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연구소 설립 바람 부는 각 정당들의 속내… 과연 정책정당으로 거듭나는 계기 될까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우리 정치를 업그레이드할 근본적인 처방전이 될 것인가, 국민 부담만 늘리는 또 다른 짐이 될 것인가.
여야 정치권이 6월5일 개원하는 17대 국회에서 정쟁을 지양하고 합리적인 정책 경쟁이 만발하는 민주정치를 선보이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앞다퉈 정책연구소 설립 경쟁에 나서자 정치권 안팎에서 이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등 주요 정당들이 너나없이 정책 기능이 강화된 생산적 국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두뇌집단인 ‘싱크탱크’가 필요하다며 나름의 청사진을 내놓고 있지만, 그 실효성이 증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전을 개발하라
총선 직후인 지난 4월21일 상임중앙위원회에서 당 안팎의 인사 30여명으로 구성된 정책연구재단 설립추진단(공동단장 김한길, 박명광 당선자)을 발족한 열린우리당의 경우 내부 논의가 상당히 무르익었다.
열린우리당은 미국의 부르킹스연구소(민주당)나 해리티지 재단(공화당),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사회민주당)과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기독교민주당) 등 선진국 정당의 연구재단에 대한 비교·검토를 통해 독일식 모델이 우리 현실에 적합하다는 내부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이념적 성향이 강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싱크탱크인 에베르트 재단을 벤치마킹 1순위로 설정하고, 지난 5월17일 박명광 단장 등이 직접 독일 현지를 방문해 관련 자료 수집도 끝냈다.
최민식 정책연구재단설립추진단 팀장은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두뇌집단인 부르킹스연구소나 해리티지 재단의 경우 정책 연구·개발과 인재풀 양성 기능이 뛰어나지만, 각각 금융자본과 군수산업체의 지원을 받고 있어 정경유착 근절이 핵심 과제인 우리 현실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며 “재원의 100%를 국고로 지원받아 장기적인 정책개발과 국제교류, 시민사회에 대한 민주화 교육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독일식 모델을 따르는 쪽으로 내부 논의를 정리했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이에 따라 6월 안에 연구원 30~40명 등 모두 60~70명 규모의 정책연구 재단을 설립해, 중·장기적인 정책 과제와 비전을 연구·개발하는 데 주력한다는 내부 방침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도 정책개발특위(위원장 이한구 의원)를 중심으로 연구재단 설립방안을 적극 검토해왔다. 전략가로 알려진 윤여준 전 의원과 정책통인 박세일 당선자 등이 중심이 돼 집중 논의한 결과 새로운 연구재단 설립보다는 당내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를 확대·개편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막대한 재원 마련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기존 연구소 운영의 노하우도 계승하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윤여준 전 의원은 “여당 시절 원대한 계획에 따라 출범한 여의도연구소가 야당이 된 뒤 제 역할을 상실한 채 연구위원 2명만이 상근하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했다”며 “여의도연구소를 활성화해 여야간 정책 경쟁의 소재가 될 만한 중·장기 전략과 비전을 생산하는 등 대안 제시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오는 6월 전당대회가 끝나는 대로 상근 연구원을 30명 안팎으로 확대하고, 국고보조금의 50%를 집중 투여하는 방식으로 활성화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보조금 30%는 반드시 정책연구소에
4·15 총선을 통해 진보세력의 원내 진출을 이뤄낸 민주노동당도 당 정책위원회와 300여명의 진보적 학자들로 구성된 ‘교수지원단’을 중심으로 연구소 설립 청사진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 정당의 이런 움직임은 일단 긍정적인 신호로 풀이된다.
무엇보다 여야가 더 이상 정쟁으로 날을 지새는 정치 행태로는 정당의 존립 자체가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싱크탱크 설립과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어, 정치문화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각 정당의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이 이뤄지고 다양한 정책 대안이 제시될 경우,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정쟁과 실현 불가능한 공약 남발 등을 막는 효과도 클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각 정당의 싱크탱크가 안착할 경우 국회의원 재교육 등 정치인의 자질 향상과 국회의 정책 생산성 증대뿐 아니라, 정당이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력을 검증을 거쳐 충원하는 인재풀 기능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현재 여야가 내놓은 청사진만으로는 그 성공을 점치기 어렵다.
