

대표최고위원 선출 뒤에도 초심 유지할까

반면에 박 의원은 정치 계보도 없는 가냘픈 여성에다가, 사리사욕과 거리를 두는 이미지를 쌓은 점이 과거의 보수정치 지도자들과 다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7·19 전당대회에 재출마하면서도 “제 개인 위주로 한다면 이번에 최고위원 출마를 안 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말도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제 위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의 참모들은 “상처를 입을 우려가 있다”며 뒤로 물러섰다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짠’ 하며 컴백하는 전략을 그에게 권고했다.

어쨌든 그는 7월10일 전당대회 대표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했는데, 당내 상황으로 볼 때 그의 대표 재당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명의 최고위원을 선출하되 1위 득표자가 대표가 되는 경선에 그를 포함해 7명만이 출마한데다, 1위를 넘볼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주류 중견 리더로 꼽히는 홍준표 의원은 후보 등록을 했다가 취소하는 소동도 벌였다.

따라서 박 의원의 정치적 장래는 당장의 당내 역학관계보다는 좀더 큰 틀에서 전망하는 게 옳다.

이와 관련해 같은 당의 남경필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만 해도 애초 개혁적인 모습으로 정치권에 입문했지만 7인방(보수적인 민정계 중진들)에 둘러싸이면서 정체성이 변질됐다”며 “주변에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배치하며, 권력분산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게 박 대표를 위해서도 긴요하다”고 말했다. 박형준 의원도 “박 대표가 전당대회 이후에도 당의 혁신을 향한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각론에 그의 목소리가 없다

이런 주문들은 7·19 전당대회로 박 의원이 ‘과도적 대표’ 딱지를 뗀 뒤에 권력정치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참신성을 잃을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는 이인제 의원이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참신성을 바탕으로 바람을 일으켰다가 민주당으로 옮긴 뒤 ‘이인제 대세론’에 안주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한, ‘이인제의 길’도 거론된다.

박 의원은 대표직 100여일 동안 ‘싸우지 않고 정책으로 경쟁하는 정치’와 ‘유화적 대북 정책’ 등의 상품을 선보였다.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 안정감 있는 리더십”(윤건영 의원)이란 호평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단어 100개 범위 안에서만 말하는 정치인” “우아하지만 나라의 지도자라기보다는 퍼스트 레이디 후보로서 만점일 뿐”이라는 혹평도 붙어다닌다. 그의 애국주의적 메시지가 갖는 대중적 호소력과는 별개로, 그것을 뛰어넘는 정책 각론에서 그의 목소리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탓이다. 실제로 그와 가까운 한 한나라당 의원도 “박 의원이 통일·안보 문제에는 강렬한 관심을 갖지만 그 밖에 복지나 경제 문제 따위에는 구체적인 비전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어쨌든 박 의원은 7·19 전당대회 이후 새로운 시험대에 오를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어떤 선택을 통해 자신의 경쟁력을 새롭게 다듬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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