일단, 여야가 정책연구소 개발과 확대 경쟁에 뛰어든 데는 선관위의 국고보조금 배분 방식의 변화라는 현실적 요인이 적잖게 작용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핵심 관계자는 “지난 3월12일 개정된 정당법 29조 3항에 따라 각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보조금의 30%를 정책연구소로 배분하도록 돼 있다”면서 “연구소 설립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각 정당이 국민의 혈세인 국고보조금을 정책 개발보다는 당직자 월급 등 당 운영 경비로 낭비해온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한 견제장치가 마련됨에 따라, 제대로 된 정책연구소를 갖추지 못할 경우 앉아서 수십억원의 국고보조금을 포기해야 할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올 한햇동안 열린우리당은 36억원, 한나라당은 30억원 정도의 국고보조금을 정책연구소를 통해 지원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당들이 정책연구소를 설립한다 해도 혈세를 쓰는 것에 걸맞은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을지도 여전히 미지수다. 지난 1995년 집권 민자당은 “세계화 시대를 경영할 중장기 정책을 개발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려 43억원의 당비를 출연해 여의도연구소를 만들었다. 민주당도 김대중 대통령 집권 당시 장기적인 정책 비전 제시를 목표로 국가전략연구소를 운영했다. 그러나 여의도연구소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집권 전략을 마련하는 조력기관 기능을 하면서, 한나라당의 선거전략이나 대여 투쟁 논리를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국가전략연구소도 여권의 국정운영 전략이나 정권 재창출 방법 등에 힘을 쏟았다.
각 정당 ‘보스’의 정치적 이해나 정당의 정략적 목표를 충족하지 않도록 할 적절한 견제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정책연구소는 국민 혈세만 낭비하는 정당의 사조직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여야의 정책연구소가 중앙당 슬림화에 따른 ‘잉여인력’의 도피처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여야는 이런 우려에 대해 완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투명한 운영을 다짐하고 있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정책연구재단설립 단장은 “재정을 국고에서 지원받는 만큼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만한 수준의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만 싱크탱크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며 “정쟁에 휘둘리지 않고 투명하게 연구소를 운영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정책연구재단이 당의 정치적 입김에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 내부뿐 아니라 외부 인사까지 참여하는 공동이사회를 구성하고, 정당으로 독립된 법인 형태로 운영하는 방안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또 17대 국회 출범 직후 당 안팎에서 100억원 이상의 재원을 마련해 대규모 정책연구재단을 설립하려던 애초 계획도 바꿨다. 일단 국고보조금 지원 범위 안에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국민적 심판과 동의를 얻을 뒤 확대를 모색하기로 했다.
“다른 데 쓸 돈도 모자라는데…”
한나라당의 윤여준 전 의원도 “확대 개편될 여의도 연구소의 상근인력을 최소화하고, 주요 정책과제별로 아웃소싱을 주는 형태로 효율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총선 과정에서 “여의도연구소를 강화해 한나라당을 민생만 생각하는 정책정당으로 완전히 바꿔 새롭게 태어나겠다”며 “정당 국고보조금의 50%를 정책개발비에 쓰도록 의무화하는 정책개발자금 공영제를 도입하고 국고보조금에 대한 철저한 감사를 받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한 핵심인사는 “(당이 진) 빚도 갚아야 하고, 다른 데 쓸 돈도 모자라 정당이 난리”라며 “여의도연구소 확대 등 보강 프로그램은 있지만 어느 정도 구체화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각 당이 의욕을 보이고 있는 정책연구소 설립 움직임이 시대의 변화와 국민적 열망을 담아낼 대안이 될지, 과거의 관성과 정당의 다급한 현실적 필요에 따라 흔들리는 또 하나의 장밋빛 청사진으로 기록될지 모두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경호처, 윤석열 체포 저지에 ‘반기’ 든 간부 해임 의결
전원일치 여부 몇 초면 알 수 있다…윤 탄핵 심판 선고 ‘관전법’
건대입구 한복판서 20대 남녀 10여명 새벽 패싸움
김수현 모델 뷰티 브랜드 “해지 결정”…뚜레쥬르는 재계약 않기로
“윤석열 파면하고 일상으로” 꽃샘추위도 못 막은 간절한 외침
계엄이라고? 아차, 이제 블랙코미디는 끝났구나! [.txt]
이것은 ‘윤석열 파면 예고편’…헌재 최근 선고 3종 엿보기
권성동 “헌재 결정 승복이 당 공식 입장…여야 공동 메시지 가능”
민감국가 지정, 보수 권력 핵무장론·계엄이 부른 ‘외교 대참사’
윤석열 탄핵 선고 ‘목’ 아니면 ‘금’ 가능성…헌재, 17일에도 평의